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을 이기는 삶 - 열세 번째(3)
본 교재인 《일대일 제자양육 성경공부》에 기록된
“시험을 이기는 삶” 일부를 발췌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인이 성령 충만한 삶을 살지라도, 이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 있는 한 완전히 죄가 없는 생활은 할 수 없습니다(고전 10:12). 그것은 마귀가 아직도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혹과 죄에 빠지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해 주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십시오.
모든 악의 근원은 사탄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사탄이 항상 개인적으로 우리를 공격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6․25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은 김일성이지만 그때의 모든 전투에 김일성이 개인적으로 참여한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사탄은 영적인 전투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지만 자기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우리를 공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탄은 세 가지 경로로 우리에게 접근합니다.
첫째, 사탄은 직접 우리를 공격합니다.
둘째, 사탄은 세상을 통해 우리를 공격합니다.
셋째, 사탄은 우리의 육신의 욕심을 이용해서 공격합니다.
시험을 받을 때, 그것이 어떤 종류인지 알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경우에 따라 각각 다르게 다루어야 합니다.
살아야한다는 생각이 강할수록
육신은 더욱 피폐해지고 건강은 날로 악화되어진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로병사 때문에 생겨난 우리들의 적인가?
희로애락 때문에 생겨난 우리들의 적인가?
달려야할 시간에 달리지 않거나
멈춰야할 시간에 멈추지 않거나
그렇지 않다면
시험에 들어 극복하지 못한 삶의 시련인가?
시험에 들어 극복한 삶의 향연인가?
가야할 길에 서있다는 것은
우리들의 발걸음이요
우리들의 숨소리이요
우리들이 함께 손뼉 치는 일이기에
정상에 오른 후 소리치는 메아리와도 같다.
가슴을 쥐어짜는 통증이 온몸을 공격할 때
심근경색이 생겨나고
뇌졸중이 생겨나고
고지혈증으로 인한 고혈압이 생겨나고
자궁근종이 생겨나고
당뇨병이 생겨나고
백내장이 생겨나고
녹내장이 생겨나고
갑상선암이 생겨나고
위암이 생겨나고
대장암이 생겨나고
간암이 생겨나고
유방암이 생겨나고
자궁경부암이 생겨나고
폐암이 생겨나고
췌장암이 생겨나고
흑색종인 피부암이 생겨나고
암이란 암은 다 생겨나고 있다.
그리고 척추와 관절질환은 40대 이상이 장악하고 있다.
스트레스로 인한 긴장성 통증으로 시작된
병의 근원은
우리들의 약한 세포를 공격하며
강한데서 약한 데로 흐르는 우주에너지인 기(氣)처럼
12정경과 기경 팔맥을 휘젓고 다닌다.
더 이상 가면 안 되는 금지선이 있지만
더 이상 넘어서면 안 되는 경계선이 있지만
선은 앞뒤로 넘어서며 존재하고 있다.
마치 죽음을 앞둔 사람들처럼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를 받아야할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다.
그것도 환자와 보호자사이를 갈라놓는 격리된 병동에서
홀로 싸워야할 기나긴 사투 속에서
숨 한번 크게 내쉬지 못한 채 극심한 통증과 싸우고 있다.
갑상선암은 쉽게 피로해지거나 합병증으로 인해
백내장과 녹내장까지 이어지고
간암은 복수로 이어지거나 폐암으로 전이되고
주로 면역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임파선은
혈액 이외의 체액이 이동하는 통로인 임파선염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인과응보란 무엇인가?
자신의 삶을 뒤돌아본 후
하늘의 뜻에 맡겨버린 운명적인 만남으로 연결되어지기에
그 끝은 언제나 처음 출발한 선에서 시작되고 있다.
더 이상 달리고 싶지 않다고 하는데도
더 이상 멈추고 싶지 않다고 하는데도
살아있는 이상 시험에 들게 되어있다고
살아있는 이상 죽음을 맛볼 수도 있다고
들리지 않는 귀에 대고 그렇게 말하는데도
들리지 않는다고 큰소리만 치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갈 수도 없고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날 수도 없는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시험을 이기는 삶인지 궁금할 뿐이다.
우리에게 언제 삶의 지침서를 내려준 적이 있었던가?
우리에게 언제 진리의 지침서를 내려준 적이 있었던가?
수없이 눈감고 달려왔고
수없이 눈뜨며 달려갔던
바로 그곳에서 운명의 갈림길이 선을 긋고 있다.
삶의 지침서나 진리의 지침서를 채 읽어보기도 전에
삶은 진행되어져가고
죽음 또한 삶을 앞당겨가면서까지 문을 두드리고 있다.
이 얼마나 황당하고 경악스러운 일인가?
좋은 말은 세상에 넘쳐나고 있지만
나쁜 말도 세상에 넘쳐나고 있지만
우리들을 유혹하는 말은 단지 몇 마디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바람과도 같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구름과도 같고
해와 달을 등에 지며
우주를 향해 달려갔던 그 세월만 기억이 날 뿐이다.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그런 곳에서
죽음보다 더한 슬픔으로
달려가고 있는 생명선이 방향을 잃고 쓰러진다.
아직도 살아야할 이유가 많지만
끝내 죽음을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원인이 있으면 결과도 있는 법
살아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충분하게 그의 죗값을 물을 수 있기에
반항한번 못해본 채 족쇄에 묶여 있다.
차라리 그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달리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용납이 안 된다.
움직여야할 몸이 움직여지지가 않는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왔는데도
더 이상 발걸음이 움직여지지가 않는다.
그래 바로 그것이다.
죽음은 소리 한번 질러보지 못한 채
그렇게 가는 것이고
삶은 소리라도 실컷 질러보고
그렇게 가는 것이듯이
우리들에게 시험에 대해
더 이상 물어보지 않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시험에 들지 않게 해준다던 하늘조차도
손 놓고 멍하니 넋을 잃고 있는데
그 누가 우리들을 구해줄 수가 있겠는가?
차라리 우리들이 우리들을 구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하늘을 향해 애원하는 것보다 더 나을지도 모른다.
시험은 있으라고 존재하는 것이고
시련은 견뎌내라고 존재하는 것이듯이
언제 우리들에게 시험을 건네 본 적이 있는가?
언제 우리들에게 시련을 건네 본 적이 있는가?
아서라!
그 누가 우리들을 도와주겠는가?
그 누가 우리들을 보호해주겠는가?
살다가 지치면 그대로 쓰러지면 그만이고
살다가 힘들면 그대로 누우면 그만인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들을 부르지 말라!
이제는 더 이상 우리들을 건들지 말라!
허공을 뚫고 달려온 우주에너지가 있는 한
우리들의 적은 우리가 지킬 것이기 때문이다.
삶도
죽음도
우리가 지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종교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지금도 십자가 위에서 손을 흔들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고 소문을 내고 있다.
2013년 12월 15일 일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오늘 올린 詩』 > 『오늘 올린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역하는 삶 - 열세 번째(5) (0) | 2013.12.15 |
---|---|
순종하는 삶 - 열세 번째(4) (0) | 2013.12.15 |
성령 충만한 삶 - 열세 번째(2) (0) | 2013.12.15 |
전도 - 열세 번째(1) (0) | 2013.12.15 |
교제 - 열두 번째(3) (0) | 2013.1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