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성령 충만한 삶 - 열세 번째(2)

청아당 2013. 12. 15. 22:06

성령 충만한 삶 - 열세 번째(2)

 

본 교재인 《일대일 제자양육 성경공부》에 기록된

“성령 충만한 삶” 일부를 발췌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성령 충만 이란 무슨 의미입니까?

‘충만’이란 말은 ‘지배를 받는다.’는 뜻이므로 성령 충만 이란? 성령님의 지배를 받고 그의 능력으로 채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오셨고(요 16:14) 그리스도의 영(롬 8:9)이므로, 성령 충만함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충만한 것이요,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것이고 그의 인격과 성품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종교적으로 신비한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감정이 메마른 극도의 이성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 충만의 외적인 표현은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그러나 공통된 것은 성령에게 붙잡힌바 되는 것입니다.

 

2. 누가 우리를 성령 충만하게 하십니까?

우리가 성령 충만을 간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성령 충만하게 하시는 분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충만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사와 사람의 역할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3. 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더라도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서 사는 한 죄짓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요일 1:8).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 같은 사람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고 탄식했습니다.

때때로 자연인에게 있는 양심적인 생각이나 윤리적인 행동으로도 갈등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있는 한 우리의 힘만으로는 영적으로 결국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이런 갈등을 이길 수 없습니다.

 

4. 어떻게 하면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는 순간 신자들은 성령을 받습니다(롬 8:16, 고전 12:3). 그 순간부터 신자들이 마음과 생활로 얼마나 성령님께 순복하느냐에 따라 신앙이 점차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인도 아래 살지만 다 성령 충만한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을 때는 우리가 성령을 받는 것이고, 성화 과정 즉 신앙이 성장하는 과정에서는 성령이 우리를 계속 주장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단 일회적인 경험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1) 성령 충만의 필요를 느끼고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성령 충만을 받게 됨을 명심해야 합니다. 진실한 기도는 믿음을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2) 죄를 회개하고 자신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만일 죄로 인해 우리가 삶의 주인이 된다면 그것은 불순종의 행동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요일 1:9). 고백이란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그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사함 받은 것을 믿으며, 그 죄에서 돌이켜 태도를 새롭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백해야할 죄를 찾아내기 위하여 자신을 바라보며 자기 연민에 빠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의를 목마르게 사모하고, 우리의 죄를 진정으로 모두 고백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약속에 따라 우리를 용서하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실 것입니다.

(3) 하나님께 자신의 생활을 전적으로 의탁해야 합니다.

믿음은 다른 말로 신뢰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신뢰하고 의지할 대상으로 삼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태도가 있는지는 상황이 좋을 때보다 상황이 나쁠 때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병으로 몸이 고통스럽거나, 파산하거나, 인격적으로 모욕을 당할 때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분만 신뢰한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5. 성령 충만을 받은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실 때 필요에 따라 각종 은사를 주십니다(롬 12:6-8, 고전 12:4-11).

우리는 감사하면서 그 은사들을 주의 영광과 교회의 덕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6. 언제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받을 준비만 되어 있으면 언제든지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려고 하십니다. 성령의 세례는 한 번이지만 그 이후 계속되는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남을 위한 삶을 살다보면 인격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성령 충만함은 복음을 전도하기 위한 첫 발걸음이자

믿음을 통해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일이라고 한다.

1. 성령 충만은 내안에서 잠재하고 있는 능력이 넘쳐나는 일이요

2. 성령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는 일이다.

그리고

1. 물세례가 있는가하면

2. 성령세례가 있다.

3. 물세례와 성령세례는 전체적인 입장에서는 같다고 한다.

물론 견해에 따라

물세례와 성령세례에 대한 그 의미를 구분하고 있지만

큰 안목으로 보면 같은 입장이라고 한다.

 

성령 충만함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태어난 예수일 것이다.

예수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 자신이자 우리들에게 옮겨온 믿음일 것이다.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 는 구절은

신의 에너지인 기를 불러들이는 행동이자

믿음이 존재하지 않고서는

기적이나 우주에너지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를 믿음으로 인해

각종 기적이나 치유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성령 충만함은

우주에서 보내온

신의 에너지인 기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목회자나 그밖에 신실한 신도들은

기를 성령 충만함과 함께 묶으려는 생각을

포기하고 있는 경우처럼

자신의 눈높이에서 바라보고 있는 안목을

위쪽으로 올리려 하기보다는

밑으로 내리려하고 있다.

우주를 감싸 안을 정도의 커다란 품으로

하나님의 기적이 어디에서 출발하고 있는지

또는 그 원리를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어야할

중요한 시기인데도 불구하고

성령 충만함에 만족하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어떤 통로를 거쳐

인간에게 전해지고 있는가를 주도면밀하게 살펴보아야한다는 의미이다.

분명 우주와 연결된 통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만나는 우주에너지인 기(氣)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신인합일(神人合一)이라 표현하기도하고

천인합일(天人合一)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를

서양에서는

하나님의 에너지라 표현해도 좋고

예수님의 에너지라 표현해도 좋고

성령님의 에너지라 표현해도 좋고

신의 에너지이자 우주에너지라 표현해도 좋다.

동양에서는

옥황상제의 에너지라 표현해도 좋고

염라대왕의 에너지라 표현해도 좋고

신선의 에너지라 표현해도 좋고

신의 에너지이자 우주에너지라 표현해도 좋다.

그리고 반드시 위의 표현으로만 한정시켜 볼 수 없듯이

또 다른 이름으로

기의 존재를 계속해서 부각시켜나갈 것이다.

여기서 서양의 하나님은 한분이기에

홀로 선과 악을 주관하고 있다면

동양의 하나님은 둘로 나뉘어져 있어

선은 옥황상제께서 주관하시고

악은 염라대왕께서 주관하고 있지만

편의상 둘로 나뉘었을 뿐이지

실은 하나로 연결되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서양에선 하나님 한분이 존재한다면

동양에선 옥황상제가

그 임무를 대신하고 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대비법은

동서양을 둘로 나뉘는 것을 방지하기위한 목적도 있지만

우주의 일부분인 조그마한 지구에서조차

둘로 나뉜다는 것은 말이 안 되기도 하지만

혼동을 없애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주어진 것일 뿐

별다른 의미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신을 위한 종교이기보다는

인간을 위한 종교이기에 가능한 것처럼

그 당시 동서양에서 정보교류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시대에 발생한 것도 있지만

좀 더 깊이 있게 접근해보면

결국 동양과 서양에서 생각하는

종교의 맥이나 명칭 그리고 지역성에 따라 분할되어지며

인간위주로 불리어지거나 정리되어져 왔다는 사실이다.

이 넓고 넓은 우주에서

더구나 우주를 제집 드나들듯이 드나드는

무소부재의 하나님께서

이런 실수를 하기는 만무하고

인간의 손에 의해 성경과 불경 그밖에 다른 경전에까지

인간의 삶의 구조에 맞게 정리되어져 왔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거나 또는 인간의 뜻이

경전 속에 깊숙하게 파고 들어왔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물론 성경의 내용 그 어느 것도

더하거나 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정리된 경전이다 보니

함부로 성경의 내용을 바꾸지 못할 뿐더러

성역조차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지경에까지 와있다.

분명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손에 의해 완성되어져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신을 위한 종교보다는

인간을 위한 종교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추측해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만큼 종교에 대한 정의나 속성에 대해 알기보다는

인간의 속성에 대해 먼저 공부해보는 것이

좀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지름길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도 문제이지만

서양에선 천국과 지옥에 대해

구체적인 표현이 많지 않고 뭉뚱그려

구원과 천국에 대해 추상적인 말로 끝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동양에선 천국과 지옥에 대해

구체적으로 세분화시켜놓고 있는 것을 보면

서양보다는 동양에서 하나님에 대한 존재에 대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재해석해보면

단순하게 표현된 성경 속의 하나님이

더 큰 매력으로 다가오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해마다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에 올려 진 성경책이기에

삶의 지침서로

진리의 지침서로 현존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불교에서 표현하고 있는 지옥만 해도 12가지로 분류되어져 있고

49재를 비롯하여

심판을 받기까지 걸리는 기간은 3년이란 세월이 필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분류도 신빙성이 없는 것은

사후세계에 대해 우주적인 지도가 마련되어져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인간보다 하나님이 지도나 항로에 대해

단 한마디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더 궁금할 수밖에 없다.

설령 지도를 그려놓는다고 해도

동양과 서양에 대해 표현하고 있는 사후세계에 대한 지도가

다 다르게 표현되어지고 있다 보니

같은 종교 안에서조차

천차만별의 사후세계가 제각기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도무지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지상에서는 지도가

해상과 하늘에서는 항로가 있지만

사후세계에선 종교마다 또는 개인마다

서로 다른 지도나 항로가 무분별하게 표현되어지고 있어

그 진실에 대해 의혹이 들 수밖에 없다.

이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이 얼마나 모순투성이의 사후세계인가?

지도는 도면에 그려진 대로

길을 따라 가다보면 목적지에 쉽게 도달할 수 있지만

항로는 분명 존재하지만 허공을 뚫고 달리기에

그 경로가 우리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물론 바다 또한 마찬가지이다.

 

종교에 대해 알면 알수록

실망감만 더 크게 부각되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교만이 하늘을 찌르듯 기독교는 타종교에 대해

무조건 우상숭배로 몰아붙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하나님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기독교라고는 하지만

그 교만은 쉽게 수그러들지를 않는다.

더구나 유대교와 천주교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종교에서 기독교만이 최고라고 주장하고 있다.

타종교에선 성부(聖父)인 하나님의 종교가 아닌 성자(聖子)

즉 예수의 종교라고 몰아붙여도

여전히 눈과 귀를 닫은 채 우월성을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다.

그리고 문제의 소지가 많은

역사적인 배경 또한 그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성경의 역사는 고작 6천 년으로 정리되어져 있고

우주의 역사는 100억 년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진정으로 성경의 역사와 인간이나 우주의 역사가

일치하고 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침묵과 꼬리달기 그리고 불통의 신화로 밀어붙이고 있다.

솔직히 일반적인 상식으로 추정해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지만

6천 년은 너무 성급한 결정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공존하는 선악? 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선과 악이 한쪽으로 쏠리지 않게

중심을 잡아주는

중용(中庸)의 도(道)이자

우주적인 중심축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삼위일체처럼 한 몸으로 움직이고 있는

우주에너지이기에

그 크기는 우주를 다 덮고도 모자랄 만큼 크고

그 깊이는 허공을 파고 난 다음

더 이상 팔 수 없는 공간이라 해도 좋을 만큼

상하좌우를 아우르며 우주 공간을 덮고 있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익숙하게 불리어지고 있는 기(氣)이지만

서양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나

성령의 능력으로 풀이되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처음부터 기의 존재에 대해 잘 알고 있지 못한 것 같다.

그렇지만 느낌만큼은 우주에너지인 기의 느낌이나

우주적인 반응까지 포기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신의 에너지인 우주에너지를

몸으로 또는 영적으로 느끼고는 있지만

딱히 이름 붙여 말하기가 곤란하여

(氣)라고 표현하는 대신 성령(聖靈)이라는 표현으로 지내온 것 같다.

요즘에는 동양보다 서양에서

신비한 기의 능력과 치유효과가 있는 기에 대해

더 세심하게 연구하거나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발전시켜나가고 있음을 볼 때

서양 또한 미래가 밝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성령과 기의 존재에 대해 비교분석해보면

성령은 기를 통해 발현되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다.

특히 기도시간에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린 후

신의 에너지인 우주에너지를 불러들이고 있는 것을 보면

성령의 기적과 기의 기적은

어쩌면 동일한 선상에서 표현되어지거나

능력이 발휘되어지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있는 관심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솔직히 성령의 힘 또한 우주를 들었다놓았다할 정도로

그 위력이 강하지만

기의 논리를 모른 채 행하고 있는 기도이기에

수행의 깊이를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각만 해도 기를 불러들이는

신단(神丹)의 수준에서 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에너지이자

신의 에너지인 기를 받아들인다고

무모하게 이단으로 몰아가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거부반응이 일어난다는 이유로

무조건 손사래를 칠일은 아니라고 본다.

그 이유야 어쨌든지 간에

종교인이나 신자들이

진보적인 성향을 띈다고 이단으로 몰아붙이거나

목회자조차 교단에서 퇴출당하는 경우는 없어야할 것이다.

물론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가 숨겨져 있겠지만

목회자까지 퇴출시키는 일은 무리수가 따른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정통성을 자랑하는 종교일수록

이단에 대해 더 가혹한 비판을 행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타종교보다 기독교에선 그 폐해가 심각하여

마녀사냥처럼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단이라고 해서 불이익만 주는 것은 아니기에

이단으로 출발한 기독교처럼

유익한 이단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할 것이다.

 

그리고 자주 느끼는 것이지만

개인적으로

기독교에서 가장 싫어하는 단어는 아래와 같은 말들이다.

물론 오해의 소지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기독교 그 자체를 업신여기거나

비하하려는 뜻은 아님을 분명하게 밝히는 바이다.

대체적으로 목회자가 설교할 때

습관적으로 행하는 좋지 못한 행동으로 비쳐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아래의 내용을

극도의 절제력으로 삼가하고 있는 목회자 또한 많음을 알고 있다.

더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봉독하거나 대행하는

신성한 목회의 일을 담당하고 있는 목회자에게

불만이나 불평을 가할 수는 없어도

스스로 자제할 줄 아는 그런 목회자가 교단에 서있다면

오히려 신도들에게 진정성을 제대로 전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리할 때마다

어떻게 하면 신자들의

입을 틀어막거나

손발을 묶으려는 행위는 자제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틈만 생기면 앞뒤 구분도 없이

사탄이나 마귀로 몰아붙이거나

신학에 대해 조금 밝은 것 가지고

마치 천하를 다 얻은 것처럼 또는 4대 성자들처럼

세상에 나돌고 있는 지식이란 지식은

모두 다 섭렵이나 한 것처럼

오히려 교만해지고 있는 목회자 또한 반성해야할 부분이라고 본다.

대체적으로 설교를 듣다보면 느끼는 일이지만

목회자 자신도 짧은 지식으로

오히려 지식인들을 성토하거나

우상숭배를 배격하게하거나

죽어라 헌신하며 봉사하는 신도들에게

봉사한다고 구원받을 수 없다는 말로

허탈하게 만들거나

교만을 들먹이며 적극적인 기죽이기에 나서며

위기에서 안전하게 탈출하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잊을만하면

세뇌시키려는 행동처럼 보여 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참으로 볼썽사나운 행동으로밖에는 안 보인다.

있는 그대로 있다고 하는데

그 무엇이 문제가 될 수 있겠는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세상사라고는 하지만

어차피 우리 인간 자체가 불완전한 생명체로 태어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툭하면 종교에서 최고의 권력을 지닌 하나님을 내세우고 있지만

그 분조차 불완전한 절대자이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화를 불러들이는 행동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직접 본 것도 아니면서

직접 느껴본 것도 아니면서

직접 잡아본 것도 아니면서

무슨 배짱으로 당당하게 우주신인 절대자를 내세우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마치 자신의 후원자라도 되는 것처럼

절대 권력자인 하나님을 배경으로 세워놓는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 그만큼 왜소하고 보잘 것 없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건 그렇고

깨달음을 말이나 지식으로 깨우치려는 위험한 발상은

차라리 그만두는 것이 좋다고 본다.

물론 지식이나 입으로 깨우치는 깨달음이 있을 수 있고

논리적인 또는 이론적으로 깨우치는 깨달음이 있을 수가 있다.

하지만 호흡이나 수행을 통한 깨달음이 아니라면

인생에서 깨우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보통 나이 40을 넘기면 세상 돌아가는 사정은 알 수 있기에

느낌이나 분위기 또는 행동으로 느낄 수 있는

작은 깨달음들이 줄지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깨달음은 말이나 지식으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온몸을 던져 죽을힘을 다해 깨닫는 것이기에

영적으로 더 성숙되어지거나 자정작용을 거친 후

보다 더 높은 곳을 향해 달려가는 내적울림이기에

빛의 폭풍에 갇히거나

우주대광명의 빛이 우주를 덮거나

내면에서 만나게 되는

그 모든 현상을 초월하여야만

비로소 깨달음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가끔씩 목회자를 보면

예수처럼 현란한 말이나 지적능력과 영적능력이 뛰어난

문학적 표현으로 깨달음의 세계에 진입하려는 의도가 있어 보이지만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일상의 지식이란 틀에서 깨우치는

가벼운 명상의 세계이지

궁극적인 깨달음의 세계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일상의 지식의 틀에서

퍼 올린 우물물과 같다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성경 안에는 분명하게 깨달음의 세계가 표현되어져있고

하나님의 존재나 영역에 대해 그리고

깨달음 이전의 세계까지 표현되어져 있는 것을 보면

비록 동서양의 사유방식은 다르지만 그 결과는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깨달음의 현상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은

빛과 어둠의 세계를 번갈아가며

칠흑 같은 깊은 어둠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환하게 비쳐주는

우주적인 빛의 폭풍이 가득차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 속에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투시가 나타날 수 있고

과거, 현재, 미래와 깨달음의 세계를 내다보는

천안통이 나타날 수가 있고

인체부양이나 유체이탈 등

상상을 초월한 다양한 현상들을 체험하거나

우주의 궁극적인 세계인 고요의 극점에 도달할 수 있는

안내자이자 길잡이인 심안(心眼)이 발달되어져야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주에서 가장 신성한 우주에너지를 불러들이는

심안이 발달되지 않고서는 우주적인 신비현상이나

우주적인 내적비밀을 알기에는 너무나 멀고도 험난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교만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면

남보다 더 많은 봉사를 했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보다 더 많은 헌금을 냈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보다 더 학벌이 좋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안수를 행한 후 치유시켰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식이 많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와 명예를 얻었다하여 자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목회자라고 어깨에 힘을 주어가며 자랑하는 목회자가 있는가 하면

겸손을 가장한 교만으로 자랑하는 사람이나 목회자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말하고 있는 목회자 또한

남을 비하하는 일이자 자신 또한 교만하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피력하고 있음을 알아야할 것이다.

그렇다고 목회자가 교만하거나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최대한 자신을 억누르며

교만에서 겸손해지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 내면에는 겸손을 잠재우지 못한 채

교만이 튀어나올 때가 많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오히려 겸손보다도 교만을 잠재우는 일이

더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주신이 인간을 위해 쳐놓은 시스템의 원리가 그렇다는 것이요

그만큼 오류에 빠져들 수 있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집착하지 말라고 하면서

한 평생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불교 또한

집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경우와 같다할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교만과 겸손 그리고 집착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반드시 교만하거나 집착한다고 다 나쁜 것은 아니다.

교만이나 집착이 없다면 자극이 없어지기에

모두 다 손 놓고 있을 수밖에 없지만

교만과 집착을 통해 과학을 이루어내고

경제논리를 바로 세우는 일등공신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비록 자연을 파괴하면서까지 동력성장을 이루고 있지만

만약에 대량생산된 인간 상품처럼

선하고 선한 성자들처럼 살아라하면

기하학적으로 넘쳐나는 인구를 감당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가난과 기근에 시달리며

죽어가는 사람들이 하늘과 땅을 덮을지도 모른다.

선하다고 다 선한 것이 아니요

선함 속에 악함이 있을 수 있고

악하다고 다 악한 것이 아니요

악함 속에 선함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는 선악의 극치를 달리는 일이자

중용의 도를 넘나들게 하는

우주의 중심축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는 다 부질없는 짓처럼 보이지만

꿈과 희망 그리고 자극체가 되는 매체를 통해

무한히 발전 성장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원죄보다 더 무서운 것이 살아있는 것이라면

교만과 집착으로 인해 공존하는 선악이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어느 쪽으로 기울던 공존하는 선악은 작동되어질 것이고

중심을 잡기 위해선

신의 영역인 우주적인 시스템까지 동원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눈을 뜨거나

눈을 감거나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침묵의 죄를 짓게 된다는 사실이다.

움직일 때나

서있을 때나

앉아있을 때나

누워있을 때나

바람처럼

구름처럼

영역을 이동해가면서까지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의식주를 해결하기위해 죄를 짓거나

부와 명예를 위해 죄를 짓거나

배움 때문에 죄를 짓거나

무지해서 죄를 짓거나

움직인다고 죄를 짓거나

서있는다고 죄를 짓거나

침묵한다고 죄를 짓거나

묵상한다고 죄를 짓거나

명상한다고 죄를 짓거나

앞으로 달리지 않는다고 죄를 짓거나

뒤돌아본다고 죄를 짓거나

살상한다고 죄를 짓거나

폭력이나 폭언을 한다고 죄를 짓거나

난폭운전이나 뺑소니를 한다고 죄를 짓거나

정의롭지 못하다고 죄를 짓거나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죄를 짓거나

부정부패를 뿌리 뽑지 못한다고 죄를 짓거나

홀로 가지 말아야할 길을 간다고 죄를 짓거나

오감을 폭넓게 사용하지 않는다고 죄를 짓거나

알고 있는 것을 알려주지 않는다고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죄의 범위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그밖에 죄목을 나열해보면

육법전서에 기록된 내용보다 더 많은 죄를

우리들은 날마다 지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무섭고 괴로운 일인가?

이 얼마나 처참하고 비통한 일인가?

가지 말아야할 길을 찾는 일이 어렵기에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등골이 송연해지거나 발걸음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하긴 하나님조차 죄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 인간이라고 예외가 있겠는가?

물론 죗값에 대해서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어떠한 형태로든 죗값을 치르게 되어있어

죗값에 대한 판단에 미리 겁부터 먹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참으로 신기한 삶이라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잠시 원죄는 논외로 치고

하나님이 지은 죄를 열거해보자.

1. 인간을 통제하지 않고 방치한 죄

2. 인간을 통제하지 않고 방관한 죄

3. 모든 인간을 구원 해주지 않고 편견에 사로잡힌 채 하나님을 믿는 자에 한해

그것도 순종과 믿음이 뛰어난 사람만 구원해주고 있는 죄

 

위에 열거된 3가지 죄만 하더라도 인간을 괴롭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인간이 지은 죄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하나님을 상대로

죄를 논한다는 그 자체가

용서받지 못하거나 불경한 행동이지만

조물주가 인간을 힘들게 만든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그렇지만 인간이 하나님께 하소연하는 것조차

용납이 되지 않는다면

아마도 숨 막혀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친구처럼 편안한 하나님이 필요하고

어머니처럼 따뜻한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다.

그저 높고도 높기 만한 하나님보다는

다가가기조차 어려운 하나님보다는

성역에 갇혀있는 하나님보다는

가장 낮은 자세에서 바라볼 수 있는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도 너그럽게 용서해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의 죄를 몇 가지만 열거해본 것이다

그건 그렇고

하나님이 지은 죄목을 살피다보면

오히려 인간보다 더 많은 죄를 짓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절대자의 권력이 큰 만큼 죄지음 또한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대 왕이나 황제 또한 죄를 지었으며

일국의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조차 죄를 짓고 있는 것을 보면

죄에 대해서는 성역이 따로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건 그렇고

교만과 집착을 중용의 위치에서

중심을 잡아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나

성령이나

(氣)나 다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하여 존재를 부정할 수 없듯이

보이지 않으면 느끼면 되는 일이요

잡을 수 없으면 잡으면 될 것이다.

그만큼 보이지 않는 것을 잡는다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행히도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거나

내면에 잠재되어진 촉각과 느낌 그리고 심안을 통해

내적울림과 공감된 빛을 볼 수 있도록 준비해 놓았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배려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이자 가족이자 분신물이지만

인간이 완전하지 못한 것처럼 하나님 또한 완전하지 못한 분이시다.

그러기에 영악한 인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보다는 인간의 뜻대로 살다보니

마치 부모님 속을 썩이는 자식처럼 하나님 속을 썩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하라고 말하면

저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고 말하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청개구리와 같은 행위를 하는 것이 인간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인간이다 보니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로 설득하고 올바르게 살라고 조언을 아끼지 않아도

도무지 말을 들어먹지를 않는다.

만약에 하나님 마음이 밴댕이 소갈딱지처럼 작았다면

아마도 뇌출혈이나 심장마비로 고통을 당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하해와 같고

우주보다 넓기에 인간을 다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가끔씩 떼를 쓰거나 앙탈을 부려도

하나님께서 모두 다 용서해주는 것을 보면

대인배보다 높고 소인배보다 크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크고 작은 일을 저질러도 하나님이 다 막아 주다보니

반성하거나 용서를 구하는 대신

인간의 마음이 더 담대해지거나 포악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장 큰 의문으로 자리 잡고 있는

각종 기적에 대해 또는 그 모든 것을

단순히 하나님께 돌리려는 생각으로 꽉 채워져 있는 눈높이를

보다 더 넓고 큰 우주로 확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그 영광을 돌리려 하지 말고

최소한 풀리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이

어디에서 출발하고 있는지

그 원인만큼은 알고 가야한다는 사실이다.

무조건 믿는 것을 맹신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저변에는 절대 신에 대한 순종이나 복종을 자랑삼아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에 대해

한없는 고마움과 가슴 든든한 수호령처럼 여기고 있지만

사실은 근본적인 궁금증이나

원리에 대해서는 포기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참으로 길고도 긴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로지 성경에 붙잡혀 성령 충만함을 간구하거나

간절하게 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이고

의문투성이의 기적이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궁극적인 해답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함을 알아야할 것이다.

그동안 얼마나 맹목적인 신앙생활을 해왔는지

돌이켜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목회자의 말이라고 해서 그 모든 것이 다 맞는 것은 아니듯이

또는 성경의 내용을 100% 다 믿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보니

결국에는

신에 대한 의문이나

종교에 대한 의문이나

성경에 대한 의문이나 그 근본은 다 같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하나님의 러브레터인 성경이나

그밖에 각종 경전들이 주장하고 있는 데로 행해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생각은 아직도 허기진 배고픔으로 가득 차 있고

영혼조차 갈증이 풀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성경에 쓰인 데로

하나님까지 나서서

우월한 유전자를 지닌 사람과 동물 그리고 식물을 가려낸 후

물과 불로 이 세상을 깨끗하게 쓸어버렸지만

여전히 과거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행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만큼 인간의 능력이 뛰어난 점도 있지만

하나님조차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체적으로 우리는 하나를 알고 있기보다는 전체를 알고 있고

전체를 통해 다시 하나로 회귀하려는 길을 찾고 있지만

그 의문은 영원히 풀리지 않은 채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 얼마나 무지한 태도인가?

이 얼마나 가슴을 칠 일인가?

분명 시야를 넓히거나

안목을 더 깊이 있게 쌓다보면 느낄 수 있는 일이지만

생각 자체를 반복적으로 또는 세뇌당하고 있는 이상

그 의문은 영원히 풀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종교에 대한 헌신이나 믿음이지만

일상에서조차 종교와 하나로 엮어 나가려는

목회자나 신자들의 태도에 분명 문제가 많음을 알아야할 것이다.

얼마나 더 속아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더 숨겨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근본을 파헤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일이 급선무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주 그 자체를 파악하는 일보다는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에 대해 또는

인간의 존재와 속성에 대해 아는 일이

그 무엇보다 중요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우주는 넓고

인간이 생각하는 영역 또한 더 크고 넓기에

우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환상적인 쇼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더 극렬하게 확대되어지며 과장되어지고 있어

우주 속에 숨겨져 있는

진실을 파헤치는 일이 더 중요함을 깨달아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데로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가공의 세계나 사후세계에 대해

그 추측이 난무하고 있는 상태에서

얼마나 더 확대해석하거나

인간의 상상력이 어디까지 뻗혀있는지를

그 중심부터 잡아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동안 수많은 그림들이 우주 속에 펼쳐져있었지만

날이 갈수록 고도의 지능이 개입함으로써

각 종교마다 자신의 상상력이 그려지기를 기대하며

기존의 종교에서 또 다른 신흥종교로 확대되어져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가?

이 얼마나 등골을 빼먹는 행위들인가?

그렇지 않아도 골치 아픈 종교의 각축장에서

또다시 신흥종교들이 등장하는 우주적인 쇼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상상력에 기름을 붓듯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종교는

과거에도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끊임없는 생성소멸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신흥종교는 생겨날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마음에 들지 않은 종교는

자연스럽게 도태되어지거나 사장되어지지만

인간이 필요로 할 때는 언제든지 신흥종교가 생겨나고 있다는 점이다.

얼마나 더 가야 그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처럼

우리에게 그림자처럼 다가선 종교가

유혹의 대명사인 미인계와 가공의 세계까지 동원되어지며

우리들의 혼이 우리들의 정신이 압류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신의 에너지이자

하나님의 에너지인

기에 대해 공부하지 않는 이상

우주의 힘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하나님에 대해

깊이 있게 접근하거나

깊이 있게 알지 않고서는

단 한 발짝도 다가설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과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는 어디서 왔으며,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내어놓을 줄 알아야하기 때문이다.

물론 기의 세계를 모른다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신의 에너지인 기를 파악함으로써

좀 더 가까이서

신과 대화를 나눌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단순하게 기를 신비한 영적능력으로 파악하거나

하나님의 또 다른 모습인

성령과 무관한 일이라고 결론을 내린다면

더 이상 기와 성령의 관계를 대비시키지 못한 채

사장되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주에 존재하는 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에

기의 작용은 우리가 알던 모르던 그에 굴하지 않고

늘 우리 주변을 배회하며

아침저녁으로 안부를 묻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기와 성령에 대해 연구하거나

호흡을 통해 수행을 행하다보면

그동안 간과해오던 기와 성령에 대해

무릎을 칠 정도로 크게 깨닫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수행이 깊어질수록 나타나는 현상들은

빛의 향연이자

우주적인 빛의 세계로

인체 내에서 화려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를 뛰어넘어

지층이 쌓이듯 기층 또한 점점 두꺼워지면서

기공호흡인 피부호흡을 동원하지 않는다면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기압이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상에서는 토네이도가

바다에서는 하늘과 맞닿는 용오름현상이 일어나고

하늘에서는 혜성과 초신성 그리고

100억 년 전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우주의 대폭발을 일으킨 팽창된 빅뱅을 거쳐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힘이

수행자에게

10억 볼트가 넘는 뇌성번개로 나타나거나

천지가 개벽하는 영통개안으로 전개되어진다는 사실이다.

이는 순전히 수행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자

우주적인 깨달음의 전초전이기에

대우주를 축소시켜놓은 소우주가

우리들의 인체 내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기의 세계를 안다는 것은

곧바로 깨달음과 연결되어지기에

그 깊이는 우주를 꿰뚫고도 남는 힘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깨달음만 얻으면

세상에서 못할 것이 없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지만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거나

자연의 순리에 적응하려는 노력이 더욱더 배가되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깨달음의 세계에서 바라보는 깊이는

수백 수천만권의 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우주대광명인 빛의 폭풍 속에서

그 모든 것을 초월한 채 신인합일의 세계에 도달한다는 사실이다.

너와 내가 하나요

우주와 지구가 하나요

전체에서 하나로

하나에서 전체로

끝도 시작도 없는 공간에서

호흡조차 잊어버린 채

고요의 극점에서 서로 손잡고 달려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깨달음이야말로 새로운 인생의 시작점이자

깨달음을 통해

교만과 겸손 그리고 집착을 배우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깨달음의 세계가 끝은 아니다.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시작에 불과하기에

살면서 수없이

또 다른 깨달음을 얻으며 살아가야한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호흡을 통한 깨달음이 대각이라면

일상에서 세월을 엎고 달린 후 깨닫는 것은 소각이라 말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인생에서 얻는 경륜과 호흡에서 얻는 깨달음을

하나로 묶어 그 둘을 하나로 만들어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가끔씩 일상에서 얻은 작은 깨달음과 호흡을 통한 큰 깨달음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건 그렇고

하나님의 피조물이자

하나님의 에너지이기에

그동안 우주의 성역에 갇혀 빠져 나오지 못했던

기의 세계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안다는 소리와 같고

예수님을 안다는 소리와 같고

성령님을 안다는 소리와 같다.

그만큼 기의 세계를 안다는 것은

신에 대해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하는

신의 에너지이자 우주에너지인 것이다.

(氣)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종교인이라면 반드시 알아야할 원천적인 것을 알지 못한 채

무조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믿거나

예수님의 능력이라고 믿거나

성령님의 능력이라고 믿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어리석음의 극치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성경의 말씀 속에

우주를 뒤덮는 광휘가 있고

시작도 끝도 없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한 채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무리한 출발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기의 세계는

잡는다고 잡아지는 것이 아니요

놓는다고 놓아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마음으로

호흡 속으로 몰입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과 함께할 수가 있고

곧 기(氣)

하나님의 또 다른 능력이요

성령의 또 다른 능력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종교를 알기 전에

호흡을 통한

하나님의 에너지이자

성령의 에너지인

우주에너지를 먼저 알아야할지도 모른다.

기를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이나 성령 그리고 예수를 안다는 것은

반쪽짜리 모습만 알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에 종교에 대해 온전하게 알고 싶다면

하나님의 피조물인 기의 세계를 먼저 아는 것이

우선 순서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만들어진 것이기에

이 우주 안에는 하나님의 손길과 숨결이 닿지 않은 곳이 없기에

하나님의 본모습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예의이자

목회자로써 옳은 일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보아라!

느껴라!

감격하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이 얼마나 황홀한 순간인가?

알아야할 것을 알고 가는 것과

알지 못한 채 달려가는 것과

그 무엇이 유익한가를

단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는 순간이지 않은가?

그리고 성령과 기에 대해 알고 싶다면

《청아당 블로그》에 올려진 “성령과 기”에 대해 읽어보거나

호흡을 통해 묵상을 해보면 금방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가야할 길은 많은데

우후죽순처럼 새로 생겨난 길이 많아지고 있는 현실에서

전부 다 밟아보기에는 시간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보니

꼭 밟아야할 길이 있다면

우선적으로 선택하여 걷는 것이 그나마 현명한 처사일 것이다.

모두 다 밟지 않고 걸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다 밟아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자신이 선택한 길을 걷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기쁨과 행복을 맛볼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성령과 기의 세계를 체험하고자하는 근본취지요

하나님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하는 첫 걸음이자 마지막 걸음이기도 하다.

안다는 것은 이래서 좋은 것이다.

모른다는 것은 이래서 슬픈 것이다.

하지만 오가는 길에서

실수를 하거나 미로를 헤맨다면

그것처럼 불안한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올바른 길을 걷도록 도와주는 손길이 있다면 그에게 맡겨라!

바로 당신의 가슴 속을 후련하게 해줄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나아갈 필요도 없고

더 이상 물러날 필요도 없는 곳

바로 그곳이

우리들이 안심하고 쉴 수 있는

안식처이자

쉼터이기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맡기면 될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이 누구요? 라고 묻는다면

하나님은 빛이자 어둠이요,

깨달음과 고요의 극점을 주관하고 있는 분이시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한다.

바로 그것이 성령이 충만한 세계이기 때문이요

예수가 이 땅에 다녀간 흔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기 위한 순서이자 끝점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오고감이 없는 공간이자

시공을 뛰어넘는

우리들의 잔치이자 우주적인 잔치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말이 필요 없는 세상이자

침묵으로 남는 그런 공간인 것이다.

어쩌면 침묵조차 필요하지 않은 진공상태인

우주 공간으로 남아있고자 하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2013년 12월 15일 일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