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선한 자에게는 위안을 악한 자에게는 경각심을

청아당 2019. 3. 7. 10:17

선한 자에게는 위안을 악한 자에게는 경각심을

 

공존하는 선악은

선한 자에겐 위안을 심어주기위한 장치요

악한 자에겐 경각심을 심어주기위한 장치이다.

 

 

중용의 도를 지키는 공존하는 선악이지만

한쪽으로 기울면 작동하는 것이 공존하는 선악이다.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똑바로 걷는 사람들을 위해

만행과 악행을 일삼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공존하는 선악이기도 하다.

 

 

공존하는 선악은 인과율과 연계되어져 있어

잘못하면 잘못한 만큼 벌을 받게 되어 있고

잘하면 잘한 만큼 보상을 받게 되어 있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공존하는 선악이 작동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면

이 또한 잘못이다.

 

늘 천칭처럼 저울질하다가

어느 한쪽으로 쏠림현상이 발생하면

작동하는 것이 공존하는 선악이기 때문이다.

 

 

선과 악은 늘 상존한다.

 

어느 한쪽으로 움직이든 간에

선과 악은 그림자처럼 움직이기 때문이다.

 

다만 선의 기준과 악의 기준일 것이다.

 

수치로 따진다면

선의 기준이 악의 기준에 도달했을 때

작동되는 것이 공존하는 선악이요

악의 기준이 선의 기준에 도달했을 때

작동되는 것이 공존하는 선악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위와 같은 기준에만 미치는 것은 아니다.

 

그 시점은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큰일에까지 해당된다는 점이다.

 

큰일이 생길 때 전조증상이 나타나듯이

사소한 일이 모여

나중에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경우를 볼 수 있듯

사소한 일을 무시하거나 방치했다간

큰일로 번지게 되는 경우와 같기 때문이다.

 

 

선이 선으로만

악이 악으로만 존재한다면

공존하는 선악은 설 자리를 잃어버릴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선이 악으로 변했을 때 발생하는 것이 공존하는 선악이요

자신도 모르게

악이 선으로 변했을 때 발생하는 것이 공존하는 선악이기 때문이다.

 

알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고 행할 때 나타나는 것이 공존하는 선악이다.

 

물론 안다고 해서 발생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있거나

알면서도 당하게 되는 것이 공존하는 선악이다.

 

그리고

상대에 따라 배려하다보면 발생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하늘의 섭리는 공존하는 선악에서조차

작동되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렇고

인과론에 결부되어져

선한 행동을 했는데도 악한 행동으로 비쳐지게 되고

악한 행동을 했는데도 선한 행동으로 비쳐지게 된다.

 

선이 악한 행동으로 바뀌게 된 이유이고

악이 선한 행동으로 바뀌게 된 배경이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인데도

현실에서는

이 양면성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아니 인간세계뿐만 아니라 이 우주를 관통하고 있고

더 나아가서는 신의 세계와 사후세계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종교에서 이러한 부분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신들을 우상으로 치부해버린다.

 

더구나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는 다 우상으로 치부해버린다.

 

거기에다 불신자(不信者)와 우상을 믿는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사탄이나 마귀로 변하게 되고

우리들은 지금 사탄과 마귀의 형태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셈이 된다.

 

고귀하고 위대한 자라도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사탄과 마귀의 형태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셈이 된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하나님을 잘 믿다가도 반항을 하거나 거역하게 되면

천벌을 받게 된다.

 

끊임없이 주야를 가리지 않고 믿고 또 믿어야만

하나님께 겨우 인정을 받게 된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늘 인자하고 인내할 줄 알고

기다릴 줄 알고 다시 돌아오기를 간절하게 애태우기도 한다.

 

 

하나님의 품은 늘 열려있는 공간이다.

 

한편으론 악하게 굴다가도

아무리 악한 행동을 했어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면

그 순간부터 악한 허물을 다 덮어주며

선한 행동으로 바뀌도록 용서를 해준다.

 

그래서 하나님의 품은 우주처럼 넓고도 넓으며

하해와도 같은 은혜로 언제든지 선하게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아마도 성자들의 품도 이러한 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종용하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그리 나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성자들의 말씀엔

폐부를 찌르는 핵심이 살아있기에

이러한 생각은 더욱 힘을 얻고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어렵고 힘들 때

성자들의 말씀을 듣다보면 힘이 솟아나기 때문이다.

 

경험과 현실적인 삶을 바탕으로 그려져 온 글이기에

그 힘은 더욱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하게 살아야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성자들에게 기쁨을 주기위한 노력이요

악하게 살면 안 되는 이유는

하나님과 성자들에게 걱정과 슬픔을 안겨주면 안되기 때문이다.

 

선한 자에게는 위안을

악한 자에게는 경각심을 심어주는 것이

공존하는 선악이기는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악한 행동보다는 선한 행동을 더 선호하는 것이 좋다.

 

그러고 보면

교만보다는 겸손이 더 좋기에 그렇고

교만은 겸손을 누를 수 없기에 더욱 그렇다.

 

201937일 목요일

 

청아당 엄 상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