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천년을 홀로 서있어도 가야할 세월은 가지 않고 있다
간다고 다 가는 세월은 아니지만
세월 속에서
역사를 끄집어내거나 삶의 지혜를 길어 올리다보면
금과옥조와도 같은 그런 삶과 죽음이
우리들 가슴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중요한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는 종교가 그 뒤에 서있다는 사실이다
활활 타오르는 종교의 힘
그것은 또 다른 종교를 낳고
그 종교는 또 다른 미신을 낳고
그 미신은 또 다른 종교를 낳고 있다
얼마나 달려가야만 진정한 종교의 세계에 도달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 끝과 시작엔
종교로 시작해서 종교로 끝나고
미신으로 시작해서 미신으로 끝난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겐
종교도 필요하고
미신도 필요하다
하지만
불교를 믿는 이는 기독교를 꺼리고
기독교를 믿는 이는 불교를 꺼린다
굴러다니는 거대한 바위가 세상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 기독교라면
태산처럼 웅지를 틀고 여유로움을 지키려하는 것은 불교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바쁠 때 바쁜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라면
바빠도 바쁘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는 것은 불교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알베르 까뮈 『시지프스의 신화』 에 등장하는 것처럼
불교를 상징하는 태산과
기독교를 상징하는 거대한 바위와 시지프스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어찌되었든 간에
태산과 바위와 시지프스의 관계는 혼연일체가 되어
한 몸으로 움직이고 있다
어쩌면 우리들 삶을 한 번에 조명해보려는 모습이자
서로 다른 개념을 하나로 묶어두려는
그런 의미에서 출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종교의 끝에는 늘 하나에 도달하는 명제가 있다
그것은
받은 데로 되돌려 주는 것이다
헌금이 그렇고
주승중 위임목사가 설교한
“탐심의 해독제 - 십일조” 가 그렇다
그리고
신을 위해 보답해주어야만
신의 노여움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를 믿는 성도와 신도들의 입장은
한결같은 섬김을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종교 간의 갈등이나 계파간의 이권 때문에
성직자들의 존엄성이 무너지기도 하지만
경제논리를 앞세운 치열한 영역다툼은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모두 다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를 믿는 이 중에는
불교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에 대해
미신으로 터부시하거나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그러한 방어자세로 들어가는 것은
시켜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우러나와 그렇다는 것이다
무엇이 그토록 타종교에 대해 금기시하고
해서는 안 될 일처럼 여기고 있는가
아무리 종교는 경건하고 숭고한 가치가 있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믿는 종교만이 최고라고 손을 들고 있는가
물론 자신이 믿는 종교에 대해 몰입도 100% 이상을 끌어올리려면
그 간절함과 절실함이 하늘을 감동시켜야하고
그 정성이 지극함에 이르러야하고
오직 하나를 위해 돌진해야하는 것은 알겠지만
어떤 때는 무조건적으로 타종교에 대해 회피하거나
기물을 훼손하는 행동까지 서슴지 않은 것을 보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행동을 유발시키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처럼 홀로 서있어도 외롭지 않고
유황불에 던져놓아도 타지 않는 그런 마음은 없는가
우주심을 갖고 평정심에 들 수 있는 것은
채워지면 비우고
비워지면 채우는
이분법적인 선상에 서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채운다고 다 행복한 것은 아니지만
비운다고 다 불행한 것은 아니지만
채움과 비움 속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우선 홀가분하다는 것이다
하루에도 수백 수천 명이 죽어나가거나 생명이 탄생하는
이 지구상에서
종교의 버팀목은 어떤 역할을 해내고 있는가
인간에게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는 종교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인가
구원해줄 종교가 아니더라도
인구폭발로 인해 소리 없는 거대한 전쟁을 예고하고 있는
이 지구상에서
살아남아야할 사람들은 또 누구인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다보면
땅을 짚고 태어난 우리들은
그 누구보다도
현명한 발걸음으로 움직이고 있다
신으로부터 간섭받으며 살아가고는 있지만
그 누구보다도
지혜로운 발걸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우리들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것은 아니기에
신과의 약속을 이행하며 살아가고는 있지만
주도권은 우리들 인간이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주종관계이자
협력관계이자
동반자적인 관계로 존재하지만
우리들의 행동반경에 대해
우주 최고 통치권자라해도 함부로 간섭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언제 어느 때 신과의 약속을 저버릴 줄 모르기에
우주 최고 통치권자라 할지라도
우리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을 바꾸어보면
우리들이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소원을 요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보다 더 배신적인 인간은 없다고 본다
도무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과도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이다
그리고
호흡이 멈추는 그날까지
우주 신을 겁박하거나 떼를 쓰며
자신의 욕구를 들어주기를 강요하고 있다
그런데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다
신의 입김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98% 이상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인간의 욕구를 완전하게 충족시켜주는 것은 아니기에
인간과 거래를 하기위해
2% 부족한 상태로 남겨두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98% 이상 소원을 다 들어준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도 모르게 소원이 이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한마디로 인간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신으로부터 혜택을 받아도
인간의 가슴은
근본적으로 허전함을 메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우주를 다 준다 해도 또 다른 새로움을 요구하고 있기에
신의 존재를
인간의 마음에 자리 잡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늘 하나가 부족하다
그것이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이 충족된다하여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마음속 한편에서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채워줘도 늘 갈증에 목말라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 우주에는 그것을 채워줄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이
충족에 대해서 만족을 느낄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하나가 부족하면
또 다른 하나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기에 그렇고
가끔씩
순차적으로 인간이 지닌 그릇의 크기에 따라 소원을 들어주다가도
하늘을 감동시키는 사람에 한해서는
비순차적으로 파격적인 혜택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는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사람에 한해 혜택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때는
가족의 생명을 담보로 요구하는 경우도 있고
친인척을 비롯하여
혜택을 받고자하는 사람에게
가장 귀중하고 없어서는 안 될 그런 희생을 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신의 혜택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에 상응한 희생을 포기하는 사람이 많다보니
신에게 의지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소원은 마치 신기루를 잡듯이
갈증을 풀기위해 달려드는 사람들에게
온전한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감질나게 소원을 들어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 얼마나 신의 생각이 깊은가
그러고 보면
인간의 신임을 계속해서 받아내겠다는 야무진 생각은
신이라고 예외는 없다는 점이다
뒤돌아보면
우주 신과 인간의 관계는
노예근성이 함축된 주종관계이기보다는
협력관계이자 동반자적인 관계이기에
서로 함께 공유하며 살아가야하는 상생관계로 이어져있음을 알 수 있다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강력한 힘은 없는 것 같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조차 초연해지거나
우주의 뿌리를 흔들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힘들의 결과에서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소풍 온 기분으로 말하는 이가 있는가하면
어떤 이는 호흡이 멈추기 전 극한의 고통이라 말하는 이가 있고
어떤 이는 바람과 함께 달려가며 길이란 길은 다 달려가는 이가 있고
어떤 이는 명상을 통해 우주의 세계를 내면에서 찾고자 달려가는 이가 있고
어떤 이는 지상낙원이라 말하는 이가 있는가하면
어떤 이는 지옥보다 더한 곳이 이승이라 말하는 이가 있고
어떤 이는 천국이 따로 없을 정도로 좋은 곳이
바로 이곳이라 말하는 이도 있다
삶이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도 있지만
죽을 힘을 다해 창조정신으로 살아가거나
해서는 안 될 짓까지 동원하며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우리들 삶에 대해 함부로 간섭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들의 선택권은
그만큼 폭넓고 우주적인 안목으로 형성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신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죽음을 향해 뛰어들거나
우주 신을 알리지 않는다면
그보다 더 큰 불행은 없기 때문이다
생각을 해보아라
과거부터
우주 신을 알리고자 천지창조 때부터 얼마나 부산스럽게 움직여 왔는가
만약에 우리들 인간이 존재하지 않거나
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는다면
지상낙원뿐 아니라 천국이나 지옥의 세계조차 알릴 수 없기에
우주 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일은
그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진행되어져야하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죽음이란
밝은 세상에서 어둠으로 추락하는
우주시스템의 일종으로 존재하고 있지만
삶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죽음의 세계이기에
보다 웅장하면서도 나선형 회오리바람에 빨려 들어가는
그런 경험을 체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얼마나 부러워해왔는가
눈을 뜨면 새로운 세상에 대해 경외감을 표시해왔고
눈을 감으면 미래에 대한 자긍심에 사로잡혀 이상향을 꿈꾸어오지 않았던가
어쩌면 영원히 존재할 것 같은 느낌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아니었던가
지금도 두 눈 빤히 뜨고 살아있는 자신을 들여다보며
영생보다 더 길 것 같은 생명체로 착각할 때가 한두 번이었던가
언젠가는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되돌아가야할 영혼들이지만
살아있는 만큼은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우주 속에 감춰져있는 비밀을 들춰내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삶 뒤에 숨겨진 빈틈을 찾아내고자
끊임없이 연구하고 있지만
동서양의 사고방식에 가로막혀
진정한 사후세계에 대한 우주지도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한편으론 안타까운 일이지만
양면성을 지닌 삶과 죽음에 대해 알고자할 때는
여전히 그 해답은 존재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줄 없는 생명줄과도 같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것과도 같고
어둠으로 추락하는
공포의 높이에서 다이빙하는 심정과 같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죽고자하여도 죽을 수 없는 것이 삶이고
살고자하여도 살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
그러나
이승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있는 사람들은
하늘의 도움으로
숱한 난관을 극복해나가며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이승에서 아무리 살고자 노력하여도
끝내는 죽음 앞에서 무릎을 꿇는 사람들도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사람을 돕는다는 말이 있듯이
오고감에 있어
옷깃에 스치는 인연으로 살다보면
그 또한 위안이 되고 삶의 활력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에 반해
살기위해 죽을 힘을 다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남 보기에 편안한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 내면에는
남모르는 고민으로
한바탕 쓸고 간 회오리바람처럼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인생을 멋있고 아름답게 살기위해선
경제적인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을 얻어야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반드시 그로인해 행복을 누리거나
지속적으로 기쁨을 누린다고 볼 수는 없다
행복은 이마에 스치는 바람 한 점에도 기뻐할 수가 있고
불행은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가는 바람에 슬픔에 젖어들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삶이란
여백의 미를 채워가며 현실과 추상화가 합성된 작품이라면
죽음이란
여백의 미를 아름답게 미화하거나
평안함과 공포의 대상이 하나로 연결된
빛과 어둠의 조화라 명명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삶 뒤엔 죽음이 도사리고 있지만
어떠한 형태로
자신에게 닥쳐올지 모르기에
삶과 죽음의 관계는
죽어서조차 손을 놓지 못하는 연결고리이자
손뼉 치는 관계로 이어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정점에 이르면
삶과 죽음은 하나로 회귀되겠지만
혼백이 흩어져 우주의 티끌로 존재하거나
어린나이에 홀로서기 한번 해보지 못한 채
죽음의 세계에 진입하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그것처럼 가슴 아픈 일은 없다
분명 예측된 죽음이나 삶은 아니지만
언제든지 우리들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가슴 아픈 일로 다가온다
하지만 현실은
부족하면 채워주려는 이가 있는가하면
넘치면 비워주려는 이가 있기에
삶은 결코 외롭지 않다는 사실이다
물론 개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떤 이는 우주보다 높은 기개를 나타내기도 하고
어떤 이는 하해와 같이 넓은 세상을 향해 기개를 펴기도 하고
어떤 이는 땅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향해 창조적인 건설을 꾀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으로 세상을 손안에 넣으려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가장 낮은 자세에서 가장 높은 경지를 경험하고자하기도 한다
그리고
더는 갈 수 없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달려가고 있는 바람처럼
우리들의 삶과 죽음은
하늘도 땅도 아닌 보이지 않는 우주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점이다
얼마나 기막힌 사실인가
달려가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들 내부에는
하나였다가 둘이였다가
결국은 하나로 합치되어져가는 일심동체로 이루어져있다는 사실이다
이 모두가 오직 하나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은
통합을 강조하기도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우주와 지구의 뿌리를 흔들기 위해 존재하고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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