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속에 가려진 진실 - 대형교회의 폐단
강요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삶에서 숙성된 후 나타나는 기도라야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한시도 쉬지 않고
기도한다고해서 하늘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하늘을 그리워하면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번을 기도하더라도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기도라야 참된 기도입니다.
기도 속에는
자신을 죽여 가며
남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배려가 있어야하고
그 배려 속에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살아 움직여야
살아있는 기도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지 말아야할 길을 가거나
바람도 막아낼 수 없는 거대한 벽을 만나거나
머리를 들 수 없을 정도의 겸손함이 묻어 나와야
진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1948년 주안에 뿌리를 내리기위해 창립한 주안장로교회
64년을 견뎌온 교회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1941년 6월 8일 충남 부여 출생으로 1978년 10월 15일 주안장로교회에 부임하여
교인 200여명의 교회를 맡아 33년간 시무하면서 재적교인 10만 명의 교회로
민족복음화와 세계 선교에 헌신해온 주안장로교회 나겸일 목사의 원로목사 및 공로목사
추대예식이 2012년 1월 29일 오후 3시
인천광역시 부평구 산곡동 주안장로교회 부평성전(2002년 입당) 대예배실에서 열렸다.
주안대학원대학교 이사장으로만 활동하고
교회운영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주안장로교회가 속한 예장통합총회의 헌법에 따르면
부목사가 곧바로 담임목사 청빙을 받을 수 없도록 돼 있으며
맡더라도 사임한 뒤 2년이 지나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33년 동안 쌓아온 역사이기에
쉽게 손에서 놓기가 아쉬웠을 것입니다.
70세를 기준으로 정년퇴직하는 담임목사가
후임목사를 지정해야할 일을
준비하지 않았거나
임기연장이라는 비난 속에서
독립교회로 나아가고자했던
욕심이 불러온 화속에서
깊이 반성한 후 뒤늦게 후임을 모셔오기 위해
공개적으로 매스컴을 동원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결국 교회 내 수석 부목사를 담임목사로 내정했지만
당장 그 책무를 다할 수 없는 상태로 남아있기에
담임목사 없이 2년이라는 공백을 부목사들이 돌아가며
채워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어느 누가보아도 잘못된 일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로인해 발생된 원로목사에 대한 불이익이
발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원래는 2011년 12월 31일 송구예배를 드리고
2012년 1월 1일 영신예배를 드린 후
10만 성도들의 축복을 받으며 명예롭게 물러나야했지만
마치 범인을 다루듯
거칠고 모질게 다루는 바람에 쫓겨나듯 물러나야했습니다.
쉽게 말해 당장 교회에서 손을 떼고 교회운영권에 대해
근처에도 접근하지 말라는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자신이 몸담았던 교회에서 예배도 드리지 못한 채
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불미스러운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인과응보는 참으로 무섭습니다.
결과가 아름답지 못하면
처음도 아름답지 못하는가 봅니다.
한곳만을 향해 얼마나 달려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10만 성도들의 움직임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가가
주목의 대상입니다.
지금 원로목사 구하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특기할만한 사실은 새벽기도운동을 전개하면서 총동원전도를 통해
교회부흥의 신화를 이룬 인물로써 수많은 전도 왕들을 배출하였고
무엇보다 진솔한 설교로 명성을 떨친 분으로 인식되어지고 있습니다.
결과보다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성도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모두들 눈을 감고 있다고 해서
그 느낌마저 놓지는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인식이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은
후임자의 몫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로목사와 후임자로 지목된 담임목사와의 관계가
원만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원로목사는 차량과 아파트 그리고 원로목사가 받았던
급여의 70%가 아닌
후임자 기준으로 책정된 급여에서 70%만 배정된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고마운 일이지만
10만 성도를 전도하기까지에는
새벽기도를 벌이다 막중한 업무로 인한 과로로
말기 간암이라는 병을 얻어 사형선고를 받고
죽음에서 되살아나왔고
주안 부평성전을 건립할 때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올렸던
딸 은영 씨의 생명을 소천 시킬 만큼
목숨을 내놓거나 피나는 노력이 뒤따랐습니다.
그로인해 받아야할 예우가 형편없을 정도로 낮게 책정되어졌기에
뜻있는 부목사와 장로, 권사, 집사들이 전면으로 나서서
팔을 걷어붙이고 성도가 알아야할 권리와 의무를 알려가며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사실 성도 한명을 전도하기위해선
적게는 수개월에서 많게는 10년 이상을 인내하며 접근해야하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합니다.
결과야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종교의 가장 추악한 면이자 대들보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헌금으로 쌓인 재정일 것입니다.
어떤 이는 집을 팔아서 헌금을 내었을 것이고
어떤 이는 차를 팔아서 헌금을 내었을 것이고
어떤 이는 저금통을 털어서 헌금을 내었을 것이고
어떤 이는 십일조를 빠짐없이 내었을 것입니다.
그것도 아니면 십시일반十匙一飯이라고 해서
1,000원에서 시작하여 수십 수백만 원을 내가며
교회가 성장할 수 있도록 각종 헌금을 내었을 것입니다.
깊이 알려고 하거나
깊이 관여하려고하면 다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 그 말을 들어야할 사람은 원로목사이고
1년이라는 기간 동안 해외선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압력을 넣거나
새로 신설된 주안대학원대학교(2010년 6월 26일 오후 4시 준공감사예배) 이사장으로
한 귀퉁이에 마련된 사무실에서 지내라고 생색내기도 합니다.
종교가 사람보다 더 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종교가 있기 전에 사람이 먼저 있었습니다.
종교를 위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사람들을 위한 종교라야 진정한 종교로 통할 것입니다.
사람이 없는 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단지 이름 없는 풀이거나 사람이 살 수 없는 무인도로 통할 것입니다.
서로의 잘못은 원인을 제공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중심을 잡아주는 중용의 도가 필요할 때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감싸주고
그에 대한 충분한 예우를 해주는 일은
서로에게 좋은 일일 것입니다.
더구나 흔들리고 있는 바람 앞에 서있는 나무일수록
그 위험은 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무너진다는 것은
위험을 경고 받고도 딴 짓을 청하거나
끝까지 가보겠다는 우려의 행동으로 나타난다면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는 위험한 길로 접어들 것입니다.
모두가 합심하여 한곳을 향해 정진할 수 있도록
서로의 가슴에 따뜻한 정을 불어넣어주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객관적인 투명함으로
교회를 이끌어나간다면
모두가 웃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질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였고
나중에도 하나이기에
우리가 가야할 길은 한 곳이라 생각이 듭니다.
서로가 한 발짝씩만 물러선다면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축복의 장에서
서로의 어깨를 잡고 환하게 웃을 수 있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스러운 자리가 될 것입니다.
한번 웃을 때
두 번 웃을 수 있는
그런 자리로 다시 거듭 태어나기를 빌어보면서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고
성도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하나만으로도
우리들은 안심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쪽으로 기울면
다른 한쪽은 올라가게 되어져 있습니다.
한마디로 불균형이 생겨납니다.
하지만 모두가 한쪽으로만 달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흩어지면 모으려는 힘이 작용하고
하늘의 뜻이 함께 작동되어지고 있는 이상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반성하는 사람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그 누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하늘을 향해
균형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가장 낮은 자세로 기도를 올릴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2012년 2월 12일 일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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