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와 전생
“현생의 부모 자식 형제 부부 관계라고 해서 그들과
전생까지 모두 아름답지는 않았었다는 것을
이제 조금은 확연하게 알아간다.”
우리는 그동안 습에 의해 잘못된 정보를 입력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막연한 기대 속에서 윤회와 전생에 대해 희망을 꿈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억겁은 너무 과장된 단어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역사의 의미가 너무 겸손했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역사의 의미는 너무 교만했다고 본다.
우주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억겁은 과장되어도 너무 과장된 면이 없지 않다. 물론 그 당시에는 그것이 정설로 굳어져 있었지만 지금껏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쓰듯 써온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현생의 부모 자식 그리고 형제나 부부 관계라고 해서 그들과 전생까지 모두 아름답게 인연되어져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생의 부모 자식 그리고 형제나 부부 관계의 관계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과거생의 관계도에서 반드시 그와 같은 모습을 유지한 채 현생과 인연되어졌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인연은 강력한 연결력이 맺어져야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특히나 우주와의 인연이 강력할수록 현생에서 만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생에서 크게 인연이 닿지 않아도 현생에서 부부로 맺어지는 경우는 있다. 하지만 그 관계에서 살펴보면 끈끈한 부부애를 발견하지 못한 경우를 살펴볼 수 있다.
그렇지만 과거생에서 생명이 다할 때까지 서로를 그리워하며 생을 마감한 경우 현생에서 나이 차이가 커도 만나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 10~20살 이상 차이가 나도 만나는 경우를 살펴보면 과거생에서 못다 한 만남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생에서 복잡한 관계에서 만나게 되지만 그 만남은 영원한 사랑으로 이어져 내생까지도 약속하는 경우가 생겨난다. 그렇다고 모두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럴 확률이 높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부의 연이 아니더라도 사랑의 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따라 과거생과 현생이 이어지고 현생과 내생까지도 이어지는 놀라운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과거생과 연관성이 있어야만 인연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과거생에서 만나지 못했지만 현생에서 새로운 관계로 만나 인연을 맺어나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생에서 새롭게 인연을 맺어나가는 경우가 더 많을 수 있다. 과거생은 현생에서 어떤 생과 만날지 모르기에 그 확률은 매우 낮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생이든 전생이든 아름다움의 끝을 맺지 못한 경우는
늘 아쉬움과 아련함을 함께 간직하나 보다.
그러한 카르마가 습이 되어 자리하고 있으면서
발견해나간다는 것은 인간의 뇌라는
기억장치에 대한 한계치가
과연 어디까지의 방대함인지 가늠이 어렵다.
이 모든 것 또한 수많은 습의 반복 중 극히 일부에
속하는 것이니 마음자리 머무름 또한 없음이라.
모든 현상은 신비가 아닌 우주에너지와의 채널링 과정이다.
안다는 건
현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알고 맥을 잡아 최선을 다하는 것과
막연히 최선을 다하는 조금의 차이일 뿐….
어느 것도 선의 틀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리고
간절함 속에서 마지막으로
울부짖으며 소통했던 우주가 주는
한가지 선물로 자리한다.”
“전생 명상은 단순히 현상적인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고요한 가운데 우주적인 감사였고
끝없이 이어진 전생은
깨달음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경지였다.
깨달음 속의 채움으로 가득하였고
깨달음 속의 비움으로 가득하였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형상으로 가득하였고
가로와 세로줄이 얽혀있는 것 같았고
입체적인 삼각형 빛의 형상에 갇혀
무한한 세계를 경험하는
지고지순한 세계를 접하는 것 같았다.
악은 선으로 변할 수가 있고
선은 악으로 변할 수가 있다.”
그렇다. 간절함 속에서 마지막으로 울부짖으며 소통했던 우주가 주는 한 가지 선물로 자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어느 것도 선의 틀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 모든 현상은 신비가 아닌 우주에너지와의 채널링 과정 속에서 나타날 수 있기에 그 깊이는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고 깨달음의 가장 안쪽을 노크하는 매우 난이도 높은 진화된 형태로 다가오기에 더욱 그렇다.
윤회와 전생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현상적인 것을 보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 내재되어져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흐름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우주의 섭리를 꿰뚫어야만 볼 수 있는 혜안이 있다.
안다는 것은, 본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을 꿰뚫어야만 가능하기에 영계와의 소통은 단순한 과정이 아니라 깨달음의 끝을 노크해야 하는 경우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얻기 이전에 전생을 보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방향설정부터 낮은 단계로 접근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단순히 현상적인 수준에서 머물 확률이 높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다행히 깨달음과 깨달음의 꽃인 고요의 극점까지 가 보았고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다양한 현상들을 경험한 후 전생 명상에 이르니 그 감개가 새롭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감내할 수 없을 정도로 전생 명상을 통해 깨달음의 세계를 뛰어넘는 또 다른 깨달음의 세계를 접했기 때문이다.
우주의 세계는 놀라움의 연속이다. 알면 알수록 그 끝을 알 수 없는 것이 우주이기도 하다.
인연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것이 크든 작든 인연은 놀라운 현상으로 증폭되어지기에 업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악연이나 선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인연은 업이나 악연이 아니다. 선한 인연이다.
선하다는 것은 설렘의 극치이자 우주가 추구하는 본연의 모습이기도 하다. 순수 그 자체이기에 우주의 순수로 불리기도 한다.
보아라! 우주의 순수인 선업은 순진무구하지 않은가?
때 묻지 않고 선한 업으로 자유를 향해 순항하지 않는가?
우주의 그 어느 곳에 걸려도 넘어지지 않고 달릴 수 있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그렇게 홀가분하게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바로 선업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비록 공존하는 선악이 함께하더라도 악보다는 선을 가까이하는 선업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윤회와 전생은 악업을 만들어나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하면 악업을 없애고 선업을 쌓아나가도록 하는가에 있다.
선업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종교가 추구하는 것도 있지만 우주 본연의 순수로 나아가는 길이기에 이는 곧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선업은 악업을 뛰어넘는 초월성이자 순수 그 자체이기에 우주의 귀로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끝과 시작을 노크하기도 하고 시작과 끝을 노크하기도 한다. 가없는 공간은 손으로 헤집고 다닐 수도 없고, 무한한 공간을 업고 다닐 수도 없고, 바람처럼 빈 공간을 파고들 수도 없다.
윤회는 끝없이 돌고 도는 것이다. 윤회는 원을 붙잡고 끝없이 돌고 도는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윤회의 끝자락에서 내려 가장 고요하고 평온한 자리에 안착하여 마음자리를 굳힐 때가 있다. 윤회의 끝을 맛보는 것이다. 윤회의 시작과 끝을 마무리 짓는 것이다.
더는 갈 수 없는 공간이자, 더는 움직일 수 없는 시간이자, 더는 시ˑ공간에 머무를 수 없는 텅 빈 공허로 존재하는 것이다. 태초 이전의 세계인 태허(太虛)로 존재하는 것이다. 끝없이 갈고 닦으면 티끌조차도 사라져버린 태초 이전의 세계인 태허로 존재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고요의 극점에 이를 수가 있는 것이다.
2021년 5월 24일 월요일
청아당 엄 상 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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