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전 살펴보기(마음가짐) - 깨달음(궁극의 의문해소)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우주의 원리를 찾기 위한 여정이라고 봅니다. 다시 말하면 온 우주를 밝히는 우주적인 빛과 함께 경험하는 경지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 속에서 만나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초월한 상태를 말하기도 하고, 동일한 현상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이는 자기장의 폭풍 속에서 느끼는 현상이자, 섬광이 빗발치는 번개행공을 지난 상황에서 느끼는 현상이다 보니 위의 두 가지가 다 해당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강렬했고, 우주적인 평안함과 함께 다가온 현상이었기에, 그 속에서 느꼈을 무심의 경지는 우주의 시작과 끝을 향해 경계 없이 달린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인체가 소우주라는 사실은 이를 통해 느꼈을 만큼 우주에서 일어날 모든 현상들을 겪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그 어떤 현상을 대해도 무심해지는 경우가 생겨나기도 합니다.
예로부터 선승들이 주로 사용해온 것이 허를 찌르는 질문이다. 물론 핵심을 파고드는 질문이자 미처 깨닫지 못한 곳을 깨우쳐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준으로 깨달음에 대해 질문을 하면, 수련자의 내적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했다고 볼 수 없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잣대이다 보니 객관적인 잣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측정하기 위한 도구가 개발되지 않은 탓도 있지만, 오랜 전통처럼 관습적으로 내려온 틀이다 보니 쉽게 고칠 수 없는 한계 또한 있다고 본다.
과거에는 스승과 제자 간의 관계가 수직관계로 이루어지다보니 가능한 일이었지만, 현재는 그러한 방식으로 측정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교수자와 학습자 간에 완충작용이 개입되어 교수자와 학습자 간의 관계에 있어 온라인 학습(on-line 學習. 이러닝 또는 가상 학습)과 오프라인(off-line. 집체 교육 또는 개인 지도) 등을 통해 소통과 맞춤형으로 나아가야하는 새로운 학습법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깨달음을 측정하기 위한 선문답보다는 기와 소립자의 작용을 먼저 깨우치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방법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깨닫기 위해 평생을 허비하는 것보다는, 과학적인 측정방법으로 기의 퇴적층을 바탕으로 형성된 자기장의 폭풍 아래 이루어지는 깨달음이 더 생동감 있고 현실적인 방안으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깨달음하면 추상적이고 막연하여 그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모를 때가 많다.
깨달음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
하나는 소각(小覺)이고 또 다른 하나는 대각(大覺)이다.
소각은 일상적인 생활에서 깨닫는 것이고, 대각은 우주적인 깨달음을 말한다. 대각은 크게 깨우치는 것이기에 단 한번이면 족하지만, 소각은 평생을 통해 깨달아야하는 인내심이 필요한 깨달음이다.
사람들은 착각할 때가 많다.
대각을 이루고 나면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을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이다. 그렇지만 단호하게 말하지만 대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소각이다. 이는 대각에서 이루지 못했던 꿈을 키울 수 있는 것이 소각이기 때문이다. 소각이야말로 대중과 생활하면서 깨우치는 것이기에, 산 경험이자 삶의 진수이기에, 진정한 깨달음은 대각이 아니라 소각이 누적되어 완성철학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투시나 영적현상 등 다양한 체험을 바탕으로 임계점에 도달할 때 일시에 발현되어지는 것이 대각이다. 그렇지만 반드시 투시나 영적현상을 동반한 채 임계점에 도달해야만 깨우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투시나 영적현상 없이도 우주본원지(보이지 않는 힘)와의 연결력이 한순간 강력하게 연결되어지면 자신도 모르게 누적된 기의 퇴적층에 힘입어 일시에 큰 깨우침을 얻게 된다.
대각은 수천만권의 책으로도 얻을 수 없는 우주적인 깨달음인 소중한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면, 소각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된 보다 진화된 깨우침의 퇴적층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대각이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내적치유와 함께 빛의 예술현상 또는 내적 자아(內的 自我. the inner self)로부터 탈출하여 우주적인 자아로 탈바꿈되어지는 과정이라면, 소각은 수행이라는 과정을 통해 발현되어지는 사소한 현상부터 시작하여 각종 다양한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약간의 차이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들은 대각만 이루고 나면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처럼 들뜬 양상을 보이지만, 깨달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함을 알아야한다.
대각을 이루고 나면 오히려 겸손해지는 것이 아니라 교만으로 치닫는 지름길이기에, 자신을 평생 동안 누르면서 살아야하는 고된 작업이 하나 더 얹힌다고 생각하면 딱 맞는 말일 것이다. 등에 진 짐이 가볍다하여 걸어야하는 수고까지 놓을 수 없듯이, 홀가분한 바람일지라도 손에 들고 다니다 보면 무거운 바람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인체의 어떤 부위에서 나타나는가?
한마디로 중단전의 발달이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물론 인체의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의 고른 분포도가 필요하긴 하지만 결정적인 곳은 중단전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중단전에서 묵직한 느낌이 든다는 것은 천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은 현상을 느끼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단전이 뚫리면 천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기도 한다.
한없이 평온하고 우주적인 포용심(우주심)이 발현되어지는 지점이기에 중단전의 발달은 매우 중요하다. 실제로 깨달음의 경지는 중단전이 발달한 상태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중단전이 발달되어야만 내적 자아가 치유되면서 보다 높은 곳을 향해 달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단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중단전의 발달은 매우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무게 중심을 하단전에 두라고 한 것은, 기가 안착할 수 있는 그릇이자 힘의 균형 때문이라면, 중단전의 발달은 우주적인 평온함과 함께 깨달음으로 가는 길목을 열어주는 통로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상단전이 투시와 영적현상 등 우주적인 현상들이 발현되어 나타나는 곳이라면, 하단전은 기의 창고라고 할 정도로 무게 중심을 잡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깨달음에 관련된 이해를 돕기 위해 두 편의 詩를 감상해보자.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 깨달음의 구조와 원리>
내부적으론 송과체와 인체전자석의 원리를 살펴보아야할 것이고
외부적으론 지구, 달, 태양의 원리를 살펴보아야할 것이다.
깨달음은 내적요인과 외적요인에 의해 발생한다.
눈을 감아도 빛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생리학적인 문제이고
눈을 떠도 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우주천체학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이란?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참으로 복잡 미묘한 원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사전적인 의미부터 살펴보면
1. 제대로 모르고 있던 사물의 본질이나 진리 따위의 숨은 참뜻을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됨.
2. 모르고 있던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림.
우선적으로
선문답이나 명상을 통해 얻어낸 깨달음이 있는가하면
호흡을 통한 극한의 상태에서 얻어낸 깨달음이 있는가하면
한줄기 빛에 의해 얻어낸 깨달음이 있는가하면
무심의 경지에서 얻어낸 깨달음이 있을 수 있다.
깨달음이라고 하면
무릇 자연계와 우주를 아우르는 포용력이 전제되어져야 하고
깊고도 깊은 세계를 체험해야 하고
투시를 통해 과거, 현재, 미래를 투영해보아야 하고
내적잠재의식인 무의식과 의식의 세계에 대해
스펙트럼처럼 잘게 썰어 분석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하고
고체, 액체, 기체의 순서가 바뀌거나 실제로 내적체험을 통해
고체가 액체로 되는 현상을 경험해보아야 하고
액체가 기체로 되는 현상을 경험해보아야 하고
기체가 고체로 되는 현상을 경험해보아야 하고
고체, 액체, 기체로 순환되는 현상을 동시에 경험해보아야 한다.
깨달음의 세계는 단순하지가 않다.
어느 한 순간에 느꼈던 직관이나 영감을 통해 깨우치는 것은 맞지만
어떤 때는 자신이 깨닫고도
그것이 깨달음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있다.
그렇지만
어떤 계기를 통해
그것이 깨달음이란 사실을 뒤늦게 깨우치는 경우도 있다.
깨달음은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마음에 담아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잡았다싶으면
언제든 빠져나가는 것이 마음이자 깨달음이기에
깨달음은 어느 한곳에 고정되어지거나
어느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흔든다고 흔들릴 깨달음도 아니다.
한번 얻은 깨달음은
그 누가 아무리 흔들어대어도 흔들리지 않는 거대한 산처럼
우뚝 서 있는 것이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마치 우주가 회전하며 제자리를 지켜나가고 있듯이
그 안에서는 천변만화의 변화가 작용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론 안정감을 유지한 채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과 같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깨달음은 원에 비유되기도 하고
우주에 비유되기도 하고
땅에 비유되기도 하고
사람에 비유되기도 한다.
천지인이 하나로 모여드는 것이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천지인을 하나로 모으면 끝나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깨달음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
다양한 여러 정보 때문에
그 시작과 끝에 있어 천변만화한 이론이 필요하다.
깨달음은 간단하면서도 복잡하고
복잡하면서도 간단하다.
깨달음은
전체에서 하나로 역순으로 파고들어가기도 하고
하나에서 전체로 정순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이 둘의 조합이 깨달음을 좌우하기에
그 순서를 정해서
전체에서 하나로 파고들어가는 법을 깨우쳐야한다.
비법은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다보면
그 속에서 원리를 발견하게 되고
원리를 발견하다보면
깨달음의 구조에 대해서도 발견하게 된다.
깨달음을 얻었다하여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비로소 시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깨달았다고 해서
자연이 그 사람만을 편애하거나 높이 받들어주지 않기에 그렇고
깨달음은 단지 본연의 모습을 보거나 발견한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을 해보아라!
본래부터 있던 것을 단지 본 것뿐인데
더 이상 무엇을 원할 수 있겠는가?
깨달았다고 호들갑을 떨거나
자신을 내세우려는 순간
하늘이 먼저 나서서 교만을 잠재우기도 한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었다고
더 이상의 깨달음을 얻는데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궁극적인 깨달음과 삶에 대한 깨달음은
분명하게 구분되어져야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깨달음은 그대로 놓아둔 채
삶에 대한 깨달음을 또다시 얻어야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깨달음을 갖고
삶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한테 달려들면
누가 이길 것 같은가?
당연히 삶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한테
초반에 박살난다.
깨달음에도 내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둘의 깨달음을 체득하지 않고서는
그 어느 곳에 가서
함부로 깨달음에 대해 논하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궁극적인 깨달음은
일정한 수련기간 내에 얻은 깨달음이기에
그 내력이 짧지만
삶에 대한 깨달음은 평생을 통해 깨달아야하기 때문에
그 내력이 길 수밖에 없다.
짧은 것으로 긴 것을 이기려고하면
당연히 혼쭐이 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교만을 경계하고
겸손을 가까이하라고 하는 것이다.
교만은 자신을 드러내지만
겸손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에
그 속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깨달음으로 장난을 치면 안 된다는 점이다.
반드시
그에 응당한 하늘의 뜻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8년 3월 19일 월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깨달음이란?- 일진법계>
전체에 갇힌 하나요,
하나에 갇힌 전체이다.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는 용기요,
궁극의 물질과 비물질을 찾아내는 혜안이다.
너와 나를 구분하지 말라.
‘오직 하나인 참된 세계’ 일진법계(一眞法界)
한 티끌 속에서 일어선 우주의 안팎이자 실상이다.
잡으려 하지 말고
놓으려 하지 말라.
있는 그대로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처럼
그렇게 바라보면 된다.
산속이든
세속이든
스스로 존재하는 자처럼
생물이 무생물로 살아갈 수 없듯이
무생물이 생물로 살아갈 수 없음이라.
보지도
듣지도
잡지도
놓지도 말라.
그곳이 일진법계요.
이곳이 일진법계이기 때문이다.
2019년 5월 25일 토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우리는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깨달음 안에는 각종 이적이나 기적 또는 투시와 영적현상들이 동반하는 데 이러한 것들이 반드시 일어나야만 큰 깨우침을 얻을 수 있는가이다.
한마디로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위의 현상들이 수반되어 나타나면 금상첨화겠지만, 반드시 위의 현상 없이도 얼마든지 지극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채근담에 보면 ‘지극함에 이르면 별다른 기이함이 없다’라는 말이 나온다.
깨달음은 위의 현상학적인 측면보다는 내적 자아(內的 自我. the inner self)와 연결되어져 있기에 우주적인 포용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일점을 향한 집중력(일진법계)의 소화력이 왕성해질 때 나타나는 것이 대각이다 보니, 각종 현상학적인 측면이나 우주적인 현상들보다는 보다 조용하고 내밀한 자신과 우주와의 긴밀한 교감이 이루어질 때 대각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적 자아는 명상(수련)을 기반으로 한 우주본원지와의 긴밀한 교감이 필요하다.
그림에서도 보여주고 있듯이 내적 자아는 [명상(수련) + 내적 자아 + 우주본원지]라는 도표가 형성되어진다.
단순히 명상을 한다고 해서 천년 묵은 체증이 저절로 내려가지는 않는다. 천년 묵은 체증은 중단전 적체현상으로서, 어쩌면 전생에 쌓인 업보나 생활 중에서 발생하는 각종 갈등을 해소시키는 데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명상보다 더 깊이 내려가는 호흡수련법(인체전자석 수련법)을 기반으로 접근하다보면 자기장의 폭풍을 의미하는 기샤워를 맛볼 수도 있다.
기의 퇴적층이 형성됨으로써 맛볼 수 있는 기샤워는, 심신에 쌓인 각종 노폐물(중단전 적체현상)을 정화시킴으로써 발생하는 자정작용이자 내밀한 자아로 나아가기위한 전제 조건인 내적치유로 연결되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기샤워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경건함과 신성함이 동반되어져 나타나야하겠지만, 보다 내밀한 자아를 만나기 위해서라도 내적치유는 꼭 필요한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이렇게 [명상(수련) + 내적 자아 + 우주본원지]라는 세 개의 단어가 모이게 되면 하늘을 움직일 수 있기에 이로 인해 덤으로 얻는 것이 대각인 깨달음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참고로 그리스도교에선 ‘명상 – 하나님’을 통해 내적 자아가 빠진 상태로 유지되어져 왔지만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에 의해 ‘명상 – 내적 자아 – 하나님’의 형태로 삼위일체를 이룸으로써 내적 자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적 자아(the inner self)는 하나님만큼이나 비밀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처럼 온전히 파악하려고 하는 모든 개념들을 빠져나간다. ‘어떤 사물’(a thing)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대상으로 잡을 수 없고 연구할 수도 없는 삶이다.”
토머스 머튼도 내적 자아에 대한 완성을 이루지 못한 채 작고하였지만, 내적 자아는 동양종교사상과 동양철학에 기반을 둔 내용이라서 그 이해의 폭이 적었던 것 같다.
그만큼 내적 자아에 대한 확신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꾸준하게 내적 자아에 대해 고민한 흔적을 보면, 내적 자아의 중요성은 매우 크게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요의 극점은 우주적인 현상의 하나이다.
대각을 얻은 후 느끼는 우주적인 현상이지만, 이것은 깨달음하고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깨달음이라는 큰 틀 안에는 소각과 대각의 모든 것들이 포함되어져 있다 보니 엄밀하게 말하면 소각이든, 대각이든, 우주적인 현상이든, 모든 것들은 깨달음의 범주 안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오감과 육감을 통해 발생하는 것을 비롯하여 일상에서부터 우주적인 현상에 이르기까지 모두 깨달음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껏 깨달음을 대각으로 국한해서 생각할 수 있지만, 깨달음 안에는 협의의 깨달음인 소각과 광의의 깨달음인 대각 그리고 현상학적인 작용까지 함께 어우러져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보고, 듣고, 느끼고, 만져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까지도 깨달음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뜻에 맞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과거에 있던 것을 아는 것도 깨달음이요, 현재에 있는 것을 아는 것도 깨달음이요, 미래에 발생할 앎도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눈을 감아도 깨달음이요, 눈을 떠도 깨달음이요, 눈에 보이는 것도 깨달음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깨달음이 되기 때문이다.
깨달음에 대한 정의를 정리해보면 협의의 소각과 광의의 대각 그리고 그밖에 발생하는 모든 것들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깨달은 이후에 발생하는 돈오돈수(頓悟頓修) 또는 돈오점수(頓悟漸修)에 대한 오해의 소지이다.
어떤 이는 돈오돈수면 충분하다고 말할 수가 있고, 어떤 이는 돈오점수를 고집하여 평생을 깨달음이라는 틀에 갇혀 사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수행이라는 것이 하루 이틀 끝내고 말 일이 아니다 보니 그런 주장을 할 수도 있겠지만, 수없이 깨달음을 얻어 봐야 더 이상 나올 것이 없다면, 그것처럼 허무한 것도 없을 것이다. 물론 수행은 계속해서 하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소모적인 수행보다는 의식주를 해결해가며 해야 하는 수행이다 보니 수행의 강도를 조절해가며 보다 건설적인 수행 쪽으로 몰입해간다면 신선도가 훨씬 높아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깨닫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이렇게 평생을 통해 수행만 해야 한다면, 삶 전부를 소모해야하는 낭비 아닌 낭비를 하게 되어 대중으로부터 지탄을 받을 수도 있기에, 될 수 있으면 돈오돈수에서 그치고 그 나머지는 시기에 알맞게 수행의 정도를 조절해나가는 방향으로 목표를 삼는다면 절충점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2019년 7월 4일 목요일
청아당 엄 상 호 글
자료출처 :
다음백과 고사성어대사전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26XXXXX00347
불교의 수행은 아래와 같이 네 가지가 있다.
돈오돈수(頓悟頓修) : 단번에 깨달아서 더 닦을 것이 없이 공행을 다 이루어 바로 부처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돈오점수(頓悟漸修) : 단번에 진리를 깨친 뒤 번뇌를 차차 소멸시키는 것을 말한다.
점수돈오(漸修頓悟) : 단계를 밟아서 차례대로 닦아 일시에 한꺼번에 깨닫는 것을 말한다.
점수점오(漸修漸悟) : 차츰 닦아 가면서 조금씩 깨닫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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