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성령의 열매들(3)) - 종교전쟁
화평(和平)에 대해 주승증 담임목사께서
설교하신 내용에 대해 다시 한 번 살펴보고자 한다.
아래의 내용은 담임목사께서 말씀하신 것과
다를 수 있음을 유의해주기를 바란다.
인류의 역사가 그러하듯
종교의 역사가 그러하듯
인류의 평화를 지지하는 종교(宗敎)가
전쟁과 살인의 원흉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하고 있다.
종교가 지향하는 최고의 선은 화평(和平)과 평화(平和)이다.
다시 말하면
충돌이나 다툼 없이 평화로운 상태가 화평이라면
전쟁이나 갈등 없이 평온하고 화목한 것은 평화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평화란 사전적 의미의 평화라기보다는
마음과 관련된 내용이자
천년 묵은 체증이 한꺼번에 내려가는
우주적인 평온함을 말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우주에너지가 온몸을 감싸며
무한한 우주의 끝으로 나아가는 여정이기에
그 황홀함은 그 어디에도 비견될 수 없다는 점이다.
실제로 고도의 수행을 통해 우주와 한 몸이 되다보면
색아일체(色我一體)가 되거나
우아일체(宇我一體)가 되어
빛과 나와의 관계가 하나가 되거나
온 우주와 내가 하나 됨을 느낄 수가 있다.
물론 그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우주적인 느낌은
화평을 넘어서 평화로 이어지거나
우주 궁극의 세계로 몰입하게 되어
한없이 평화로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빛의 세계이자
우주적인 현상으로 발현되어지기도 한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높아지려는 자신과 낮아지고자 하는 자신이
충돌할 때 나타나는 것이 교만과 겸손이다.
높아지려는 것은 교만이요
낮아지려는 것은 겸손이다.
그렇지만
교만은 단 한시도 눈을 돌릴 수 없을 만큼 치밀한 관리가 필요하고
겸손은 자신을 누르고 또 누르며 한없이 낮아지려는 노력이
교만에 비해 2배 이상 신경을 써야한다.
그만큼 겸손하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그만큼 교만하기가 쉽다는 뜻이다.
그리고 너무 나서는 것은 교만의 징조이고
너무 움츠려 드는 것은 겸손의 징조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조금만 풀어놓아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을 높이려고 안간힘을 쓰거나
자신을 낮추는 일 또한 쉽게 해결할 수 없다보니
교만과 겸손에 대해 특별 관리에 들어가지 않으면
되돌릴 수 없는 커다란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그건 그렇고
인류의 역사이든
종교의 역사이든
전쟁과 살인 그리고 강대국이 되기 위한 노력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은
“평화를 위해 전쟁을 치른다.” 는 점이다.
말로는 평화를 외치며 종교전쟁까지도 불사해가며
그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는
이 현실이 참으로 가슴 아플 수밖에 없다.
가장 숭고하고 신성시 되어야할 종교가
가장 추악하고 세속화되어가는 종교로
타락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누가 종교를 폄훼(貶毁)하고 있는가?
누가 종교를 통해 전쟁으로 몰아가고 있는가?
서로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자신이 믿는 종교만 떠받치고 있다면
이것은 종교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놓은 종교밖에 더 되겠는가?
가야할 길은 먼데
발목을 잡고 있는 종교의 틀에서 언제까지 묶여있어야만 하는가?
서로를 유익하게하기 위해 탄생한 종교가
서로를 죽이기 위해 존재하는 종교로 거듭 태어나고 있다면
이야말로 참으로 개탄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누구를 위한 종교인가?
인간을 위한 종교인가?
종교를 위한 종교인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미래의 장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우리들의 발걸음에
종교라는 이름으로 숱한 핍박과 저주를 받아가며
죽음까지 감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차라리 무신론자가 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우주에 대해 전권을 누리며 완전체로
이 우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건들을
단 한 번에 해결할 것 같은 느낌을 심어주고 있지만
현실에선 그와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으니
이 노릇을 어찌해야 좋을지 그저 한탄만 쏟아지고 있다.
더구나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어느 목사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예수와 그리스도간의 싸움으로 비쳐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한국에서의 교회는 장감성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장로교와 감리교 그리고 성결교가
그 대표적인 예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예수교와 기독교(그리스도를 지칭)의 단체가 단합하여
서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이 더 큰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종교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각종 이단들이 출몰하여 마치 호객꾼처럼
서로 자신이 추앙하고 있는 종교만 믿기를 강요하며
길거리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어
도무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아빠 아버지 하나님!”
또는 “아버지 하나님!”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 으로 기독교의 위상을 세워놓았듯이
요즘 들어 주승중 담임목사께서 즐겨 쓰시는 “아빠 아버지 하나님!” 이다.
참으로 친근하면서도 아름다운 한편의 詩 같지 않은가?
믿어라!
누려라!
받쳐라!
의지하라!
그리고 영적 평화를 얻어라!
그리고 모든 것을 놓아라!
참으로 인간의 폐부를 찌르는 말로 중무장되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초기의 종교 수장들은
말 그대로 순수함으로 출발한 일이었지만
제자들을 비롯하여 후세의 추종자들과 신학자들의 손을 거친 후
학문적 이론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후 예수와 석가에 대해
마치 신처럼 옹호해가며 온힘을 쏟아 붓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예수나 석가 본래의 진리를 전파하는 데 온힘을 쏟는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다듬어진 각종 교리로
전도나 포교를 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대형교회를 관리 유지해나가기 위해선
경제논리가 뒷받침되어지는 경제력이 필수이지만
또 다른 측면에선
성도들의 눈높이에 맞춰 나가다보면
본의 아니게 대형화되어지거나
그로인해 각종 헌금을 요구하기도 한다.
생각을 해보아라!
돈 없이 성전을 신축하거나 증축할 수 있는지
그리고 해외선교를 비롯하여 각종 교육과 전도행사에
비용 없이 해결할 수 있는지를…
엄밀하게 따져보면
경제력이야말로 종교의 밑바탕에 깔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교회와 소외된 사람들에게
또는 사회봉사를 위해 성도들의 귀중한 헌금을 사용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크게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자신의 돈인 냥
사적으로 사용하는데 있어 주저하지 않고 있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다.
결코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처럼
전쟁과 살인을 금해야할 종교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종교를 위해 전쟁을 하고 있는 국가 간의 다툼은
무어라 설명할 길이 없을 정도이다.
누가 막는다고 막아질 일인가?
인류의 멸망이나 우주의 멸망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과업을 물려받듯 종교의 양면성은 계속해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언제 종교전쟁을 원한 적이 있었던가?
우리가 언제 피맺힌 전쟁과 살인을 요구한 적이 있었던가?
그저 종교를 통해
평화와 화평이 함께하기를 기도한 적밖에 더 있었는가?
순수하고 아름다운 종교를 원했던 것이 우리들의 착각인지도 모른다.
원래부터 종교라는 것이
전쟁과 평화로 공존하거나
교만과 겸손으로 공존하거나
높음과 낮음으로 공존하거나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며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모두가 반성해보아야 할 일이다.
결국은 우리들 때문에 발생한 일이고
우리들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점이다.
만약에 우리들이 없었다면
그 모든 것은
우리들의 기준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기준이 아닌 우주적인 잣대로 평가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종교 그 자체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들 또한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14년 7월 20일 일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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