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철야예배 - 아빠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낯선 것은 친근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친근하다는 것이다.
죽어서조차
귓가에 남는다는 것은
친근함이자
친밀함이자
친구처럼 편한 사이라는 점이다.
언제 우리에게 손을 잡아보게 한 적이 있었는가?
언제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본적이 있었는가?
살면서
바람이 부는 데로 느꼈을 뿐
구름이 흘러가는 데로 보았을 뿐
산이 멈춘 곳으로 올랐을 뿐
바다너머로 힘껏 달렸을 뿐이다.
힘들고 어려우면
찾아오라는 말 한마디에
위안을 받으며 살아왔을 뿐
하늘이 시키는 대로
땅이 움직이는 데로
마음 따라 걷고 있었을 뿐이다.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 모든 것을 던져놓고
그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살아라하면 살 수 있겠는가?
텅 빈 마음에
텅 빈 몸에
텅 빈 영혼까지
모든 것을 다 비워내고
오직 하나님으로
가득 채우라고 한다면 채울 수 있겠는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무슨 일이든지 그렇지만
그 핵심을 놓친 채 접근하면
실패할 확률이 그만큼 높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알기 이전에
인간의 본질에 대해 알고 있는가?
인간의 마음에 대한 본성이나 속성만 알아도
그것이 신이든 인간이든
대부분의 의혹은 밝혀낼 수 있기 때문이다.
비운다고 비워질 마음인가?
채운다고 채워질 마음인가?
그것이 누구인들
비우고 싶다고 비울 수 있는 일인가?
채우고 싶다고 채울 수 있는 일인가?
채우면서 비워지거나
비우면서 채워지는 일이 아니었던가?
그것이 누구인들
순간순간 채우거나
순간순간 비울 수는 있어도
영원히 채워놓거나
영원히 비워놓을 수는 없는 법!
바로 이것이 우주의 진리요
자연의 법칙이 아니던가?
그리고
깨달음을 얻은 도인이나 선승들이 비워야한다며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다 아는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비우면 비울수록
더 많은 것이 채워지고
더 많은 집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비움과 채움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놓치며
텅 빈 가슴과
텅 빈 마음과
텅 빈 정신으로 비움을 노래해봐야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듯이
집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 집착이고
비우겠다고 비움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 집착이다.
다시 말하면
생각하는 그 자체가 집착이자
집착하지 않겠다고 하는 그 생각이
바로 집착의 대명사이다.
분명 집착과 상향적인 욕구를 비웠는데도 불구하고
간소한 삶과 비논리적인 수행을 계속해서 진행해나가고 있지만
정녕 비워진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다.
이러한 현상은
비우는 순간
또 다른 채움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비우거나 채우거나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순간순간 비우거나
순간순간 채우는 일밖에 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더구나 우주의 안팎을 넘나드는
인간의 마음을 잡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불가능한 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인 불구덩이에 집어넣어도 타지 않고
토네이도보다 더 강한 태풍에 집어넣어도 다치지 않고
용오름 현상에 빨려 들어가도 살아서 나오는 것이 마음이듯이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이든 초자연적 능력이든
그 누구도 잠재울 수 없다는 것이
우주와 자연이 내린 최종적인 결론이다.
오죽하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수행을 해야 한다고 말했겠는가?
수행을 통해
잡았다싶으면 사라지고
사라졌다싶으면 다시 되돌아오는
천변만화의 변덕스러움과 그 갈피를 잡지 못할 정도로
높낮음이 다른 마음이기에
차라리 마음을 잡을 것이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그 본체를 잡는 것이 더 빠른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본질(本質)과
그 본성(本性)과
그 속성(屬性)을 이해하지 못한 채 접근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매년 연례행사처럼 계절을 바꿔가며
그 아름답던 꽃과 나뭇잎들을 버려가면서까지
여름을 채우기 위해
봄을 비우고
가을을 채우기 위해
여름을 비우고
겨울을 채우기 위해
가을을 비우고
봄을 채우기 위해
겨울을 비워왔지 않은가?
그것이 바로 우리들을
혼란 속으로 집어넣은 첫 번째 작업이 아니었던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꾸며놓거나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없는 것처럼 꾸며놓거나
어쩌면 우리들은
속지 않아도 될 일을 속고 살거나
속아도 될 일을 속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 그 자체가 사라지지 않듯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 또한 존재할 수도 있지만
존재 그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음을 알아야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물질과 비물질의 상관관계(相關關係)와
비움과 채움의 상관관계(相關關係)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담임목사를 비롯하여 부목사와 장로까지 합심하여 준비한 특송을
성도들에게 들려주는 날이다.
그것도 빈태국 목사께서 지휘하며 특송을 들려주었다.
성도들이 앵콜(앙코르)을 주문하자
담임목사께서 단상으로 오른 후 앵콜은 준비하지 못했다고 한다.
겨우 15분 동안 리허설한 후 특송을 한 것이라
더 이상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무리하게 키를 올리다보니 목이 좀 쉰 것 같다고 답변한다.
순교하신 주기철 목회자의 손자인 주승중 담임목사께서는
겸손이 무엇인지 교만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평소에도 겸손해지려고 노력하는 분이고
기도하는 중에 눈물까지 흘리는 경우도 많아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받고 있는 분 같다.
한없이 낮아지려고 노력하지만
겸손보다는 교만이 먼저 눈을 뜨는 바람에
늘 앞서나가는 것은 교만이지만
교만을 누르기위해 존재하는
겸손 앞에서는
교만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영원히 교만해질 수도 없고
영원히 겸손해질 수도 없다.
겸손함속에 교만이 있을 수도 있고
교만함속에 겸손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치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처럼…
다시 말하면
완벽하게 겸손하거나
완벽하게 교만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오늘은 교구별로 자리에 앉아
금요철야예배를 보는 날이다.
아버지 하나님! 보다
아빠 아버지 하나님! 이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은
벽을 허물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약 갈라디아서 4:6을 보면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기도는
하늘을 감동시키고
땅을 감동시키고
사람을 감동시켜야한다고 한다.
욕망이나 정욕으로 꽉 찬 마음에는
기도에 대한 응답이 없다고 한다.
응답 없는 기도는 무의미하기에
성도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지만
문제는 자신의 죄를 먼저 하나님께 회개하여야한다는 점이다.
살아있는 동안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성자이건
그것이 현자이건
그것이 철학자이건
그것이 과학자이건
그것이 일반인이건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동안은
그 어떠한 형태로든 죄를 짓게 되어있다는 점이다.
어떤 때는 죽음보다 더한 죄를 짓거나
어떤 때는 삶 그 자체 속에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큰 죄를 짓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집사나 권사 분께서 기도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달과 부모형제 및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기도를 행한다고 한다.
거기에다 믿음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람과 만나 결혼하기를 기도하거나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는 사람과 사귈 수 있도록 기도한다고 한다.
이는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되는 기도를 하고 있어
기도에 대한 응답이 없을 수도 있다고 한다.
더구나
신실한 성도로써 각종 예배와 각종 봉사에 헌신하며 노력하고 있지만
집으로 돌아온 순간
마치 두 얼굴의 사람처럼 180° 로 변하여 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공개적으론 천사의 얼굴로 살면서
사적으론 악마의 얼굴로 살게 되는 경우라 할 것이다.
담임목사께서 경고성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교회와 가정을 넘나들면서
교회에만 정성을 쏟을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해야 할 일도 충실하게 해야 한다고 한다.
가족이 있어야 교회도 있고
교회가 있어야 가족이 있듯이
가정과 교회에 모두 다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한다고 한다.
특히 결혼한 성도들은 부부관계에도 신경을 써야한다고 한다.
기도하기 전 항상 마음에 두어야하는 것은
먼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후
하나님이 원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 연후에야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소통될 수 있다고 한다.
기도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겉으로 믿는 신앙심과 나를 내세우는 기도는 하나님도 외면한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싫던 좋던
첫 번째도 하나님이요
두 번째도 하나님이요
세 번째도 하나님을 먼저 생각해야한다고 한다.
그래야만 기도에 대한 응답이 내려지고
기쁜 마음으로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을 수가 있다고 한다.
그건 그렇고
갑자기 중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급부상하자
주변 강대국들의 행보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남북관계가 급랭(急冷)한 것도
한반도에 위기가 닥치는 것도
그 이면에는
강대국들의 권력이 이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고민하며 기도를 하고
분단된 남북이 평화통일 할 수 있도록 기도를 하고
국가적인 사건과 대형 사고를 위해 기도를 하고
“세월호” 사건으로 희생당한 고인의 명복과 유족들을 위해 기도를 하고
기상이변으로 발생한 피해 때문에 기도를 하고
세계를 비롯하여 국내 경제회복을 위해 기도를 하고
인천에서 개최될 아시안게임(2014년 9월)이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도록 기도를 하고
병마와 싸우고 있는
각종 난치병과 희귀병 및 중환자들을 위해 기도를 하고
기도의 대상을 향해 또는 중보기도까지 따로 준비해가며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기도를 행하고 있다.
그리고
절실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불길한 사건들이 줄지어 발생하는 것은
국가에 커다란 위기가 닥치고 있음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두가 힘을 합쳐
대한민국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우려야할 것이다.
이것은 하늘의 뜻이기도 하지만
5000년의 역사를 지닌
대한민국의 미래에 돌이킬 수 없는 오점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힘들거나 어려울 때마다 뭉칠 수 있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저력이 있어 한편으론 안심이 되기도 한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IT산업과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는 대한민국이기에
그 누구도 대한민국의 앞날에 방해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대한민국의 밑바탕이요
국가를 먼저 생각하는
국민들의 영웅심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본질 :
사물을 그 자체이도록 하는 고유한 성질이자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보편적이고 변함없는 요소들의 총체.
본성 :
사람이 본래 가지고 태어난 성질 또는 사물이나 현상의 고유한 특성.
속성 :
사물의 특징이나 성질 또는 실체에 필연적으로 귀속되는 성질.
상관관계 :
둘 중 한쪽이 변화하면 다른 한쪽도 따라서 변화하는 관계.
2014년 7월 25일 금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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