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에 대해 갈등이 생길 때 - 보다 진화된 깨달음에 대한 정의
깨달음에 대한 기준은 명확하지가 않다.
대부분 지도자와 수련자 간에 발생하는 일이다보니
주관적이자 비논리적인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텍스트에 제공된 기준이 될 수도 있고
텍스트에 없는 기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도자와 수련자 간에 끊임없이 소통하며 주고받을 때는
그나마 조금 낫지만
단절이 되거나 불통이 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수련자 스스로 판단을 내릴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수련자는
텍스트에 제공된 기준에 맞춰 판단하려는
오류를 범하기 쉽기 때문이다.
수련자에게는 그것이 전부이기에
오로지 주어진 텍스트에 충실하려는 행동을 취하기 때문이다.
깨달음에 대해 접근하는 방법은 많다.
똑같은 사물을 놓고
저마다 판단하는 것이 다 다르듯이
접근하는 방법도 다 다르기 때문이다.
비록 텍스트로 제공된 기준이 맞다할지라도
수련자마다 개성이 다 다르다보니
반드시 제공된 기준에 맞아야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수련자는 기준에 맞지 않아도 인정해주는 경우가 있고
어떤 수련자는 성실하게 노력해도 인정해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깨달음에 대한 기준은
다른 것을 보는 것이 아니다.
사고의 유연성과 창의성을 보는 것이다.
거기에다 지혜와 통찰력을 보고 있기 때문에
깨달음에 대한 기준이
저마다 다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현상적인 체험과 함께 나타난다면 금상첨화이겠지만
현상보다 더 중요한 것이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현상은 아무리 많은 것을 경험하거나 체험해도
그때 당시 잠깐의 신비로움으로 끝나지만
깨달음은 자기중심을 잡을 수 있는 근간이기에
참자아를 발견함과 동시에 중용의 도를 깨우칠 수 있는
지고한 우주적인 체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현상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신비에서 평범으로 귀화되는 잠깐의 현상이자
신상품이나 신제품 그리고 혁명에 가까운 놀라움에 대한 반김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깨달음은
우주적인 체험을 통해 고요의 극점에서
더 이상 들어갈 데도 더 이상 나올 데도 없는
우주의 가장 안쪽인 극점이기에
더는 바랄 것도 더는 소유할 것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는 명상에 들었을 때를 말하는 것으로
깨달음에 대한 정의를 말하는 것이다.
문제는
깨닫기 전이나
깨달은 이후에 발생하는 행동들이다.
성철스님 같은 경우는
평생을 통해 마음공부 하는데 소진하였다.
고고한 학처럼 살기위해 부단히 노력해온 분이다.
행위로 대변하기 위해 평생을 다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어떠한가?
교만이라는 단어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며
오히려 욕을 먹고 있지 않은가?
그밖에 기인행세를 해가며
평생을 방탕과 주색잡기에 여념이 없었던 선승들도
욕을 먹는 건 마찬가지다.
고고한 학처럼 행동을 해도 욕을 먹고
방탕한 생활을 해도 욕을 먹는다면
그 속에서 무엇을 찾아야할까?
둘 다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깨달음에는 정답이 없다는 점이다.
관점에 따라 다양한 부류가 존재할 수가 있고
과거에 깨달았다는 사람하고
현재 깨달았다는 사람하고
비교분석해보면
눈높이에 따라 더 많은 것을 깨달아야하는 것이
현재 깨달아야할 사람들이다.
날이 갈수록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이
깨닫고자 하는 수련자들이다.
지식이나 지혜는
눈높이에 따라 함께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발생한다.
과거에 깨달았다는 사람들의 지식이나 지혜만으로는
현재는 부족하게 보이기 때문에
미래에는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제공받고자하기 때문이다.
고고한 학처럼 사는 것도 문제가 있고
방탕한 기인처럼 사는 것도 문제가 있다.
이 둘의 조합 속에서 그 중간을 유지하며
사는 것이 깨달은 사람들의 삶이라고해도 좋을 듯 싶다.
이제는 하루하루가 급변하고 있어
지식이나 정보를 쫒아가기에도 바쁜 시간이다.
거기에다 전문지식을 습득하기위해선
각고의 노력 없이는 힘든 일이기에
날이 갈수록 어깨만 무거워지고 있다.
그래서
깨닫기 위해서는 새로운 정보를 계속해서
전달받아야하는 입장에 처하기도 했다.
인간의 기술이나 지식에 혁명이 발생하고 있는 까닭에
새로운 정보에 눈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3차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도래할 4차 산업혁명은 ‘초연결성(Hyper-Connected)’, ‘초지능화(Hyper-Intelligent)의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사물인터넷(IoT), 클라우드 등 정보통신기술(ICT)을 통해 인간과 인간, 사물과 사물, 인간과 사물이 상호 연결되고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등으로 보다 지능화된 사회로 변화될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단순히 사람과의 관계에서 끝나지 않고
인간과 인간, 사물과 사물, 인간과 사물(사물인터넷+센서)이 상호 연결되어지거나
빅데이터와 클라우드 컴퓨팅, 인공지능, 지능형로봇, 3D 프린팅, 신소재,
스마트 공장, 스마트 시티, 스마트 홈, 스마트 카, 바이오 융복합 기술(생체기술) 등으로
보다 지능화된 사회로 변화되어질 것으로 예측되어지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인체전자석과 단광기기의 실현이 다가올 수도 있기에
과거에 막연하게 생각했던
깨달음에 대한 낮은 수준의 깨달음의 벽을 허물어야 할 때가 된 것 같아
보다 진화된 깨달음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도출해내야 할 때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도 시대에 따라 변화해야한다고 본다.
올곧은 깨달음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대에 맞게 깨달음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기에
깨달음에 대한 사고도 유연해져야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갈 길이 많은 것이 깨달음의 세계다.
하지만
홀로 감당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지도자와 수련자, 수련자와 수련자 간에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어느 정도 감당해낼 수 있는 부분들이 많기에
크게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
홀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홀로 다 처리하려들기 때문이다.
힘든 것은 서로 나누어서 감당하면
그것처럼 보람되고 알찬 일은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 서로에게 정보를 제공하거나 제공받으면서
끈끈한 인연을 맺었던 시절을 생각해보면
참 뿌듯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는 정이라는 것이 살아 움직였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을 깬 사람이 바로 필자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큰 죄를 진 것 같다.
한창 무르익었을 수련에 찬물을 끼얹었던 것이다.
다시는 그러한 불씨를 살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석고대죄해도 모자란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바로 그 점 때문이다.
사람 사는 곳에서 정을 빼놓으면
그것처럼 삭막한 것도 없다.
정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것이 지식이 되었든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든
그 어느 곳에서도 필요한 것이 유익한 정보이기 때문이다.
지도자와 수련자 간에 정보를 주고받다보면
거기에서 배울 점이 더 많기에
소통의 부재나 단절은 참으로 뼈아픈 기억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깨달음에 대한 갈등이 생기는 것도
소통의 부재나 단절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기에
그로인해
고통과 상처받았을 많은 사람들을 위해
고개를 들 수 없는 것은 바로 이점 때문이다.
2018년 7월 31일 화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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