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적인 삶과 현실적인 삶
이상적인 삶이란?
악을 멀리하고 선만을 위한 삶을 요구하거나
성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이론적인 삶이나
가상의 세계를 완벽하게 갖추어놓은 삶을 말한다.
하라는 말보다는
하지 말라는 말이 더 많은 요구조건이 따라붙는 삶을 말한다.
하늘이 정해준 길로만 다녀야하고
땅이 가르쳐준 길로만 다녀야하고
바다가 밀고 온 섬처럼 다녀야하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유유자적하며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참으로 여유 있고 멋과 낭만이 깃든 가장 이상적인 삶을 말하고 있다.
이보다 더 멋지고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삶이 있겠는가?
꿈속에서조차 행복이 넘쳐나는 세계이자
희망으로 가득한 세계이다.
하지만 이상적인 삶은 천국으로 통하는 길이요
생명의 책에 기록된 사람들만 갈 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엄격하게 통제당하는 삶이자
하늘의 뜻대로 사는 사람만이 선택받을 수 있는 삶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이상적인 삶은 현실적인 삶보다는
천국이 보장된 사후세계에 대해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에 반해 현실적인 삶이란?
공존하는 선악이 존재하는 삶이요
선으로 기울었다가
악으로 기울었다가
중용의 도로 중심을 잡아나가는 우주적인 삶을 말한다.
하늘이 정해주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나서는 삶이자
땅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나서는 삶이자
바다와 한 몸이 되기도 하고
바람과 대화를 나누거나
구름과 달리기를 하거나
앉아있는 삶보다는 뛰어다니는 삶으로 살아가야하는 것을 말한다.
이보다 더 용기 있는 삶이 있겠는가?
이보다 더 정교한 삶의 지침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뼈를 깎는 삶의 향연이자
무릎 연골이 닳아 없어지는 삶의 현장이다.
날이 갈수록 파괴되어가고 있는 자연
오존층이 파괴되어지고
오염된 환경과 기상이변으로 인해
각종 질병과 암을 야기하는 식량의 반란은
앞으로 유전자 변이와 함께 새로운 시스템으로 변신하며
우리들의 삶을 더욱 피폐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질병과 투쟁으로 하루를 연명하는 삶이자
치열한 전투 속에서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혼란과 갈등으로 가득찬 삶을 유발시키고 있기도 하다.
이 어찌 고난과 시련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이 어찌 행복과 슬픔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이 어찌 생로병사에 얽매어 병원 문이 닿도록 다니거나
영혼이 빠져나간 그 자리엔
호흡한번 제대로 쉬지 못한 채
허리가 굽어지고
척추 뼈가 무너지거나 녹아들 때까지
삶의 현장에서 삽과 곡괭이를 내리치며 살아가야하는 삶이다.
그리고
전쟁과 테러 속에서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숙청되어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고문당하다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기근으로 인해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밀항하다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폭력으로 인해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교통사고로 인해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비행기나 헬리콥터가 추락하여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등산하다 실족하거나 기상악화로 인해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태풍 속에서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건설현장에서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건물이 붕괴되어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화재로 인해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장마로 인해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고속국도에서 추돌과 충돌로 인해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저격당하거나 피살되어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병마와 싸우다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암과 투병하다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삶의 축인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주지 못해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하늘에서
바다에서
땅에서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삶의 과정인가?
이 얼마나 편안한 삶의 과정인가?
천국도 되었다가
지옥도 되었다가
하루에 수백 수천의 고통 속에서 이겨내며 살아가고 있는 삶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엔 실망과 배신이 난무하고
살기위해선 꿈속에서조차 달리고 있는 삶이자
역경을 딛고 일어서야만 하는 삶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누가 이렇게 살아라 했는가?
그 누가 자존심까지 내팽개치며 살아라 했는가?
죽기보다 더 싫은 삶이지 않은가?
살아있는 것 자체가 불행한 삶이지 않은가?
그래도
행복이 있고
꿈이 있고
희망이 있는 곳이기에
오늘도 꿈꾸면서 달리고 있다.
하지만 이상적인 삶이 천국으로 통하는 길이라면
현실적인 삶은
천국으로 갈 수도 있고
지옥으로 갈 수도 있고
선택의 폭이 넓은 대신
하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죽어서조차 눈을 감을 수 없는 삶인 것이다.
그렇지만 바로 그곳이 자신의 무덤이요
우주를 휘어잡을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현실적인 삶은 이상적인 삶보다는
현실세계에 더 강한 집착을 두며 사후세계보다는
지금 바로 이 순간을 더 즐기며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현실적인 삶은 공존하는 선악의 양면성을 동시에 누리는 삶이자
천국과 지옥의 문을 드나들며
예측할 수 없는 수정된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삶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현실적인 삶은 이상적인 삶인
사후세계보다는 현실세계에 더 큰 비중을 두며 살아가고 있는 삶을 말한다.
물론 또 다른 측면에선
현실적인 삶과 이상적인 삶을 염두에 두며 살아가는 사람 또한 생겨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우주의 중심점이자 끝점인 고요의 극점에서 생로병사를 초월한 후
존재 그 자체까지도 잊어버리는 원초적인 공간에서
더 이상 나아가고 물러서는 일 없이
태초 이전의 세계에서 숨조차 멈춘 채 살고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우리들의 꿈은 아름답다.
그러나 우리들의 꿈은 희망으로 끝나고 만다.
상상력이 풍부한 이상적인 삶 때문에 그렇고
상상력이 빈약한 현실적인 삶 때문에 그렇다.
모두가 꿈꾸는 이상적인 삶은
현실적인 삶에 묻혀버리기 때문이다.
꿈은 어디까지나 꿈이라는 사실이다.
꿈속에서 또 다른 꿈까지 꾸어가며 이상향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하늘이 허락하지 않는 한
인간세상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선만을 위한 삶을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것이 현실이요
악만을 위한 삶을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선과 악이 공존하면서 살아가야하는 우리네들의 삶은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니기에
이 둘을 조화롭게 배합해가며 살아가야할 의무가 있다.
그것을 중용의 도라 말하기도 하고
깨달음의 세계라 말하기도 한다.
이미 4대 성자들이 지구상에 다녀갔지만
여전히 우리들의 삶은
갈증과 충족시킬 수 없는 욕망에 허덕이며
하루하루를 버텨나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상적인 삶을 현실적인 삶에 접목시키지 못한 채
홀로 떠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홀가분한 상태에서 그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홀가분한 상태에서 그 무엇인들 두렵겠는가?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포기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크고도 큰 포부가 있어야 가능하고
참으로 크고도 큰 용기가 있어야 가능하고
참으로 크고도 큰 우주적인 눈과 중심이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보아라!
그 누가 이상적인 삶을 건설해 놓았는지를
꿈은 아름답지만 현실은 냉혹하기에
성자들조차 손발을 든 채 눈을 감아버리지 않았던가?
처음부터 이룰 수 없는 꿈을 붙잡고 앞으로 달려 나갈 것이 아니라
보다 현실적인 삶에 적응해 나가는 것이 더 빠른 길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모두가 보고 듣고 실천하며 달려온 시간들이 아니었던가?
모두가 눈을 감고 감각까지 떨쳐버리며 달려온 공간들이 아니었던가?
그러고 보면
시대를 달리하여 태어난 점도 있지만
정보를 공유하지 못한 채
동․서양의 교류를 한눈에 파악하지 못한 점 그리고
전 세계와 우주가 하나 될 수 있는
가족처럼 살아보지 못한 점은
매우 안타까운 일로 비쳐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와는 달리
실시간으로 넘쳐나고 있는 정보의 홍수를 공유해가며
깨달음의 세계를 뛰어넘으려는
용기 있는 학자들에 의해
낱낱이 파헤쳐지고 있는
학문적인 깨달음과 이론적인 깨달음 그리고
마음이 아닌 정신적인 깨달음의 세계 또한
소름이 돋을 만큼 정교한 학문으로 자리잡아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현대사회가 갖고 있는 학문의 깊이는
오히려 성자들의 시대를 뛰어넘거나
성자들의 영역을 여지없이 깨뜨리는 학자들 때문에
성자들의 성역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그동안 추종자들에 의해 비밀리에 숨겨져 왔던
성자들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정체들이
하나하나 파헤쳐지고 있다 보니
성자들의 위상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심각한 현상은
학자들에 의해 분석되어지다보니
그 정교함은 하늘을 찌르기에 충분하고
성자들보다 표현력에 있어 더 압도적인 힘이 엿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학자들이 성자들의 위상을 실제로 뛰어넘거나
위상을 무너뜨릴 만큼 실천력과 행동에 있어
또는 수행의 깊이에 있어 더 뛰어나다는 것은 아니다.
깨달음의 세계는 이론적으로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니요
깨달음의 세계는 학문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깨달음의 세계는 마음이 아닌 정신력으로 버텨낼 수 있는 것이 아니요
깨달음의 세계는 단 한 번에 그 모든 것을 무너뜨릴 수 있는
오묘하면서도 신묘한 능력이 있어
말 한마디에 수천만권의 책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리거나
허공에 대고 진리를 설파하는 학자들을 옥죌 수 있는
마지막 울타리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세계는 수행을 한다고 모두가 다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깨달음이야말로
천상천하유아독존으로 존재하거나
온 우주를 빛의 세계로 인도하거나
하나에서 전체로 나아간 후 또다시 전체에서 하나로 회귀하며
무한에서 유한으로
유한에서 무한으로
그 존재를 흩어지게 하거나
그 존재를 모으게 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분명 존재하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분명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흔들리고 있는 세계가 바로 깨달음의 세계이기도 하다.
이보다 더 분명한 세계가 있겠는가?
이보다 더 확고한 세계가 있겠는가?
눈을 감아도 들을 수 있는 것이 귀요
눈을 뜨고도 볼 수 없는 것이 눈이다.
귀와 눈이 만나 오감을 만들어낸다 하여도
들을 수 없는 것이 있고
볼 수 없는 것이 있듯이
바로 그 틈새에서 새어나오는 것이 깨달음의 세계이기에
잡는다고 다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놓는다고 다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만큼 깨달음의 세계는 신명나는 삶이자
극도의 슬픔으로 빠져드는 우주공간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아라!
무엇 때문에 깨달음의 세계를 얻으려하는가?
너와 나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세상에서
나와 너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세상에서
그 무엇이 불편해서 우리를 우리라고 말하고 있는가?
모두가 하나 되는 세상에서 살고자하는 것이 우리들의 세계이기에
꿈을 꿈이라 말하지 못하고 있고
현실을 현실이라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한번 바꾸면 그 모든 것이 혼돈으로 빠져들거나
너를 나라고 말하지 못하거나
나를 너라고 말하지 못하듯이
허공을 두드리거나
시간을 주무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성자들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여기서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란?
실제로 어리석다는 말은 아니다.
성자들처럼 이성적으로 차가운 사람도 없을 뿐더러
성자들처럼 감성적으로 뜨거운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주를 손아귀에 집어넣고도
지역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동․서양을 구분하고
전혀 다른 다국적 사후세계를 우주공간에 펼쳐놓았다는 데에 대해
그 허물을 묻는 것이지 실제로 어리석다는 뜻은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4대 성자들의 언행과 종교에 의해
제각기 난무하는 사후세계를 통합하지 못한 죄를 묻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권한이
필자에게 주어져있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로 통일되지 못한 채
분열된 종교에 대해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지
조금만 더 깊이 있게 묵상하다보면
이처럼 무책임한 일이나 불행한 일은 없다고 본다.
모두에게 존경받아야할 성자들이
오히려 앞장서서 지역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서로 다른 인종과
서로 다른 언어와
서로 다른 문화와
서로 다른 복장과
서로 다른 종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사후세계 또한
서로 다른 인종과
서로 다른 언어와
서로 다른 문화와
서로 다른 복장과
서로 다른 공간에 갇혀 살고 있다는 것과 그 무엇이 다르겠는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자
참으로 통탄을 금할 길 없는 모습인 것이다.
성자들이야말로 솔로몬의 지혜보다 더 탁월하고
실천력 또한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우주를 들었다놓았다할 정도의 영적능력을 보유하고 있기에
그 현명함은 하늘을 찌르기에 한 치의 부족함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 반목하거나 종교전쟁까지도 불사할 정도로
종교적인 우상숭배를 배척하지 못한 채
지탄받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특히 4대 성자 중 가장 막내인 예수께서
하나님의 전신을 위임받고 태어나
가장 풍부한 지식과 가장 풍족한 성령의 혜택 속에서
그 모든 종교를 하나로 통합하지 못한 채
여전히 우상화된 자신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에선 기도의 끝에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삼위일체인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몸이기에
기도의 끝에 예수를 내세운다하여 따로 변명할 필요성은 없지만
문제는 본의 아니게 예수 그 자체도 우상화의 대열에 끼어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되었든
예수님이 되었든
성령님이 되었든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내세워 우상화하고 있는 종교는 기독교가 유일한지도 모른다.
분명 우상화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을 우상화시키고 있는 일은
이것이야말로 조심해야할 일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이 얼마나 돌이킬 수 없는 행위인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적극적으로 하듯이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거나
멈추고 또 멈추어도 시작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미 시작과 끝은 우주의 품안에 안긴 것이다.
결국 현실적인 삶보다는 이상적인 삶을
갈파하고 있는 모양새로 비쳐지고 있다는 데에 있다.
이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가끔씩 싫다는 소리가 좋다는 소리처럼 들리는 경우는 있지만
이렇게 오래도록 삶의 현장에까지
깊숙하게 파고 들어와 있다는 것은
거의 현실적인 삶을 포기하겠다는 뜻과 크게 다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이곳에서 중용의 도를 설파하고 있지만
어느 누구하나 실현시켜본 적이 있는가?
아무리 4대 성자들이라고는 하지만 현실을 무시한 채
이론적인 삶을 강요하거나
이상적인 삶을 강요하거나
허공에 떠있는 삶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마치 대량으로 생산되는 규격화된 상품처럼
인간상품이 되기 싫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보다 근원적인 삶을 고민도 해보지 않고
생각나는 데로 또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의식주를 제공하도록 강요를 당하거나
사후세계를 들먹이며
겁박하거나 압력을 가하면서까지
지금껏 존재해 온 것은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적인 삶 때문이다.
살면 살수록 더 힘들어지는 현실적인 삶에도 문제가 있지만
삶의 시스템에 커다란 오류가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눈치 채지 못한 채
계속해서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악수(惡手)만 두고 있다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다.
그 누군들 이상적인 삶에 호기심을 갖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처럼
공허한 메시지만 가슴에 가득 채워놓고 떠나가지 않았던가?
꿈은 마음껏 꿀 수 있지만
현실을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그동안 숱한 선각자들이 다녀갔지만
그동안 숱한 도인들이 다녀갔지만
그동안 숱한 성현들이 다녀갔지만
그 누구하나 제대로 된 삶을 살다간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꿈과 이상은
현실세계에서보다는 사후세계에 가서
실현 여부를 판단해야할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다만 성자들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추종자들이 만들어낸 우주적인 걸작품이기에
성역화 된 성자들을 보살핀다는 이유와 은밀한 대화로
종교의 맥을 이어온
오늘날의 목회자나 신도들의 공로가 없었다면
애초부터 가공할만한 세계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세상의 이치가 다 그렇듯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종교이기에
신을 위한 종교보다는
인간을 위한 종교로 거듭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혜택을 받는 것 또한 인간이기에
이보다 더 훌륭한 작품이 있는지
천하를 다 뒤져보거나
우주를 다 뒤져보아도
이처럼 뛰어난 작품은 찾아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대부분 불혹의 나이에 이르면
인생에 대해 쓴맛과 단맛을 경험한 사람들이기에
처음부터 이상적인 삶이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자주 강조하는 것이지만
꿈은 꿈으로 그쳐야 아름다운 법이다.
아직도 전 세계에서 전쟁과 기근이 끊이지 않고 충돌하거나
처참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을 묵인한 채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이상적인 삶을 부러워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특히 선과 악이 충돌할 때마다 한쪽으로 기울면
본래대로 복원시키려는
공존하는 선악이 작용하고 있는 이상
불필요한 힘을 낭비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달린다고 모두가 달리는 것은 아니듯이
멈춘다고 모두가 멈추는 것은 아니듯이
선도 되었다가
악도 되었다가
중심을 잡아주고 있는 중용의 도만 잘 유지하고 있다면
스스로 안전장치가 가동되어져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현상은 발생하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쪽으로 기울어질 때마다
중심만 잘 잡아주면 그것처럼 안정된 모습도 없을 것이다.
특히 자신의 의견만 옳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옳지 않다고
강력하게 주장할수록 설득력이 없어진다는 사실을 주의해야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현실세계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로 끌고 나가려는 경향이 강하다면
그것 또한 조심해야할 일이라고 본다.
물론
현실세계이든
사후세계이든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보상이나 피해는
전적으로 자신이 져야하지만
이로 인해 한사람만의 주장에 설득당하거나 유혹당해서도 안될 것이다.
적어도 여러 사람들이 경험했던
사후세계에 대한 그림을 그려보아도 알 수 있는 부분이지만
저마다 다 다른 사후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잠재된 자신의 상상력과 현실적인 경험에서 나오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경험해보지 못했거나 기억에서 지워진 과거의 생과
앞으로 경험해야할 미래의 생 그리고
현재 경험하고 있는 현재의 생을 통해
보이지 않는 손길로 연결되어진
한줄기 빛이야말로
우리들이 꿈꾸어왔던 우주의 중심점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우주의 중심점은
“하나의 점”으로 통하기도 하고 고요의 극점으로 통하기도 하며
무한하게 확대되고 있는 우주의 끝점과
무한하게 축소되고 있는 우주의 시작점으로 연결되어지며
“무한하게 극대화” 되거나
“무한하게 극소화”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시작과 끝을 말하기도 하지만
시작과 끝을 넘어선 세계까지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이 우주의 시작과 끝점을 넘어선 권위 밖에서
여전히 무소유와 소요유(逍遙遊)를 즐기고 있듯이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어 초월성을 강조하고 있는 도의 세계가
성서에서조차 기록되어진 걸로 보아
동․서양을 하나로 아우르려는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하나로 통합하려는 노력은 시대를 불문하고
계속해서 이어져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시작과 끝을 초월하며 우주를 흔들고 있는 존재까지 내세우며
동양사상을 뛰어넘으려는 과도한 경쟁까지 부추기고 있음을 엿볼 수가 있다.
물론 태초 이전의 세계와 태초 이후의 세계가 존재하기도 하지만
색다른 질문이나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보다 더 깊은 세계를 다루어보겠다는 의지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실제로 기적의 에너지인 신의 에너지 또는 생명에너지의 근원 뒤에는
보이지 않는 손길이 우주를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수행을 통해 느낄 수가 있다.
그러고 보면
어디에 던져놓든
공존하는 선악과 중용의 도를 내세워
그곳이 어느 곳이든
우주적인 중심을 고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동적인 사건들을 만들어 내거나
정적인 사건들을 만들어가면서
한쪽으로 기울고 있는
또 다른 사건들에 간섭하며 중심을 잡아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원을 그려가며 심안을 통해 비쳐진다면
이는 우주의 가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
고요의 극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즉 니환궁(송과체)에 위치해있는 심안은
천안통으로 불리기도 하고
영적으로 가장 맑고 순수한 수정체이기에
바다보다 더 푸르고
하늘보다 더 푸른 영적매개체로써
과거, 현재, 미래를 하나로 모아 삼세(三世)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서양에선 서양의 정서적인 문화로
동양에선 동양의 정서적인 문화로 보여 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예수가 보았던 천국과 지옥
석가가 보았던 천국과 지옥이 이렇게도 확연하게 다를 수가 없지 않은가?
물론 요즘에는 동서양을 불문하고
혼합된 사후세계를 보여주고 있지만
아직도 과거의 종교에서 주장하고 있는 사후세계가 별도로 펼쳐져있다는 것은
혼합된 사후세계보다는
혼합되지 않은 순수한 사후세계를 더 선호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러한 일들은 수행이 깊어질수록 느끼는 일이기도 하지만
확실히 우주의 근원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통로가 연결되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우주와 연결된 그 통로로 백회를 타고 들어와
마음의 눈인 심안(心眼)과 교감을 주고받으며
방송국마다 채널이 다르듯이
동양인과 통하는 우주파 또는 우주 주파수가 따로 존재하거나
서양인과 통하는 우주파 또는 우주 주파수가 따로 존재하면서
빛의 세계로 몰입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실제로 천국과 지옥의 세계를 살펴보아도
알 수 있는 부분이지만
경험자마다 새로운 사후세계를 다녀오거나
사후세계에 대한 천도(天圖) 한 장 만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순차적인 우주의 질서에 익숙해져 있거나
무작위적인 우주의 무질서에 익숙해져 있음을
말해주고 있지는 않은지 의문을 제기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본다.
이러한 일들은 사후세계에 대한
인증을 받지 못한데서 발생한 일일수도 있지만
마치 혼돈속의 우주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직접 사후세계를 다녀왔다고 해서
그 확신을 믿을 수 없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경험자마다 다 다른 사후세계를 펼쳐내고 있어
어떤 것이 진품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주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초신성의 폭발이나 혜성
그리고 수백억 광년에 걸쳐 퍼져있는
우주적인 쇼는
우리들의 눈을
우리들의 귀를 의심케 할 정도로
정교하면서도 치밀하게 우주의 순리에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여전히 창조의 불씨가 타오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여기서도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평소에 자신이 생각했던 사후세계가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그대로 투영되어지거나
각본에 따라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누구하나 전 세계인을 하나로 통합시키지 못한 채
대립된 구도만 난립하고 있듯이
땅에선 지도(地圖)가 필요하다면
바다에선 해도(海圖)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배의 항해도가 필요하고
공중에선 비행기나 우주선의 항로가 필요하고
사후세계에선 천국과 지옥으로 통하는 천도(天圖)가 필요함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사후세계에 대한 천도(天圖) 역시 통합되지 못한 채
경험자마다 불확실한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사후세계를
그려내야 하는지 그 끝을 종결시킬 수가 없을 정도이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변명해야 되는지
또는 어떻게 해결해가야 하는지에 대해
그 단서조차 정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한사람의 의견보다는 상대방의 의견까지 들어봐야만
객관적인 입장에서 잘잘못을 분석할 수 있듯이
거기에다 목격자인 제3자의 의견까지 들어봐야만
잘잘못을 확실하게 따질 수 있듯이
실제로 한사람의 의견만 믿고 상대방을 판단하다보면
예기치 않게 치명적인 오류나 오해를 살 수 있기에
반드시 둘 이상의 증언을 들을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을 격하시키거나
천하에 못된 놈으로 몰아가기 쉽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오판을 내리기가 쉬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추측성 사후세계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 나올 때가지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신은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인간은 신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신의 능력보다
인간의 능력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기 쉽다는 사실이다.
신의 능력을 알기 전에
먼저 인간의 속성부터 분석해보는 것이
더 빠른 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은
마치 하늘의 뜻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론 인간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얼마나 경천동지할 일인가?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처럼
과거부터 수없이 천벌을 받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인간이
이 땅 위에 존재하고 있는 이상
어쩌면 신은 인간의 뜻을 꺾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인간의 능력이 뛰어나기도 하지만
신을 배반하는 속도가
빛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과관계가 정리되지 않은 채
우연과 필연이 교차하면서
인연을 만들어나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솔직히 우연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엄밀하게 따져보면
똑같은 상황극(狀況劇)이 벌어지고 있는
행동패턴을 분석해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우연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라면
필연은 하늘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깔끔하게 정리되는 인연이라는 말로 대체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연과 필연의 복잡한 구조를 극복하면서
인과관계가 확실한 인연으로 엮어나가게 되면 그것처럼 간단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연과 필연은 운명과 숙명으로 연결되어져
우주에서 순환하고 있는 윤회로 통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은 신이 인간을 지배할 것이라는
우월한 생각 때문에 발생하기도 하지만
인간은 신을 이기기위해서라도
각종 예기치 않은 행동들을 동원해가며
적극적으로 방어할 자세를 갖추어나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보아라!
우주의 안팎을 제집 드나들듯이 다니는 인간의 상상력은
우주 밖으로까지 뻗어있어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있는 신이 없을 정도이다.
얼마나 크고
얼마나 넓은지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은
한마디로 신조차도 인간을 상대할 때
함부로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거나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지경에까지
도달하고 있다는 것은
신의 영역을 벗어나 행동하고 있다는 뜻과 같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얼마나 더 달려야만 인간의 능력을 알 수 있는지
얼마나 더 깊이 들어가야만 인간의 속성을 파악할 수 있는지
신조차도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과 신 사이에
모순점이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정설로 굳어져가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신은 인간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론 모르고 있고
인간은 신을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론 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잘 알고 있다는 소리와 같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은
신보다는 인간의 능력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신으로써는 참으로 난감한 상황에 빠져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보아라!
인간처럼 영특한 동물들이 또 있는지를
이 우주 어디에 인간보다 더 뛰어난 지적능력을 보유하고 있는지를
아니 이 우주를 다 뒤져보아도
인간만큼 상상력이 풍부한 동물들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인간의 능력이 우주를 주관하고 있는
우주신 마저 장악하고 있다는 것은
인간의 영적능력 또한 탁월하다는 데에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물론 종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천인공노할 일이지만
우주신 마저 인간의 행동에 대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영악하기에
그 끝을 짐작하기가 어렵다는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보다 더 어렵고
이보다 더 난처한 상황이 또 있겠는가?
자고나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고 있는
이 우주적인 쇼에서 과연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겠는가?
오로지 침묵과 묵상으로 대처하거나
우주를 통째로 집어던져
산산조각이 난 그림을 그려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들은
우주를 사랑하고 있고
지구를 사랑하고 있고
자연을 사랑하고 있고
신을 사랑하고 있고
인간을 사랑하고 있기에
그 끝은 불행한 것 같지만
그 처음은 행복으로 시작되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2014년 1월 24일 금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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