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되는가?
그림이 문제다.
관찰에서 제공된 사실화(그림 - 난이도 없음)가 문제고
가추에서 제공된 사실화(그림 - 난이도 있음)가 문제다.
그리고
관찰자인 내담자가 문제다.
보는 관점이 다 다른 것이다.
관찰을 하라고했는데 가추를 하는 사람이 있고
가추를 하라고했는데 관찰을 하는 사람이 있다.
또는 관찰과 가추를 혼합해서 하는 사람도 있다.
관찰을 하라고 3분 동안 시간을 주었다.
관찰시간이 끝나고 관찰한 내용에 대해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을 해보라고 한다.
어떤 관찰자(내담자)는 벙어리 냉가슴만 앓고 있고
어떤 관찰자(내담자)는 관찰한 내용에 대해 2~3개만 이야기하고
어떤 관찰자(내담자)는 관찰한 내용에 대해 3~5개만 이야기하고
어떤 관찰자(내담자)는 관찰 대신 가추를 하고
어떤 관찰자(내담자)는 관찰과 가추를 동시에 하기도 한다.
30여명이 모여 있는데
여기서 손을 든 사람은 5명 정도밖에 안 된다.
나머지는 침묵을 지키거나 중용의 도를 실천하는 관찰자다.
이번에는 가추를 하라고 5분 동안 시간을 주었다.
가설을 세운 후 추론하라고 시간을 조금 더 준 것이다.
어떤 관찰자(내담자)는 고개부터 젓기도 하고
어떤 관찰자(내담자)는 대부분 눈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사실화를 바탕으로 관찰과 가추를 하라고했더니
제대로 읽어내는 관찰자(내담자)가 없다.
가추를 하기 위해서는
수학적 사고와 철학, 과학, 물리학, 예술적 상상력까지 동원해야하기에
쉽게 추론을 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시간 관계상 대신 교수자가 설명을 마치고 말았지만
관찰과 가추는 생각보다 쉽지 않아 보였다.
깨달은 자가 우주를 보는 눈이 이렇게 다 다른 이유는 별개 아니다.
바로 관찰과 가추의 차이에서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화인 그림을 놓고
관찰과 가추를 하라고했는데도
전혀 다른 각도의 시선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면
지구보다 더 넓고 광활한 우주에서
그 무엇을 본들
그것이 진실이 아닌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보는 것이 진실이요
느끼는 것이 진실이요
만지는 것이 진실일 것이다.
비록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온다할지라도
적어도 보고 느끼고 만질 때만큼은
진실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왜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되는가이다.
홍시 맛이 나면 다함께 홍시라고 하면 되는데
유독 한사람만 홍시 맛이 난다고 하는가 이 말이다.
특별하게 영감이 발달된 사람들이 있다.
특히 수련자 중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무언가에 끌려서 수련에 입문했기에 더욱 그러하다.
보는 시각이 다 다른 것이다.
보는 관점이 다 다른 것이다.
더 이상 보태거나 뺄 것이 없다고 말하는데도
더하거나 빼버리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있는 그대로 들으라고 하는데도 소용이 없다.
왜 다른 관점으로 보고 있는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아는 만큼 보고
보이는 것만큼 보기 때문이다.
2018년 8월 4일 토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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