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호흡량으로도 최고의 절정을 이룰 수가 있다
호흡이든, 삶이든, 어떤 목표의식이든
선결 조건은 간절함과 처절함이 밑바탕에 깔려야 한다는 점이다.
간절함과 목표의식이 없다면
처음부터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강인한 정신력과 순수이다.
우주적인 순수성이 없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그 끝에 도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순수는 실력을 압도하기도 하지만
순수는 그 모든 것을 덮는 묘한 능력이 있기도 하다.
높은 호흡량을 통해 최고의 경지에 오르는 것하고
낮은 호흡량을 통해 최고의 경지에 오르는 것을 비교해 보았다.
놀라운 결과였다.
둘 다 거의 일치하는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굳이 높은 호흡량을 고집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낮은 호흡량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목표점에 도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방법이다.
흡지를 반복하며 빠르게 걷는 걷기명상을 한 후
좌정하여 명상에 들거나,
흡지를 통해 편안하면서도 안정된 호흡을 하여
자율적 호흡에 있어 대가를 이룬 경우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주와 내가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이 하나라는 연결고리에 얽혀있는 것을 뜻하기에
한번 얽힌 연결고리는 그 끝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연속성을 띠기도 한다.
전기성과 자기성을 폭발적으로 일으키는가 하면
우주에너지가 자율적으로 경락유통을 하며
거센 동맥혈이 온몸을 뚫고 돌아다니는 형국으로 뻗어나가기도 하고
투시를 비롯하여 영적 현상들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여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초월하여 고요의 극점에 다다르기까지
원과 원이 하나로 얽혀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는 형국으로 변하기도 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경지이기 때문이다.
예측할 수 없는 세계가 펼쳐지는가 하면
잔잔하면서도 고요한 가운데 우주에너지의 묘용이 펼쳐지며 전신을 휘감기도 하고
우주와 연결되어져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에 휘몰아치듯이
강력한 에너지로 돌변하여 토네이도처럼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기도 한다.
특히 백회가 수시로 열려있어 우주에너지와 통신을 주고받기도 하고
전자기장의 폭발로 인해 손발이 저절로 움직이며 에너지의 흐름에 맡기기도 한다.
황금빛 찬란한 우주의 빛 너머에 존재하는 고요의 극점에 들 때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나타나며 그 중심에서 빛의 세계를 펼치며
색과 공은 둘이 아니며 본원적 세계와 연결되어져 있음을 우주의 칼날로 내려치기도 한다.
단순히 이론적, 학문적, 논리적 깨달음이 아닌
몸으로 직접 체험하는 체험학습의 결정체로 다가와 깨우쳐주는
우주의 선물이자 축복이기에
그 무한한 기쁨과 행복은 가없는 끝을 달리고 있는 거와 같다.
물론 너와 나를 구분할 수도 없고
색과 공을 따로 구분할 필요도 없고
담담하면서도 무게감 있게 기품있는 발걸음으로
우주적인 현상들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본원적 발원지와 연결되어져
무한한 우주적인 통신을 주고받게 된다.
호흡량이 길지 않으니 부담이 없고
피부기공호흡으로 이어지니 스스로 호흡을 할 필요도 없고
천지가 개벽하듯이 내면에서는 소우주가 작동하고 있으니
앉으나 서나 우주에너지의 흐름에 따라
“지극함에 이르면 별다른 기이함이 없다”라는 말을 잡고
산나물 뿌리를 씹어 담백한 맛이 우러날 때까지
씹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할 수밖에 없다.
신비는 계속해서 일어나지만
신비는 평범의 무덤이듯이
그렇게 담담하면서도 무덤덤하게 무아의 경지에서 바라만 볼 뿐이다.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금강석처럼
하나에서 순차적으로 전체로 나아가고
전체에서 역순으로 하나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하나에서 전체로 나아가는 것은 현실을 말하는 것이고
전체에서 하나로 나아가는 것은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모든 것은 하나에서 시작되지만
그 끝은 전체에서 마무리되기도 한다.
그래서 시작과 끝은 하나로 연결되어져 있으며
원은 그 어느 곳으로 뛰어들던 결국 한곳에서 만나게 되어있다.
참으로 깊고도 깊은 세계가 호흡의 세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고통 속에서 느끼는 최고의 경지가 아니라
즐김의 미학 속에서 느끼는 것들이기에 그 값어치가 더욱 크다 할 수 있다.
물론 고통의 극치를 넘어서면
그것처럼 편안하고 부드러운 우주적인 품이 없지만
처음부터 즐기면서 행하는 명상과는
접근하는 방법에서부터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어떻게 보면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고통의 극치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지고지순한 최고의 경지를 느낄 수 없는지도 모른다.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든지
고통의 극치를 느낀 후에야 최고의 경지를 맛볼 수 있기에
방법에 차이만 있을 뿐 그 결과는 같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흡을 통해 고통의 극치를 느끼던
삶의 깊숙한 곳인 생사여탈 속에서 느끼는 고통의 극치를 느끼던
그 결과는 같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즐길 줄 아는 수련자만이
즐김의 미학을 발견할 수 있는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삶을 즐기던
명상을 즐기던
호흡을 즐기던
즐김 속에서 느끼는 진정한 묘미는
채근담처럼 담백하게 한없이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2021년 4월 19일 월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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