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주천 현상은 텍스트대로 오지 않을 수도 있다 – 빅데이터의 필요성
박○현 도반님
“지금까지 오해했던 게 영통개안과 깨달음은 동시에 다가오는 걸로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책을 보면은 이런 현상 없이 깨달았다는 분들 이야기가 많아서 의문을 가진 적도 있었습니다.
이제야 수련자 상황에 따라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는 걸로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생각해보니 마음가짐에 따라 나타날 수 있는 현상 같습니다.
단의 완성에서 보면 간절한 염원을 하면서, 묵산 도반님 글을 보면 신성함
을 느끼는 상황에서 체험이 된 걸로 보이는데 저 또한 그 현상이 일어나기 전
에 인체전자석을 연상하다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 대해서 깊은 공감과
감동이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수련자의 심적인 부분이 에너지적으로 연결되면서 체험이 되는 현상 같기도 합니다.
현상적 측면이 강하니 깨달음 전후로 체험할 수도 있고 체험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대주천도 동일한지 궁금합니다.”
묵산 도반님
“전통 선도서에서 보면 주천화후(周天火候)라는 것이 있는데, 대주천 직전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하지만 이것을 경험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건너뛰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희한하게도 필자는 대주천 직전에 이를 경험 했었는데, 2~3일 간격으로 마치 한여름에 뙤약볕 밑에 서있는 것처럼 뜨거운 열기가 전신에 퍼지는 현상이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갑자기 시작된 이 뜨거운 열기에 의아했지만, 전에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크게 놀라지는 않았던 것이다.
단지, 외부에서 이 열기를 식힐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약간 당황하였다. 내부에서부터 타들어가듯이 생겨나는 뜨거운 열기이다. 비물질인 생명에너지의 열기이니, 식혀줄 방법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며칠 지나 대주천을 경험하였는데, 이번에는 뙤약볕 정도가 아니라 한 여름날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 바닥에 머리를 사정없이 찧는 듯한 충격이 전해졌다. 그리고 굉음과 함께 생명에너지가 두정을 뚫고 솟구쳐 올랐다.
이 때 백회부위(두정)를 만져 보았는데 조그마한 혹 같은 것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왔다 들어갔다 할 때 마다 자지러지듯 통증이 찾아 왔지만, 이 얘기도 전통 선도서 등에 가끔 등장하는 내용이라 그냥 잘 참고 넘겼던 것 같다. 즉, 두정이 돌출되는 현상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이렇게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현상은, 생명에너지가 두정이나 피부의 기공을 잘 통과하지 못해 생기는 일종의 저항열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즉, 단전호흡 수련시 대주천 직전에 주천화후의 경험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원인은 생명에너지의 축적(밀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생명에너지가 풍부하면 이러한 단계를 넘어가 버리고 바로 대주천을 경험하는 것이고, 그것이 부족하면 천천히 단계별로 일어나는 현상을 모두 경험한다고 볼 수 있다.
조식 수련으로 완만하게 생명에너지를 축적하면, 주천화후 현상이 있을 때 시일이 오래 걸리고 무척 고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 열기를 식혀주기 위해 눈밭이나 물속에서 수련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래도 시일이 상당히 걸리고 뜨거운 열기 때문에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튼 이러한 현상을 경험하더라도 부작용은 아니니 혹시 경험하더라도 걱정하지 말기 바란다.”
필자의 경험(1986년)
“吸 60초 止 120초 呼 60초 止 60초를 행하고 흡 60초 지 10분 이상 호 80초 지 90초를 행하니 대우주의 굉음이 신비롭게 펼쳐진다.
고통의 극치를 넘어선 순간 평안과 고요의 묘연한 현상이 영혼의 숨결을 타고, 신비의 생기를 머금은 체 펼쳐졌다.
영통개안의 일부인 일출의 현상이 상단전을 감싸며 나의 의식을 잠재우며, 현상적인 진리와 목적적인 진리의 관계로 어우러져 완성된 진리로 화하여 갔다.
서서히 우주의 대광명으로 확장되어져 그의 빛은 온 우주의 어둠을 밝게 비쳤다.
벽해의 푸른 생명이 고요로이 넘실거리고, 우주 대광명의 밝은 불꽃이 의식의 전부를 잠재워 갔다.
우주 대광명의 불꽃이 나의 의식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 순간, 영겁의 시간이 흐름 없이 정지해 있고 정지하고 있는 가운데 현묘의 태동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시간은 더 이상 구할 것도 바랄 것도 없는 무극으로의 귀일인 것이다.
그러한 시간이 서서히 탈바꿈되어져 상단전에 활활 타오르는 불꽃으로 휘황찬란하게 펼쳐졌다.
상단전에 위치한 니환궁을 묵중한 느낌으로 감싸면서 영혼의 불길로 화하여 갔다.
기쁨의 숨결이 흐르는 가운데 영혼의 불꽃은 끊임없이 대광명의 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기쁨과 환희가 어우러지는 가운데 영혼의 숨결로 무르녹아 들었다.
잠시 후 나의 몸은 투명한 우주의 막에 의해 휘광으로 감싸였다.
우주의 강력한 기압으로 인한 자장파는 나의 몸을 휘감아 그대로 공중을 향하여 솟아오르려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순간이 지속되어지면서 팽팽한 연결력을 갖고, 우주의 물결과 하나가 되었다.
나의 주변에는 신비의 일렁임으로 인한 분위기만이 연면히 흐르고 있었다.
푸른 우주의 물결을 타고 공중에 떠 있는 듯 나의 의식은 허공에 머물러 무한한 율동에 깊이 젖었다.
우주의 세계를 소요하고 있는 듯한 부양감속에서 잠시 눈을 떠 보았다.
나의 몸은 바위위에 최고의 안정된 자세로 굳어 있었다.
시야에는 큰 바위가 버티어 서고 하늘에는 뜨거운 태양이 나의 몸에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등 뒤에는 생기를 머금은 푸른 솔방울이 푸른 입김을 내뿜고, 가끔씩 봄바람에 실려 오는 향기만이 나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청정무구한 청량산 속에서 심청사달(心淸事達)의 경지를 뛰어넘은 지고한 우주의 세계에 깊이 스며 든 것이다.”
『청아당단전호흡』 – 대주천
대주천(大周天)이란 내부에 축적된 단의 불꽃이 두정을 뚫고 화산처럼 분출하는 과정을 말한다. 대주천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경락유통을 철저하게 행해야한다. 경락을 유통시킬 때 의무적으로 소주천과 전신주천을 유통시켜 준다. 수련이 깊어질수록 에너지덩어리는 점차 밀도 있게 형성되고 내부에선 뜨거운 열기로 넘쳐난다. 그렇다고 뜨거워서 죽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수련을 하는 과정에서 내성이 길러지기 때문에 그런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소주천 경로를 따라 에너지덩어리를 이동시킬 때 중요혈을 통과할 때마다 뭉클거리는 느낌이 강하게 들것이다. 다시 말하면 몸 안에 강한 생명력을 가진 투명한 물체가 경혈을 뚫고 거세게 꿈틀거리며 각 중요혈을 무섭게 돌진하는 형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특히 회음혈과 장강 그리고 상단전 인당(니환궁)과 중단전 구미부분에서 가장 크게 에너지의 힘을 느낄 것이다. 에너지의 힘이 크면 클수록 집적능력은 커지고 영적으로 승화될 수 있는 길이 빨리 열린다. 정력을 아껴 기화(氣化 ; 액체가 기체로 바뀌는 현상. 기체화.)상태로 만들다보면 영적으로 승화되는 길도 그만큼 빨라진다. 실제로 정력과 인체전자석의 원리에 의해 우주의 기와 혼융되어 경락을 유통시키고 있다.
요가에서는 챠크라라는 말로 통용되기도 하는 에너지덩어리가 절정에 다다르면 단의 불꽃이 불기둥을 일으키며 두정을 뚫고 몸 밖으로 치솟는다. 마치 거대한 에너지덩어리가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이해가 안가면 화산이 폭발하는 모습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실제로 활화산처럼 내부의 에너지가 불기둥을 일으키며 폭발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얼마나 장쾌하고 우주적인 느낌을 받는지는 직접 체험해보면 알 것이다. 그만큼 내부에서 감당하기 힘든 전율과 통쾌한 리듬을 타고 지상 최대의 황홀한 경지에 드는 것이다.
저 같은 경우는 묵산 도반님 말씀처럼 홍태수 회장님과 비슷하게 둘 다 동시에 온 것 같습니다.
영통개안이 먼저 일어났고 대주천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깨달음과 영통개안을 동일시하는 경우가 생겨나는 것은
영통개안이 깨달음이 아닐까하는 생각에서 비롯되어진 것 같습니다.
현상과 깨달음은 다릅니다.
현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깨달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현상은 강렬하다면
깨달음은 보이지 않는 손길에 의해 강하게 한대 얻어맞은 기분입니다.
대주천 현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깨달음과 영통개안이 다르듯이
대주천 현상도 그 모양 그대로
똑같이 나타나라는 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호흡법과 마음가짐에 따라
다 다르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묵산 도반님의 말씀처럼
“홍태수 교수님의 저서에서 소개되고 있는 영통개안 현상은
노을현상, 대주천 현상, 내적인 깨달음이 한 번에 터져 나온 경우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모두 별개의 현상으로 경험했습니다.
각성은 불안정해도 각성입니다.
무협소설의 주인공들이 대개 처음에는 불안정한 각성을 경험하는 것으로 볼 때
예술적인 시야로 보면 오히려 이것이 더욱 가치가 있다고 느끼나 봅니다.
깨달음도 퇴적층이 생기듯 그렇게 키워 가면 될 것입니다.
홍태수 교수님의 입장에서는 명백한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 맞습니다.
자신의 경험이 그런 식으로 진행되어 갔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이런 경험들이 하나둘 나와서 빅데이터가 될 수 있다면
깨달음에 대해서 유연한 해석이 많이 생길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깨달음을 현실로 끌어내려야 하는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그동안 제공된 텍스트대로
똑같이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씀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단계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별안간 대오각성하듯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기에
그 방법이나 절차에 따라 수련자마다 상이하게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동양적인 사고권에 갇혀 살고 있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결과를 분석해보면
서로 다른 모양으로
저마다 다 다른 현상들을 경험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드시 똑같은 현상을 경험하거나
순차적으로 단계를 밟아나가면서 나타난다거나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현상이나 깨달음은 동시에 나타나기 보다는
비순차적인 즉 임의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간 또한 다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언제 어떠한 방식으로 나타날지에 대해서는
본인이 주의 깊게 관찰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현상을 인지 못한 채 지나가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대주천이나 영통개안을 경험했는데도
지도자나 조언자가 지적을 안 해주면
자신은 그러한 현상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긴가민가하면서 그냥 지나치게 된다는 점입니다.
분명 경험을 해놓고도
자신은 경험을 하지 않았다고 우기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호흡만큼은 홀로 하는 것이 위험하기도 하지만
누가 그러한 현상에 대해 지적을 안 해주면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텍스트는 제공되어져야한다고 봅니다.
그것은 그 사람만의 독특한 현상이자 경험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경험치가 축적되어져 나가기 때문에
묵산 님의 말씀처럼 빅데이터가 축적되는 경우라 할 것입니다.
빅데이터가 많이 축적될수록
그 다음 수련자가 이해하기는 쉽지만
수련자에게는 혼란의 원인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텍스트는 많이 제공되는 것이
오히려 비교분석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다가오기 때문에
지도자나 수련자에게 다 같이 도움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도반님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바라고 있는 것도
저만의 경험보다는 도반님들의 또 다른 경험치를 통해
더 많은 것을 객관화시키기 위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저만 옳다고 주장하기보다는
제가 경험하지 못한 것들
제가 알지 못한 것들을 최대한 많이 수집해서
빅데이터화 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그리고
왜 나에게는 그런 현상이 발생하지 않는가? 라는 의문이라든지
이를 토대로 자신의 현재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에
더욱 이러한 작업은 필요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의 관습이나 관례에 따라 영통개안이나 대주천의 현상이
기존의 모양대로 나타나야만 한다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다만 제공된 텍스트는 참고자료로 사용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전에도 말씀 드린 적이 있지만
의사가 진단을 내리려면 각종 데이터를 분석하거나
새로운 방법을 강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구나 이것이 희귀병이라면 이러한 작업은 더 복잡해집니다.
호흡수련시 나타나는 현상도 다 같은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스케치하고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아이디어를 다듬고
분석을 통해 해석하기에 이르기까지
접근법에 있어서는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를 얼마나 잘 효율적으로 수행해내느냐가 관건이라고 봅니다.
2018년 8월 5일 일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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