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을 삶에 적용할 때
깨달음에는 대각과 소각이 있다.
대각은 우주적인 깨달음이라면 소각은 삶에서 깨닫는 것을 말한다.
대각과 소각은 엄밀하게 분리되어져 있는 것 같지만 일상에서 하나로 혼용하여 쓰는 경우가 많다.
대각은 우주적인 깨달음이기에 종교와 철학을 초월하여 하나로 통한다.
소각은 일상에서 깨닫는 것 외에 대각을 접목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대각은 유교, 도교(선도), 불교, 기독교, 유대교, 철학 등 다양한 종교와 철학이 낳은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각은 모든 종교와 철학을 아우르는 탓에 그 근본은 하나로 일맥상통하고 있다.
다만 유교, 도교(선도), 불교, 동양철학 등은 아시아권에서 영향력을 크게 미치고 있는 반면 기독교, 유대교, 서양철학 등은 유럽과 남미, 북미 등에서 영향력을 크게 미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대각보다는 소각이다.
소각은 일상에서 바라보는 대각의 관점에서 발생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소각은 홀로서기에 실패하였기에 대각과 함께 어우러져 존재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대각은 홀로서기에 강하다면 소각은 집단을 이루려는 성향이 강하고 응집시키려는 힘이 강하다. 그러다 보니 소각은 대각과 함께 손을 맞잡고 나아가고자 한다. 여기에서 생기는 문제점은 새분화된 대각을 어떻게 소각의 성향에 맞춰 적용시키느냐가 문제이다.
대각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일목요연하여 그 뜻이 명확하게 드러나지만 소각은 대각과 혼용되어 사용되거나 지정학적 요인 때문에 발생하는 국가나 개개인의 성향에 맞춰 대각을 끌어다 쓴다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되어진다.
아시아권에서는 유교, 도교(선도), 불교, 동양철학 등에 의해 영향력을 강하게 받고 있다면 유럽과 북미, 남미권에서는 기독교, 유대교, 서양철학 등에 의해 영향력을 강하게 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 둘의 조합과 결합과정이다.
깨달음을 깨달음 그 자체로 보면 좋은데 깨달음을 일상에 적용시켜 사용하려다 보니 본의 아니게 자신이 쳐놓은 덫에 걸리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불교가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가장 문제 되는 것은 그 어느 곳에도 “집착하지 말아라”, 그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라고 하는 데에 있다.
깨달음은 하나의 허구세계와도 같다. 우주의 허공을 헤집고 그 안에서 건져내는 진리이기에 정제되지 않은 채 일상에서 그대로 사용하기에는 큰 무리수가 따른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유대교의 엄격한 율법을 파괴한 예수가 있었기에 대중에게 더 친근한 기독교가 탄생된 것처럼 율법에 얽매이면 커다란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하면 이것도 하지 말아라 저것도 하지 말라는 유교적 가르침이 튀어나와 남녀 간의 활동 범위를 차별화시키거나 각종 규범과 제약으로 인해 운신의 폭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그것이 반드시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운신의 폭을 억제하는 데에는 한몫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각종 규범과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사람들 때문에 깨달음에서도 자유분방함과 우주를 꿰뚫는 혜안 등이 요구되어지기도 한다.
만약에 그 어느 곳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거나 그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한다면 존재 이유 자체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말 그대로 실천하며 살려고 한다면 홀로 산속에 들어가 살거나 존재 자체를 부정해야 하는 일이 발생한다.
깨달음을 유지하려고 평생 수행하는 고승도 집착하며 사는 것이 되고 깨닫기 위해 평생 수행하는 수행승도 집착하며 사는 것이 되고 세속에 살거나 산속에 살거나 그 어느 곳에 있든 집착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대각 안에 뛰어들어 산다고 해도 결코 이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
물론 그 근본 뜻은 이와 같지 않을 것이다. 집착도 좋은 집착이 있는가 하면 나쁜 집착이 있는 것처럼 본래의 뜻은 좋은 집착을 적절한 수준에서 나아가고 물러서는 법을 터득하여 사용하라는 뜻이 더 강할 것이다. 하지만 곡해하여 한발 앞서서 들어가면 이렇게 커다란 문제로 불거질 수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고 보면 깨달음을 소각에 접목시키는 과정에서 살펴보면 유교적 깨달음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있는가 하면 불교적 깨달음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있고 도교적 깨달음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있다. 그리고 기독교적 깨달음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고 유대교적 깨달음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소각에서 대각의 일부분을 사용하여 접목시킬 수가 있고 혼용하여 다양한 대각을 둘 이상 접목시켜 혼용하여 사용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 어떤 것을 사용하든지 정답은 없다는 점이다.
일상에서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입듯이 소각에다 대각을 입히는 과정에서 국가나 개개인의 개성이나 취향에 따라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어떤 하나의 대각만이 최고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어불성설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저마다 개개인의 개성과 취향을 존중해줘야 하기에 우주의 절대신이라 할지라도 정확하게 하나만을 선택해서 사용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기가 좋아하는 성향을 선택하며 살아가게 되어있다. 그 누가 아무리 강요한다 해도 그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개성이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소각은 어떤 대각을 선택하여 접목시켜 나가느냐가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불교처럼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면 그것은 한세대에서 인류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 될 수도 있기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을 너무 강조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자칫하면 산속에 들어가 홀로 살아가야 하는 것처럼 비춰지거나 더 이상 대를 이을 수 없는 상태가 되거나 경제활동에 지장이 발생하거나 인류의 삶의 질을 높이는 과학 등을 등한시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선택이다. 그리고 융합이다.
선택과 융합이 하나로 조화를 이루었을 때 비로소 삶의 질이 높아지고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 의식이 확고하게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는 끝없는 탐구 정신으로 또 다른 세계를 추구해나가고 있다. 그것이 우주적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고 삶의 터전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
지상 최대의 관점은 깨달음도 깨달음이지만 삶의 질을 얼마만큼 상향시켜 나가느냐가 관건이라고 볼 수 있다. 어차피 깨달아도 삶의 족쇄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평생토록 삶과 깨달음은 공존하며 융합을 꾀해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2021년 5월 12일 수요일
청아당 엄 상 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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