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바람
2012년 2월 20일 월요일 오후 4시
새봄이 오기도 전에 하늘을 향해 달려가고 말았다.
죽음의 문턱에선
오고감을 탓하지 않지만
자신의 텃밭에 묻어달라는 유언대신
장지는 2월 22일 수요일
6·25 참전군인 자격으로
국립임실호국원에 안장하기로 했다.
사위들과 딸만 아홉을 뒤로한 채
수없이 병원을 드나들며 생명을 이어왔지만
폐가 녹아 없어져 버리는 호흡기질환으로
고흥종합병원 중환실에서 19일 동안 집중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수긍할 수 없는 지연 연락으로 인해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도 없이
중환자실에서 싸늘한 몸으로 굳어가며
홀로 하늘을 향해 달려가고 말았다.
가족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체온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싸늘하게 식어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평소 면회시간 때마다
침상에 묶어둔 줄을 풀어달라고 애원하거나
호흡기를 빼달라며 할 말이 있다고 가족에게 말했지만
호흡기를 빼는 순간 운명하실 지도 모른다는 무언의 압력에 의해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간호사의 말에 의하면 주무시고 있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래도 면회시간만큼은 줄은 풀어주었다고 한다.
생사여탈은 하늘의 뜻이라고는 하지만
서로의 가슴에 한을 남기지 말고 떠났어야했는데
81세로 천수를 누려가며
술과 담배를 통해 삶의 한을 씻어내고자 했지만
고통과 고난의 역사를 뒤로한 채
삶의 텃밭인 고흥에서 영면에 들고 말았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혼을 달래며
천국으로 가기를 기도하고
삶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이승과의 결별을 노래할 수 있도록
아프지 않은 죽음을 기원하기도 했다.
영동고속도로를 달리던 용인에서
지인의 아버님 운명의 소식을 듣고
달리던 차를 호남고속도로 방향인
전남 고흥으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가야할 길과 가지 말아야할 길이
생겨나는 것은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 다음날 따로 2월 21일 화요일 오전 10시 30분에 출발하여
7시간 동안 밟고 또 밟으며 한없이 달려야하는 길을 따라
오후 5시 30분 쯤 고흥종합병원 영안실에 도착했다.
함께 온 사람들과 영정 앞에서 침묵으로 기도하며
부디 좋은 곳에서 편안하게 지내기를 염원했다.
한곳에 오래지내면 좋은 점은
텃밭이 생긴다는 사실이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모이는 곳이 있다는 것은
사람들의 정이고 삶이다.
아홉 딸 중 셋이
하나는 전화국에서 근무하고
또 하나는 군청에서 근무하고
또 다른 하나는 농협에서 근무하고 있어
고흥과 장흥 전역이 인맥으로 엮어져있다.
오가는 중에 만날 수 있는 정으로 쌓여있어
함박눈만큼이나 기쁜 소식으로 서로의 발걸음을 밟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따라 상서로운 눈이 내려
고인의 발걸음이 가볍다 생각할 만큼 펑펑 내리고 있다.
누구에게나 한번은 가야할 죽음이지만
가끔씩 죽음을 죽음이라 말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얼마나 달려왔는지 손발이 말을 듣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터널을 지나자마자 눈길에 밀려 화단 위로 차량 한 대가 서있다.
차량 밖에선 손을 흔드는 한 남자가 있고
언제 연락을 받았는지
경찰차가 싸이렌을 울리며 다가서고 있다.
그런데 제네시스 스포츠카가
파손된 차량의 잔해물에 걸려들었는지
1차선에서 목숨을 내놓고 폭주족처럼 달리던 차가
갑자기 2차선으로 자리를 옮긴 후
막 시집온 새색시처럼 조신하게 저속으로 달린다.
그리고 뭐가 궁금한지 휴게소에 들리자마자 차에서 내려
30대 후반의 탑승객 두 명이
파손된 곳은 없는지 자세히 살피고 있다.
가까이 다가서자 술 냄새가 진동한다.
다가서자마자 ‘많이 놀라셨죠!’ 라고 말하자
거나하게 취한 상태로 입을 연다.
다행히 크게 파손된 곳은 없지만
운전석 앞 범퍼가 칼로 오려내듯이 상처를 입었다.
차가 파손되어도 말할 수 없는 남모르는 가슴앓이를 하며 서있다.
‘마음 좀 안정시킨 후 가세요.’ 라고 말한 뒤
뒤돌아보니 편의점에서 숙취해소에 좋은 음료수를 마시고 있다.
아마도 음주운전으로 인해 파손된 것보다
그림자처럼 따라와 ‘많이 놀라셨죠!’ 라는 말에 더 놀랐는지도 모른다.
성난 황소처럼 달리다 조신해지는 것은
대체적으로 제한속도를 새겨놓은 CCTV 앞을 지나거나
음주운전으로 달리는 차량일 것이다.
상갓집에 문상 갔다 돌아오는 길에
죽음을 맛보는 경우도 있지만
터널 앞에 쌓인 눈 때문에 사고가 난 사람은
죽음보다 더한 죽음을 맛보았을 것이다.
갈 때는 7시간이 걸렸지만
올 때는 5시간이 걸렸다.
갈 때는 낮이었지만
올 때는 밤이었다.
그리고 낮과 밤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맛보는 곳이기도 하다.
2012년 2월 21일 화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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