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것보다는 단점을 말하게 되는 것은 – 공존하는 선악
공존하는 선악은
신을 모독하거나
성자들을 모독하는 논리가 아니다.
그동안 익숙하게 느껴왔던 것에서
새롭게 바라보자는 뜻이 강하다.
하나님은 지금도 틈만 나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한다.
성자 또한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논리가 질서정연하니까
그에 무조건 따르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하나님만 믿고 무조건 따르라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편한데도
왜, 많은 사람들은 반항하며 거역하고 있는지
직접 경험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일 것이다.
하나님의 시간표와 인간의 시간표에 커다란 차이가 나서이다.
당장 급한데 고난과 시련을 충분하게 겪은 후에
보상을 해주겠다고 하니까
잘 믿다가도 반항하거나 거역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성자들 간에도 문제가 있는 것은
동서양의 그림이 다르다는 데에 있다.
같은 영적인 눈으로 보고 있는데
성자들조차 서로 다른 눈으로 보고 있느냐이다.
명상을 하는 각자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다 다른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가이다.
그렇다면
성자들이 다 다르게 보듯이
각자들이 보았다는 영적인 세계 또한
그대로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이야말로 커다란 함정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각자들이 본 사후세계를 무시하려면
먼저 성자들이 본 사후세계도 무시해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동서양으로 확연하게 구분되어지는 사후세계를 설명하라고 하면
무슨 잣대로 해야 하는지 갈 길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좋은 것보다는 단점에 대해 자주 말하게 되는 것은
좋은 것은 다 알고 있기에 그렇고
단점은 잘 모르고 있기에 그렇다.
성자들의 말씀이나
성현들의 말씀이나
옳은 것은 옳은 것이다.
어떤 기준에서 보면
불변의 진리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로인해 발생할 예기치 못한 일 때문에
오히려 상처 아닌 상처를 받을 수도 있음을 알게 된다면
선한 행동이 악한 행동으로 뒤바뀌게 됨을 알게 된다.
분명 선한 말과 선한 행동으로
평생을 일구어 온 삶들인데
어찌된 일인가?
이는 공존하는 선악이 선율을 타고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악의 근원을 강조하고 있는 종교에서
악을 선으로 회개하도록 가르치고 있지만
양면성을 피해갈 수는 없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그 어느 곳으로 움직이든
공존하는 선악의 그물에서 빠져나올 수 없기에
할 수만 있다면
악한 행동보다는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이 더 좋다.
악은 잔인함과 만행을 저지르고도
변명으로 일관하거나 반성할 줄 모르며
타인에게 강압과 억압 그리고 불안감을 조성하며
기존의 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지옥을 연상하게 하기에
악보다는 선을 더 선호하는 것이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선과 악이 구조적으로
균형 있게 잘 잡혀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바람과 날씨만큼이나 변덕스러운 것이
선과 악의 공존이기 때문이다.
가만히 서 있는 神도
때 아닌 욕을 먹는 경우가 많고
성스러울만큼 인자한 성자들도 욕을 먹는 경우가 많듯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욕을 먹으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나마 잘 알려져 있지 않아서 그렇지
많이 알려져 있었더라면 더 많은 욕을 먹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렇고
우리들은 그 길목에서
갈등 아닌 갈등을 일으키며 살아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성자들의 말씀에
성현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자신의 갈 길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게 되기 때문이다.
과연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똑바로 걸으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손을 들고 나와 보아라!
분명 자신은 아니라고 발뺌을 하지만
뒤돌아보면 모순투성이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살고 싶어도
세상이 이를 방관하지 않고 흔들어대기에
알면서도 당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선과 악의 기준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선한 행동을 했는데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악한 행동을 했는데
천국에 올라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 무슨 조화인가?
선의 기준과 악의 기준에도
관점의 차이라는 것이 있다.
좋게 보면 선이요
나쁘게 보면 악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우리들은 공존하는 선악의 굴레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공존하는 선악이 나쁜 것이냐 하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인간적인 시스템이 그렇게 되어져 있고
우주적인 시스템이 그렇게 되어져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후세계와 신의 세계까지 그렇게 되어져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굳이 공존하는 선악 때문에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본래부터 구조적인 체계가 그렇게 되어있기에
나만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어떻게 사느냐? 도 중요하지만
무슨 원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가도
살펴보아야한다는 소리이다.
선을 실천함으로써 이룰 수 있는 일이라면
진작 이루어졌을 것이다.
성자들도 해내지 못한 일들을
그 누가 해낼 수 있겠는가?
그동안 성자들의 삶을 보아오지 않았는가?
수많은 성자들이 다녀갔지만
여전히 더 왕성한 악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를 먼저 궁구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우주를 관통하고 있는
구조적인 시스템에 중대한 문제가 있기에
이러한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해결의 실마리는
문제를 파헤치고자하는
현실세계에 있다는 점이다.
필자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겠지만
쉽고 편한 것은 그만한 대가가 주어질 뿐이고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정도를 걸어야만
정상에 도달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글 한편 쓸 때도
목숨을 걸만큼 혼신의 힘을 다해서 쓰는 경우가 있듯이
쉬운 것으로 그 모든 것을 대신할만한 것은 불행하게도 아직까진 없다.
글이라는 것은
자신의 잠재된 내적지식이 포함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말하는 영감이라는 것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글은 머리나 가슴으로만 쓰려고 하면 쓸 수가 없다.
영적능력과 영감이 다가와 안부를 묻지 않는다면
쉽사리 좋은 글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환상을 꿈꾸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사후세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현실에서 발생한 일은
현실에서 해결해야하기에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지금도 필자보다 더 빠르게 앞질러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희망이 있다는 점이다.
희망이 있을 때 잡는 것이 희망의 끈이 아닌가?
2019년 3월 3일 일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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