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생명에너지의 성질 - 묵산님

청아당 2018. 11. 29. 10:15

생명에너지의 성질 - 묵산님

 

묵산님

생명에너지는 성질은 크게 보면 전기성(電氣性), 자기성(磁氣性), 진공성(眞空性), 운명성(運命性)을 지니고 있다.

 

특히 자기성과 전기성은 신단이나 호흡수련을 통해 체감(기감)으로 확연히 느껴지는 부분이다.

 

전기성이 느껴질 때는 약한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찌릿하거나, 더 나아가서 강한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짜릿한 느낌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느낌상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 전기에 감전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기분 좋은 느낌으로 다가오므로 지례 겁을 먹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전기성이 강하게 출현 할 때는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놀랍기는 하다.

대주천 현상이 발생할 때 굉음과 함께 수련자를 전율하게 만드는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자기성은 가장 많이 느껴지는 느낌으로 크게 보면, 바람 같은 느낌, 그리고 액체 같은 것이 느껴지거나, 액체가 기화되고 기화된 것이 플라즈마로 형태로 변용되는 것도 포함된다고 본다.

작게는 수련을 하면서 기세수를 할 때 손바닥이 얼굴에 철썩 달라붙는 현상이 나타나거나, 크게는 생명에너지를 고 밀도로 축적하여 우주의 생명에너지와 자신의 생명에너지가 일치되어 자석이 같은 극끼리 서러 밀쳐내는 것처럼 작용하여 인체가 부양되는 인체부양 현상도 생명에너지의 자기성에 기인한다.

 

진공성(고요의 극점)은 호흡을 통해서 체득이 가능한 것이나, 명상이나 선() 수행을 통해서도 체험이 가능한 것으로 본다. 흔히 작은 정도의 깨달음인 소각(小覺)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운명성은 흔히 카르마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감각으로는 느낄 수가 없다. 운명성을 느낄 수 있을 때는 그동안 쌓아놓은 카르마가 결과로 나타날 때만 알 수 있다. 이것은 삶이라는 경험을 통해서만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호흡을 통해 전기성과 자기성, 그리고 깨달음의 상태인 진공성은 체험할 수는 있어도 운명성은 결코 알 수가 없다. 알 수 있다면 호흡을 하는 방법이라든지, 호흡을 하면서 배워가는 각종 이론 등을 알 수 있게 된 것에 한정된다.

 

때문에 일반적인 수련자에게는 명백한 한계가 존재한다.

사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산이나 절속으로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비유 하자면, 호흡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자전거를 못타는 사람은 결코 자전거를 탈 수 없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싶다면 타는 법을 직접 몸으로 익혀야 하듯, 경험하고 배우지 않은 것은 절대 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성자들의 가르침은 생명에너지의 운명성을 기르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진리는 실천을 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듯이 실천해보지 못한 진리는 결코 자신의 자산이 되어 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자전거를 배울 때 여러 번 뒤뚱거리고 넘어지고 해봐야 그 때 가서야 자전거를 자유롭게 탈 수 있게 되듯이, 진리도 한 번도 실천하지 못했던 사람은 자전거를 처음 타듯이 쩔쩔매고 어려울 뿐이라는 것이다. 진리는 그것을 실천할 때 마치 시행착오를 거쳐 자전거를 타게 되듯이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다.

 

필자는 단전호흡 수련을 시작했던 시절부터 항상 풀리지 않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성자들이 생명에너지의 존재를 모를 리가 없기 때문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성자들을 그릴 때 항상 보이는 그 빛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예수가 병자를 치료하고, 부처가 제자들에게 넣어주었다던 그 빛의 존재는 무엇이란 말인가?

 

결론은 "모를 리가 없다. 더 중요한 것이 있기 때문에 강조하지 않았을 뿐이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그것은 생명에너지의 운명성이 매우 중요한 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고차원의 생명에너지일 수록 자기성에서 전기성 순으로 발전하다가 진공성에 이름과 동시에 고요해진다. 마치 수선스러웠던 움직임이 고차원이 되어 갈수록 수련자가 느끼기 어렵게 되고 이윽고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 일순 모든 것이 블랙홀에 빠지듯 잠잠해 지는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그리고 성자가 아닌 다음에 더 이상 고차원의 것은 사람이 감지해 낼 수가 없다. 생명에너지가 그 모든 것의 정점으로 화하고 근원으로 돌아갔을 때가 바로 생명에너지의 운명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것의 배경이 되고 근본이 된다.

 

호흡법으로 하단전에 생명에너지를 축적시켜 둘 수는 있어도, 운명성은 그럴 수가 없다.

 

진리를 실천하고 그것이 경험이 되었을 때 비로소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그렇게 조금씩 정교해 지고 충만해지게끔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고차원의 생명에너지일 수록 자기성에서 전기성 순으로 발전하다가 진공성에 이름과 동시에 고요해진다. 마치 수선스러웠던 움직임이 고차원이 되어 갈수록 수련자가 느끼기 어렵게 되고 이윽고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 일순 모든 것이 블랙홀에 빠지듯 잠잠해 지는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그리고 성자가 아닌 다음에 더 이상 고차원의 것은 사람이 감지해 낼 수가 없다. 생명에너지가 그 모든 것의 정점으로 화하고 근원으로 돌아갔을 때가 바로 생명에너지의 운명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것의 배경이 되고 근본이 된다.

 

호흡법으로 하단전에 생명에너지를 축적시켜 둘 수는 있어도, 운명성은 그럴 수가 없다.

 

진리를 실천하고 그것이 경험이 되었을 때 비로소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그렇게 조금씩 정교해 지고 충만해지게끔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심도 있는 접근법에 대해 참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저를 대신하여 진리에 대해 설파해주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부족한 부분은 도반님들이 대신 해결해주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어차피 다함께 머리를 맞대가며 연구해나가야 할 부분이기에

아마도 평생 이렇게 서로에게 도움을 주거나 자극을 주며

상생하는 쪽으로 가야할 것 같습니다.

 

점점 고도화되어가거나

고차원화 되어져 가는 이론적 확립은

저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연구해나가야 할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는 근본적인 진리는 확고부동하지만

그 원리나 과정에 있어서만큼은 변동이 심하기에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가슴에 다가오는 온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도반님들의 일취월장하는 이론적 확립에 그저 놀랄 뿐입니다.

 

이는 순전히 도반님들의 피땀 어린 수행의 결과라고 봅니다.

 

이론도 중요하지만

실천을 바탕으로 형성된 이론은

함부로 흔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공성(고요의 극점)은 호흡을 통해서 체득이 가능한 것이나, 명상이나 선() 수행을 통해서도 체험이 가능한 것으로 본다. 흔히 작은 정도의 깨달음인 소각(小覺)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진공성인 고요의 극점

깨달음의 세계를 뛰어넘은 초월적인 현상을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명상이나 선을 통해서도 이룰 수는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고요의 극점은

기의 퇴적층과도 같은

보다 단단하고 깊은 세계에서 누릴 수 있는

초월적인 현상을 말하고 있음을 환기시켜주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운명성에 대해서는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는 일이라 딱히 말할 수는 없어도

어느 정도는 인간의 노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부분이 많다고 봅니다.

 

그것은 진리를 실천하는 일과 관련이 깊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평생의 화두를 단 한 번에 명쾌하게 정리하다 묵산님

http://blog.daum.net/yhedang/13626831

 

글을 남겨두었으나 이번에 다시 정독하다보니

글이 주는 심오함에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20181129일 목요일

 

청아당 엄 상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