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전 살펴보기』/4. 마음가짐에 대한 글

수련전 살펴보기(마음가짐) – 종교(믿음의 힘)

청아당 2019. 7. 2. 10:25

수련전 살펴보기(마음가짐) 종교(믿음의 힘)

 

믿음은 두 손끝에서 나온다.

 

간절함은 믿음을 만들고, 믿음은 확신을 만들고, 확신은 희망을 현실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대부분의 일들이 간절함이 밑에 깔리지 않으면 위로 올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간절함 뒤에는 믿음으로 중무장하게 되고, 믿음을 통해 확신을 하게 되고, 확신을 통해 희망 섞인 기대를 갖게 되는 것이 믿음의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믿음은 인간생활에서 만들어진 신앙과도 같은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믿음이 단지 종교적인 수단으로만 작용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일상화되어져 있고, 대중화되어져 있고, 인간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믿음에 대한 신뢰이기도 하다.

 

믿음만큼 든든한 후원자가 없을 정도로 인간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산을 옮기고 우주를 옮길 만큼 위대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만큼 믿은 만큼 이루어지는 것이 믿음이기에 믿음에 거는 기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크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은 두 손끝에서 나온다는 것은, 기도하는 과정에서 두 손을 모으게(합장)되고, 종교인의 대부분이 합장한 상태에서 마음과 신이 만나도록 경건함 속에서 의식을 치루고 있기 때문이다.

 

반드시 두 손을 모으지 않고 마음으로 행해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두 손을 모으거나 두 팔을 펼치는 행동 속에서 믿음에 대한 반대급부적인 신의 에너지이자 우주에너지인 기가 원활하게 모인다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는 성령으로 표현될 수도 있고, 신성한 기운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믿음은 종교를 활성화시키는 동력역할을 해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율배반적인 논리인지는 몰라도 종교라는 매력에 푹 빠져 종교 뒤에 숨겨져 있는 우주의 힘에 대해 논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종교가 지니고 있는 매력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다.

 

절대자인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종교적인 힘이다 보니 쉽게 나서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각도를 달리해보면 우주의 힘이 신을 조종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것은,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한 탓도 있지만, 서양 신들의 모습이 다 다르다는 데에 있다.

 

인간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놓은 신이다보니 종교도 다르고, 신도 다르고, 경전조차도 다 다르다. 심지어는 같은 종교 안에서도 서로 다른 하나님을 믿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할 정도로 매우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교회마다 다 다른 하나님을 믿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또는 자신의 교파만이 최고라고 말하거나 자신이 믿는 교회만이 진정한 믿음생활을 한다고 철저하게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구난방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거나 오직 자신의 종교만이 최고라고 내세우는 것을 보면 매우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생각을 전환해서 접근해보면 이런 논리도 성립된다고 본다.

 

신이 우주를 만든 것이 아니라 우주가 신을 만들어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주의 힘이 신이라는 형상을 만들어내어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주의 힘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고, 냄새도 나지 않아 쉽게 피부에 와 닿지 않은 탓에 우주가 신의 형상을 만들어내어 인간에게 접근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주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 신이기에 그 형상은 인간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비쳐지게 되고, 우주적인 현상까지 적나라하게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신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뜻은 아니다.

 

어떠한 형태로든 간에 신의 존재는 피부에 와 닿기 때문에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신의 존재는 우리들 뼛속 깊이 파고들어와 있기에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만 이 둘을 만족시킬 수 있는가이다.

 

우주가 신을 만들었던, 신이 우주를 만들었던, 이 둘의 존재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둘의 존재를 알려면 우주를 알아야하고, 신을 알아야하고, 신과 우주를 동시에 알려면 기와 소립자의 존재에 대해 알아야한다는 전제조건이 뒤따른다. 기와 소립자의 존재를 알다 보면 신을 알게 되고, 우주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매우 험난하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논리는 어디까지나 추측성이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하지만 입증조건이 충실하게 뒤따른다면 그 논리는 탄력을 받게 되어 있다.

 

그러고 보면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는 논리와도 비슷하다.

 

그렇지만 이 둘은 동시에 존재하기에 그 어느 쪽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로 자리 잡고 있다.

 

아주 어려운 문제로 떠오르고 있지만 언젠가는 풀릴 때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기도는 간절함이 우선 순서이다.

 

간절함이 선결되지 않으면 모든 것은 무너지게 되어있다. 그렇지만 맹목적인 간절함보다는 보다 효율적인 간절함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무조건 기도에만 온 정성을 쏟아서는 안 된다.

 

물론 기도를 통해서도 많은 혜택을 받아볼 수 있지만, 30~40년 간 신앙생활을 해온 신앙인도 오직 기도밖에는 몰랐는데, 내적치유를 통해 새로운 시각을 접한 후 기도도 여러 가지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종교는 오직 기도로 접근하는 것 같아도 그 길은 수없이 많고, 여러 갈래로 나눠져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문제의 연속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에게 여러 가지로 숨통을 트이게 하는 길이 있음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기도는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한 간절함이 묻어나야하고, 그 믿음은 순수해야하고, 확신해야하고,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절대적인 희망이 있어야만 가능하기에 믿음은 종교의 꽃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은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의념의 또 다른 이름으로 통하기도 한다.

 

의념 또한 막연하여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수련인에게 하나의 큰 기둥 같은 희망을 안겨주기에 믿음을 통해 의념을 활성화시켜나간다면 커다란 성공을 이룰 수가 있기 때문이다.

 

수련을 하다보면 일이 술술 잘 풀리는 경우가 생겨난다.

 

이는 의념이 믿음과 직결되어져 있고, 어떤 경로로 연결되어져 있든 지간에 하늘과 나와 하나가 되는 경험을 통해 투시를 비롯하여 각종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종교가 단순하게 믿음에 의지하고 있다면, 호흡수련은 보다 체계화된 이론 아래 신의 에너지이자 우주에너지인 기를 활성화시키는데 일등공신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확신 같은 것이 없으면 쉽게 무너지기 쉬운 것이 사람들의 마음이다. 종교가 지금껏 여러 갈래로 살아남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믿음을 통해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그 자리에서 일어서고, 사업이 번창하거나 각종 기적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것도 다 이러한 맥락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는 다 다르지만 현재진행형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반드시 예수나, 하나님을 알아야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이는 신의 에너지이자 우주에너지인 기의 작용이 활성화되어져있기 때문이다.

 

물론 종교인은 예수나 하나님의 존재를 의지해서 믿게 되면, 바로 신의 에너지인 기가 작동하여 각종 기적을 일으키는 작용을 하지만, 호흡수련인은 보다 효율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신의 에너지인 기를 끌어와 기샤워를 해가며 풍요로운 기의 바다에서 마음껏 우주여행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현상인가?

 

어떤 통로를 거치든 간에 신의 에너지인 기를 받아들이게 되면 각종 기적이나 이적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이러한 논리는 바로 우주의 근간을 뒤흔드는 논리이자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풍부한 우주에너지와 교감할 수 있는 일대 대변혁을 일으키는 사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기 뒤에 숨겨져 있는 소립자와 각종 암흑물질과 연결되어지고, 투시를 비롯하여 우주적인 현상들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한 해답을 던져줄 수도 있기에, 과학은 종교와 곧바로 연결되어져 함께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주에 존재하는 신의 입자인 신비로운 소립자를 통해 신을 형상화시킬 수가 있고, 우주공간 내에 새로운 시스템을 펼쳐놓고, 우주내외적으로 현상(물질)과 비현상(비물질)에 대해서까지 작용하고 있다는 점은 그동안 갇혀있던 생각을 열어주는데 크게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껏 막연하게 신에게만 의지해온 종교인이라면, 각종 신에게 하소연만할 것이 아니라 내적치유와 함께 보다 체계적인 방법으로 믿음생활을 한다면, 종교의 위대함이 다시 한 번 되살아나는 기적을 맛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호흡수련인에게는 손에 잡히는 큰 물줄기로 다가와 더욱 풍요로운 기의 세계에 진입하여 기샤워를 비롯하여 각종 다양한 우주적인 현상들을 경험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신을 만나게 하고 우주여행을 떠나게 한다.

 

기도를 통해 합장한 마음과 우주 본원지(보이지 않는 힘 또는 강한 손)와 직결된 탓인지는 몰라도 믿음(의념)은 신을 만나게 하고, 우주여행을 떠나게 하는 커다란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단순하게 생각한 것이 믿음의 힘이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해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기도를 통해 만나는 세계도 화려하고 멋있지만, 호흡수련을 통해 만나는 우주적인 현상들은 더욱 화려하고 상상할 수 없는 세계가 펼쳐지기에 종교보다 더 풍부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가 위대하다고 말한 것은 바로 믿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각종 기적 때문이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그에 상관하지 않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각종 기적들은, 신의 에너지인 기로 인해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종교인들의 거부반응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비롭게 작용하고 있는 기의 작용은, 신과 인간을 가리지 않고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만약에 나선형 소용돌이를 기반으로 기와 소립자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믿음도 없었을 테고, 종교도 없었을 테고, 호흡수련도 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인류에게 있어 가장 위대한 발견은 신의 에너지인 기와 소립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와 소립자야말로 우주의 비밀을 풀어주는 열쇠가 되기에 그 깊은 곳을 두드릴수록 신비는 더욱 고개를 들 것이고, 평범은 신비를 흡수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 & 답변

 

들꽃님

2019.07.02 21:25

 

숨 가쁘게 읽었습니다. 마치 맛있고 영양가 가득한 음식을 한상 차림으로 받아 든 느낌입니다. 한 두 문장만 제 생각과 조금 다른 측면으로의 접근이 보일뿐 모두 평소 저의 생각과 일치해서 신속하게 읽히고 과식한 느낌입니다.

 

믿음과 종교가 가진 그동안의 신비와 그 신비와 무지의 장막에 가려져 있던 진실이 기로서 밝혀지고 믿음과 종교는 더 큰 가치와 풍요로움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지금 종교가 보이는 한계성과 답답함이 기와 호흡과 그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믿음으로 한계를 넘어서고 힘차게 비상할 수 있을 것 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온갖 무지가 걷히고 종교와 신 그리고 우주의 놀라운 비밀과 그 풍요로움이 드러나면 인간의 삶은 무한한 가능성으로 뻗어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곤 했었습니다.

 

청아당님께서는 종교, 믿음, 호흡, 기에 소립자까지 종합적으로 등장시켜서 좀 더 균형 잡힌 탐구를 하시고 규명을 시도해 보시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접근이어서 신선함을 느낍니다. 깊은 수행의 체험 없이는 쓸 수 없는 명문으로 느껴졌습니다. 어찌 보면 청아당님의 집요하고 줄기찬 탐구가 나중에 어떤 열매를 맺게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깊은 통찰의 내용과 함께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 수련법까지 책에 담긴다면 명작이 탄생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청아당님의 글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을 다 쓰려면 너무 길어질 듯 해서 그저 간단하게 소감만 적어봅니다.

 

 

청아당

2019.07.02 23:25

 

처음에는 이러한 글을 써도 되나 고민이 되어 피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종교와 관련된 내용이 내포되어져 있는 것이 호흡수련이다 보니 마음가는대로님의 격려에 힘입어 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숨 가쁘게 읽어주셨다는 것은 저에겐 매우 영광입니다.

 

어떻게 보면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도 있어 매우 꺼리는 내용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지하게 받아주셨다는 것은 그만큼 이해의 폭이 넓으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종교에 대해 경건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편입니다.

 

하지만 그 너머에 있는 모습도 그려보아야 하기에 짧지만 써보았습니다.

 

믿음과 종교에 대해 깊이 있게 이해하시는 분들이라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집니다.

 

 

들꽃님

2019.07.03 00:48

 

종교를 추상적이고 막연한 곳에 두고 신성성이란 이유로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을 거부하고 불경시하는 것은 아직 전통적이고 낭만적인 종교관에 머물러 있는 종교인들이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종교를 물질과학과 생체에너지인 기의 과학으로 규명되는 것은 오히려 종교의 경건함과 신성성을 강화하고 막연함에서 엄연한 현실로 인식시키는 것으로서 무지와 미신으로 생기는 부작용이 사라지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생각해 봅니다.

 

그렇기에 청아당님이 올리시는 이와 같은 글들을 꺼리실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종교는 추상적인 대상을 향한 것이기에 각자가 다른 가치관으로 종교관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각자 논리를 전개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러나 앞으로는 그 중에서 더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주장이 대중에게 받아들여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청아당님의 이러한 글은 기꺼이 환영할만한 글이고 시도입니다. 이해 못하거나 감히 신성불가침을... 하면서 비난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성불가침이든 그 이상이든 과학의 접근을 거부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과학은 무엇을 격하시키는 학문이 아니고 오히려 진실을 규명해주는 학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청아당

2019.07.03 07:38

 

참으로 좋은 말씀을 해주신 것 같습니다.

 

목회자가 가슴에 품고 있는 어떤 하나님이냐에 따라 성도들에게 비쳐지는 하나님의 모습도 다 다르게 표현되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근본취지는 하나인데 교회마다 왜? 다른 하나님의 상을 그려내고 있는가에 많은 의문을 제기해보았습니다.

 

결국은 인간이 그려낸 모습에 따라 하나님의 모습도 다 다르게 표현되어지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직접 본 사람들이 없다보니 그런 현상은 더욱 가속화되어지는 것 같습니다.

 

수련을 하다보면 방언에서부터 시작하여 각종 음성메시지나 투시(삼세) 등 현란한 현상들이 수없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어쩌면 종교에서 그려놓은 현상들보다 영적으로는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들꽃님께서 지적해주신 대로 너무 추상적인 대상이다 보니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과학적으로 규명한다하여 결코 나쁜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오랜 습관처럼 굳어져버린 신성불가침이란? 용어에 갇혀 버린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수련을 과학적으로 분석한다하여 그 경건함과 신성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듯이 종교 또한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이미 형성된 종교관이기에 그 테두리에서 보다 진보적인 논리로 접근하면 건전하게 종교생활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에 어떻게 보면 오히려 더 효과적인 접근법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마음가는대로님

2019.07.02 23:22

 

20대 전후로 신단을 집중적으로 한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발끝에서부터 서늘한 느낌으로 왔지만 그이후로는 크게 기억나는 체험은 거의 없었는데 딱 한번 기억나는 체험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심한 고민이 있었는데 해결 방법이 보이지 않아서 기도 하는 심정으로 신단을 했습니다. 심한 고민만큼 간절하게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정수리에 큰 불덩어리가 계속적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신기하고 놀라기도 했지만 신단이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항상 간절한 마음을 유지하는 게 너무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믿음에 대해서는 약간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냥 알면 되지 왜 힘들게 믿을까?" 하는 생각을 은연중에 가졌던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은 크게 변함이 없었는데 인체전자석 원리에 대해서 다른 도반님 글을 참조해서 생각을 달리해서 접근하니 믿음을 제공하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때로는 그 믿음이 확신처럼 느껴지기도 했는데 그러한 부분이 알게 모르게 수련하는데 힘을 많이 준 것 같습니다.

 

경락유통을 하다보면 간혹 믿음인지 의념인지 기감인지 모호해지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서 의아하게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믿음은 의념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말씀을 들으니 내심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청아당

2019.07.02 23:42

 

저 또한 믿음에 대해서 많이 부정적인 견해를 가졌습니다.

 

그렇지만 믿음은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왔고 또 실생활에서 많이 쓰고 있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반드시 종교의 전유물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믿음을 잘못 해석하면 종교 쪽으로 포인트를 맞추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당연히 부정적인 견해가 생겨나기도 합니다. 워낙 종교가 난립하다보니 그러한 현상들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믿음과 종교에 대해 건전하게 파고들어가다 보면 조금은 유연한 생각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더구나 종교너머에 있는 모습들까지 보게 되면 그 믿음은 온순한 믿음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니 믿음에도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 같습니다.

 

좋은 믿음이 있는가하면 악한 믿음이 있는 것처럼 이 둘은 어디를 가나 공존하는 것 같습니다.

 

믿음은 의념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하시면 수련할 때 오히려 동력을 얻게 되는 우주적인 힘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생각의 각도에서 나오는 차이일 것입니다.

 

201972일 화요일

 

청아당 엄 상 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