『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비로소…. 비움, 비로소…. 채움

청아당 2021. 8. 14. 12:02

비로소. 비움, 비로소. 채움

 

○○

2021. 08. 14.

 

차크라를 교육처럼 주입받는다고 해서

펼쳐지는 것은 아니다

심는다고 심어지는 것이 아니다

고요의 극점을 원한다고 해서

수시로 드나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열쇠로 잠겨있는 것도 아니다

심어주지 않아도 펼쳐질 것이요

원하지 않아도 열어줄 것이다

마음자리가

""

일 때.

비로소

원하지 않아도

열림이며 펼쳐짐이리라

 

 

고요의 극점이 열린 후 마무리로 차크라가 펼쳐졌다.

 

전에 보았던 차크라의 형태보다 더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아름다움은 형용할 수 없는 세계이다. 그림으로 그려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말 그대로 아름다움을 향해 내면으로 파고드는 경지이기에 그리는 것보다는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 속에서 깨달음이 살아 꿈틀거린다. 깨달음은 살아있는 생명체이며 변화무쌍하게 새로운 형상을 갖추는 것을 좋아한다. 꿈틀거리는 생명체이기에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모른다.

 

깨달음은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생명체로 작용할 때는 그 변화무쌍함에 넋을 놓을 때가 많다.”

​​

- 이른 아침 공원바위 명상을

출근 후 기록한다 -

 

 

그렇다. 원한다고 다 보거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원하지 않아도 마음이 일 때 비로소 열림과 펼쳐짐이 이루어진다.

 

공은 마음을 비운다는 의미도 있지만 채움이라는 큰 의미도 있다.

 

공은 모든 것을 비워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채움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 공이기에 그 공은 처음과 나중을 말하는 것이 되고 알파와 오메가처럼 신의 묘수로 작용하기도 한다.

 

 

깨달음은 절정에 다다르면 더 이상 새로운 것을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그 이상의 새로움이 나타나도 절정에 다다른 깨우침인 우주의 근원을 알고 나면 그 나머지는 부수적인 현상으로 다가오거나 조금 더 다듬어져서 나타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보름달이 채워짐과 이지러짐을 반복하면서 전에 보았던 똑같은 달로 존재하듯이 깨달음을 향해 평생동안 수련을 한다고 하여 특별히 더 나아지거나 더 깊은 경지를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반복되는 과정에서 더 깊게 숙련공이 장인이 되는 것처럼 그러한 과정들을 거치게 된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색다른 현상들을 경험할 수는 있어도 깨달음의 근본을 뒤집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주가 대폭발하거나 우주의 신비가 펼쳐진 모습을 바라보았다면 바로 그 순간이 최고의 경지이다. 거기에서 더 이상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우주적인 작용이자 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순간에 잡힌 모습이 영원한 것처럼 우주의 속살이 보여진 그것이 최고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끔씩 깨달음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은 없는가? 라는 궁금증을 느낄 때가 있다.

 

한마디로 없다.

 

계속해서 반복되어지거나 다시라는 현상이 거듭되어 색다른 것처럼 보여질 뿐 그 이면에는 깨달음을 흔들만한 그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깨달음과 현상을 구분해가며 수련에 임해야 혼동이 오지 않는다.

 

더 깊이 더 화려하게 현상이나 깨달음의 극치를 경험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이미 모든 것을 다 보여준 상태에서 더 이상 보여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보여지는 것을 보는 것이다. 깨달음은 감추어진 것을 보는 것이 아니다.

저절로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이며 그 속에서 감추어진 것을 깨닫는 것이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2021814일 토요일

 

청아당 엄 상 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