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길 없는 길(누락)

청아당 2010. 3. 18. 23:43

길 없는 길(누락)

 

푸른 파도가 다가와 안부를 묻는 의상대에 올라서면

바다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지평선 너머 달려온 길이지만

되돌아갈 때는

또다시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야만 한다.

분명 길이었지만

갈 때는 새로운 길로 달려야만 한다.

흔적을 남기고 나면

흔적을 없애고 싶은 것이 사람마음이다.

길 없는 길을 만들어놓고

또다시 새로운 길을 달리라고 한다.

얼마나 달려온 세월인데

얼마나 숨이 찬 세월인데

길 없는 길속에서

길을 만들라고 하는가?

이미 만들어진 길은 길이 아니다.

선각자들이 만들어놓은 길을

똑같이 따라 걷는 사람은 없다.

개성대로 태어나

개성대로 살아가는 삶속에서

인간상품이 되기를 바라는 선각자는 없을 것이다.

빈틈없이 선각자들이 걸었던 발걸음을 똑같이 따라 걸어도

걸을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늘 던져놓고

뒤돌아서서 다시 잡는 어리석음으로 살아온 선각자들

버린다고 버려지지 않는 것이 말빚이다.

역사는 살아있을 때 존재한다.

죽어있는 역사는 호흡을 불어넣어도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

소유하지 않는다고 무소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손끝에서 나온 말빚은

눈감으면 사라진다.

얼마나 멀리 달려갔기에

얼마나 멀리 사라졌기에

혼란 속에서 소유를 말하고

무소유를 말하는가?

바람 따라 흩어졌으면

그것이 무소유이다.

바람을 잡는다고 무소유가 되는 것이 아니다.

숲을 지나

나무를 지나

계곡물에 흘려보내는 도화꽃처럼

저기 행복이 있고

저기 아름다움이 있고

그리고 소유하지 않고 무소유로 존재하는 폭포가 있다.

한번 떨어지면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고 달리는 물이다.

우리에게 잠시나마 행복을 안겨주었고

우리에게 잠시나마 아름다움을 안겨주었던

말빚이다.

소유도 무소유도 존재하지 않는

저 먼 곳에서

편히 쉬시기를 바라면서

하늘을 향해

땅을 향해

거대한 굉음으로 맞선다.

 

2010318일 목요일

 

길 없는 길을 생각하며...

 

청아당 엄 상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