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도중에 나타나는 잡념과 망상
수련도중에 나타나는 잡념과 망상 각종 인터럽트 현상과 교착상태에 얽매이지 않기
수련을 하다보면 수련 중에 갖가지 잡념과 망상 때문에 수련이 방해받는 일이 종종 일어나게 된다.
그 원인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아마도 삶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왜 사는가? 또 깨달음은 무엇인가? 에 귀결되는 의문과 같은 맥락에서 출발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 하고 있는 모습이 어떤 때는 한심하고 처량하기까지 하는 느낌을 받을 때 또는 정신이 한곳으로 집중되지 않고 자꾸만 다른 곳으로 흘러가다 보면 뜻하지 않은 돌발 상황에 직면하여 수련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잡념과 망상에 시달리다보면 수련을 포기하게 되는 경우까지도 생겨나게 되기 때문이다.
잡념과 망상이 생겨나는 것은 아직까지 수련에 대한 목표점이 확고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갈등의 요소가 곳곳에 산재해 있다 보니 수련만 해도 되는 것인지 아니면 선각자들이 말한 대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니까 마음을 비우고 손 놓고 그냥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인생은 덧없고 무의미한 것이니까 오로지 수련에만 전념해야만 하는 것인지 아니면 스님이나 목사가 되어 진리를 공부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 수련 중에 별의별 잡념과 망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알고 시작한다면 문제는 심각하지 않겠지만 처음부터 다 알기에는 어려움이 있고 살면서 경험을 통해서 알아야할 부분이 있기에 여러 가지 고민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사람답게 살다가 가는 것이 사람의 도리일 것이다.
한 가지 믿음으로 끝까지 가라 – 청아당 엄상호 詩(2011. 03. 27.)
선택은 자신의 길이자
운명적인 만남으로 시작되어진다.
종교에 대한 자유는
모두에게 주어져있지만
선택의 길은 오직 자신밖에 없다.
불신은 하늘도 멀리하기에
오로지 한우물만 파야한다.
그 끝이 희미해져
보이지 않는 안개속일지라도
자신을 믿으며 한길을 향해 달려가야만 한다.
믿음은 모든 망상과 잡념을 버리게 한 후
신성한 마음으로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으게 하는 힘이 있다.
종교를 믿지 않아도
시련과 좌절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지만
종교를 믿는다고
그 모든 시련과 좌절을 면죄해주지는 않는다.
종교를 믿는 사람이나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나
살아있는 동안 시련과 좌절은 끊임없이 주어진다.
하지만 똑같은 상황이 벌어질 때
그나마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사건들이 해결되어지거나
심리적 여유를 갖고 지탱해나가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고 각박한 현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종교를 선택하기보다는
기복신앙과 믿음을 통해 얻게 되는
평안한 마음 때문에
꿈의 안식처인 종교를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좌절과 포기 속에서
미완성의 삶을 유지해나가는 일보다는
우주의 틈새 속에서 언제라도 뛰쳐나와
어버이처럼 반겨줄 종교를 위해
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한 다음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준비된 자세로
하늘이 감동할 때까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 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나머지는 알아서 하늘이 해결해준다.
홀가분한 상태에서 건져 올린 명상가들의 말 그리고 성현들이나 선각자들이 말하는 말속에는 현실에서 실천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고 또 그렇게 말한 사람들과 똑같은 상황에서 행동해야만 가능하다는 사실 또한 알아야할 것이다. 만약에 성현들 말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실천하면서 살려고 한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숨통이 막혀서 죽거나 스트레스를 받아서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비록 고단한 삶속에서 힘든 생활을 영위하고 있지만 먼저 치열한 현실 속에서 부대끼는 삶을 바탕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가져야하기 때문이다. 홀로 살면서 수련을 하다보면 거추장스러울 것 없는 상황에서 말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더구나 깨달음을 얻은 상태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은 없을 것이다.
수련을 하다보면 보통 사람들보다는 더 많은 시간을 마음을 비우는데 시간을 할애할 것이고 홀가분하다보니 거칠 것 없는 상태에서 무슨 말인들 못하겠는가? 더구나 부양해야할 가족이 없는 상태라면 그 홀가분한 상태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리라는 말에 너무 귀 기울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그렇게 말하는 선각자조차도 늘 그러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을뿐더러 잠시 그러한 상태에 있을 때 말하는 것 가지고 그렇게 살지 못한다고 한탄하거나 괴로워할 필요까지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현들이 말한 것이라고 해서 모두 다 텍스트로 삼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성현들이 말한 것 중에는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말들이 많고 또 홀가분한 상태에서 건져 올린 말이기에 다분히 이상적인 면이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보통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해왔고 또 설령 깨달음을 얻은 후라도 크게 달라질 것 없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도 하다.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지만 이상만이라도 그렇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강하다보니 공부 잘하는 모범생처럼 그렇게 살기를 바라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큰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공부 잘하는 모범생처럼 규칙적이고 모범적인 생활 속에서는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어떤 큰 변화가 내면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깨달음은 이루어질 수 없는 묘연한 것일 수도 있기에 주어진 현실 속에서 큰 변화를 꾀하게 되는 것이 깨달음에 대한 첫걸음인지도 모른다. 결국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지만 현상적인 체험을 통해야만 확실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꽉 매인 생활 속에서는 자유분방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지도 모른다.
선각자들이 이루어놓은 업적을 텍스트로 삼을 수는 있지만 그대로 똑같이 따라가려고 하는 수련자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각도를 달리해서 접근해 들어가야 할 것이다. 깨달음은 지식이나 선문답 식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호흡을 통한 침묵 속에서 우주적인 영적현상들을 접하며 내면의 고요를 향해 들어가야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각자들이 깨달았던 길을 똑같이 걷는 각자들이 있다면 제대로 깨달았다고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각자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트레이드마크가 있어야하며 이는 깨닫고 난 후 경험에서 하나씩 발견되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각자들은 저마다의 특징과 독특한 생활방식이 주어지는 것이 하나의 정설로 나와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기괴하거나 해괴한 짓을 일삼으라는 것은 아니다. 정도를 걷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지만 성격이상에서 오는 행동이 아니라면 남의 시선을 끌기 위한 행동은 미관상 좋지 않기 때문이다.
선각자들이 말하는 말과 글은 모두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무작정 텍스트로 삼으라는 말은 삼가하고 또 삼가해야할 부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무리 방대한 자료가 준비되어있어도 그 분야에서 꼭 필요로 하지 않은 자료는 유용한 정보가 되지 못하듯이 꼭 필요하지 않은 자료는 쓰레기로 취급되거나 또는 잠재적 정보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치와 같기 때문이다.
좋은 말이나 글도 마찬가지의 원리일 것이다. 성현들이나 선각자들이 말한 것일지라도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행동을 요구한다거나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을 요구한다면 당연히 거부의사를 표현하거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릴 것이다. 좋은 말이 산처럼 쌓여있어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맞지 않으면 이렇게 흘려버림으로써 과부하상태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의지에 대한 자율적 기능을 만끽하려는 지혜를 갖고 있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충분하게 소화해낼 수 없을 때에는 자신의 의지에 의해 옆에서 아무리 좋다고 강요를 하더라도 언제든지 과감하게 버릴 줄 아는 지혜를 갖고 있다는 말과 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자칫하면 천편일률적인 인간상품으로 취급당할 위기에서 벗어나 능동적이면서도 다양한 사고아래 자유의지를 펼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각자보다 더 각자다운 면모이다. 버릴 것은 버리고 잡을 것은 잡으며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스님이 되고 싶은 사람은 스님으로 목사가 되고 싶은 사람은 목사로 또 사회인이 되고 싶은 사람은 사회인으로 살아가듯이 타고난 그릇과 성격으로 인해 주어진 상황을 슬기롭게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늘 새롭게 쓰여지고 있으며 모두가 한마음처럼 움직이지 않고 저마다 독특한 행동과 사고로 다양한 사회를 만들어가며 미래를 향해 오늘도 쉼 없이 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로 미루어볼 때 남이 간 길을 똑같이 따라가려고 하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의 도리라고 볼 수 없다. 더구나 타고난 처지와 환경 그리고 성격과 주어진 능력이 다른 상태에서 무작정 좋다고 하니까 그에 맞추며 살아가려고 한다면 이 또한 모순이라고밖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수련자가 갈등을 일으키는 부분이 이 부분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다. 현실은 맞지 않는데 선각자들의 길에 맞추려다보니 당연히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조건 똑같아야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보니 반사적으로 갈등의 진폭이 커지면서 고민 아닌 고민 때문에 머리를 싸매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주어진 상황에서 적절한 변화를 꾀할 수는 있어도 무조건적으로 선각자들이 갔던 길을 똑같이 따라가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반드시 똑같이 따라하려고 하는 것은 현실도피를 생각하게 하는 지름길이기도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할 것이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수련자들이 선각자들이 갔던 길을 향해 똑같이 가려하고 있는가?
물론 좋은 말들이 산처럼 쌓여있지만 실천을 통해서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진정으로 얻을 수 없기에 너도나도 수련을 통해 텍스트에 주어진 선각자들의 길을 따라 걸으려고 하겠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똑같이 걸으려는 수련자가 있다면 평생을 수련해도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깨달음은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발견해내는 일이기에 선각자들이 갔던 길을 똑같이 따라가려고 하는 수련자는 결국 그 수준에서 한 발짝도 더 앞질러갈 수 없을 것이다. 설령 그 결과는 같다고 할지라도 깨달음은 선각자들이 갔던 길을 답습하는 차원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하게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깨달음은 또 다른 세계를 여는 차원이자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발견하는 일이기에 주어진 상황에서 생명에너지 빅데이터 마이닝 기법을 동원하여서라도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발견해내도록 노력해나가야 할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욕심도 버리고 자신을 비롯하여 들고 있던 모든 것들을 수련 중에야 얼마든지 버릴 수가 있겠지만 눈을 뜨고 현실을 대하면 말처럼 쉽지 않은 게 현실이기도 하다. 당장 눈을 뜬 순간부터 유혹이 시작되어 선각자라 할지라도 자신을 위해 공부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닦아나가다 보면 마음을 비울 시간적 여유나 욕심을 버릴 시간적 여유가 없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보통 사람들이 부리는 욕심이나 선각자들이 부리는 욕심이나 욕심은 다 욕심인 것이다. 자신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면서 남에게 욕심을 버리라고 말한다면 설득력이 없기 때문이다. 가끔씩 욕심을 버릴 수는 있겠지만 그리고 마음도 비울 수가 있겠지만 현실을 대하면서 그것을 실천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주변엔 좋은 말들이 산처럼 쌓여있지만 누가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실천하고 있는지는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아직껏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선각자들처럼 모두 다 홀로 산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홀로 지내면서 진리를 공부하고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만약에 너도나도 깨달음을 위해 모두 홀로 된다고 가정을 해보자.
인류의 미래는 그야말로 암담한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저출산 문제 때문에 국가적인 차원에서 고민하고 있는 처지에 비추어본다면 자연의 이치에 어긋나는 행위일 것이다.
생각을 해보아라. 당장 경제적으로 무능력해져 인구수에 비례해서 경제활동은 감당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져 무질서 속에서 어떤 현상이 발생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 될 것이다. 더구나 대내외적 요인에 의해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세계공황은 그렇지 않아도 고단한 삶을 더욱 힘들게 하는 처지가 될 것이다.
단순히 깨달음이라는 세계만 동경하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경제적인 문제를 소홀히 한다면 자신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천편일률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각자 다양한 사고아래 서로 의지하면서 자기 뜻대로 움직이며 살아가게 되어있는 것이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은 현실을 바탕으로 깨달음을 위해 살아가면 되는 것이고 종교인은 종교를 위해서 사회인은 사회를 위해서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더불어 사는 세상 속에서 순환의 법칙에 의해 서로 배우며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어떤 특정한 한사람에 의해 이 세상이 움직여진다고 생각해서는 큰 오산이라는 것이다.
세상은 참으로 다양하고 예상치 못한 일들이 많기에 그렇게 홀가분하게 살 수 있으면 그렇게 살아가고 세속에 젖어 고단한 하루를 살아가야 한다면 또 그렇게 살아가야만 한다. 하지만 세상물정이 그리운 바다가 날마다 뭍으로 다가와 안부를 묻는 것처럼 서로가 그리워하면서 사는 것이 사람 사는 일이기도 하다.
아무리 깊은 산 속에서 산다고 해도 사람이 그리운 것은 인지상정이기 때문에 말처럼 모든 것을 초월하고 마음을 비운 것처럼 살아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마음은 잠깐 동안은 비울 수 있을지 몰라도 바람처럼 또 다른 방황을 위해 어디론가 떠나야만하기 때문에 마음을 위해서라도 수련은 평생 동안 해야 하고 흩어지려고 하는 마음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꾸준하게 수련을 놓지 말아야한다.
살다보면 깨달았다고 공부를 소홀히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일 때가 있고 또 먹고 살려면 무언가 해야 하기 때문에 말처럼 마음을 늘 비울 수 없음을 알 것이다. 그야말로 석상이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 깨달음만 갖고는 배가 고파 살 수 없을뿐더러 세속을 멀리해서는 단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기 때문에 세속과의 인연은 끝없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세속을 멀리하라고 이르는 종교적인 가르침조차도 세속을 멀리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서로 얽혀져있기도 하다.
사람의 마음은 바람과 같아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
어떤 때는 천하를 들고도 남는 힘이 솟아날 때가 있는가하면 어떤 때는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어떤 때는 한없이 나약하고 유혹에 쉽게 빠져드는 경우도 생겨나기 때문에 항상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리면서 살수는 없는 일이다.
산 속에서 혼자 살지 않는 한 유혹은 늘 일어나게 되어있고 잡념과 망상에 시달리며 살게 되어있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기본적으로 상향적인 욕구가 있어 현재의 자신보다는 미래의 자신을 꿈꾸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공부를 하고 출세를 하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기도 한다. 공부를 한다고 누구나 출세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부를 하다보면 깨달음으로도 느낄 수 없는 세상과 우주의 원리를 깨닫게 되고 학문적 깊이 또한 깨달음에 버금갈 정도로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주관적인 세계에 빠져들어 자신만이 최고로 높다거나 겸손하지 못한 행동을 하게 되면 인과응보에 의해 반드시 그에 상응한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그리고 깨달았다고 해서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보통사람과 똑같은 사람일뿐이다. 다만 남보다 더 노력하고 부지런하게 배운 덕분에 자신의 위치가 조금 나아졌다고 해서 만인의 위에 서려고 한다면 그 또한 교만에 속할 것이다.
자연의 원리를 이해하고 순리에 따르며 살아가려고 하는 것은 순리를 어기게 되면 그에 상응한 대가를 받아야하기 때문에 자연의 순리에 맞춰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선각자들이 취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가족계획으로 인해 노인을 부양해야할 젊은이들이 줄어든다면 젊은이들의 부담이 커질 것은 뻔한 일일 것이다. 이렇게 가족계획으로 인해 인류가 아예 멸망해버린다면 윤회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인류에게는 오히려 더 좋은 면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죄를 짓는 일이기 때문에 인류의 멸망은 종교적으로 해석하면 윤회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인류에게는 매우 희망적인 메시지가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어서 편히 지내려는 종교의 틀을 벗어나기 때문에 인류의 고민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비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자살을 시도하거나 죽음으로써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이다.
주어진 목숨은 자연의 혜택을 충분히 받고 넘겨주어도 늦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접촉점에 촉각을 곤두세워 고성능감촉이 달린 센서를 통해 기를 운용한 호흡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가려는 노력이 필요할 때이다.
단순한 것이 좋듯이 원리는 간단할수록 이해하기 쉽고 효과 또한 탁월할 것이다.
수련도중에 신비현상이 일어나면 동요하지 말고 하나의 현상이구나 생각하며 특별하게 부각시키지 말고 여과시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투시(과거, 현재, 미래, 전생 등), 천화란추, 미인, 시체 썩는 냄새, 사천왕이나 악마, 귀신, 천당과 지옥이 보이더라도 동요하지 말고 그대로 수련에 정진하라. 석가나 예수 그 밖의 성인이나 신선 등이 나타나더라도 동요하지 말고 이 모든 것은 하나의 현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된다.
무서운 형상으로 자신을 향해 돌진해서 들어오면 심안으로 신광을 발산시켜 퇴치시켜라.
피라미드나 기방어막을 쳐서 안전하게 자신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적(잡념과 망상 등)을 감시하고 레이더 추적장치를 마련하여 호흡 속으로 빨려 들어가려는 노력을 하면 잡념과 망상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이다.
수련을 할 때 효과가 나타나면 수련을 하지 말라고 해도 할 것이다.
하루라도 수련을 하지 않으면 마음 한구석이 허전할 정도로 서운함을 느낀다면 호흡에 대한 매력을 발견해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큰 것을 바라지 말고 차츰 발전되어져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수련을 할 때마다 커다란 기운이 다가온다면 호흡에 대한 매력은 점차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청아당 엄 상 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