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하는 선악이란(전문1)3-3 / 인간의 심장위에서
그러니 가끔씩은
인간의 목숨을 담보로 장난을 치거나
상상할 수 없는 사건들을 만들어내어
인간의 새로운 세계를 펼쳐내도록 유혹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神은 인간에게
조건부 희생을 원하며
시련과 함께
일시적이면서도 감질 나는 선물을 제안하기도 한다.
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주변사람들을 힘들게 하거나
예기치 않게 사망에 이르게 하여
신의 뜻을 받들도록
가중치를 가하는 조건으로 거래를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나마 신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
어차피
앉아서 죽으나
서서 죽으나 매 한가지이기에
신의 뜻에 따르며
인간의 한계를 시험받고 있다.
위의 사례를 통해서 느낄 수 있겠지만
신이 관장하는
공존하는 선악의 미묘한 감각은
미세하기가 깃털보다 더 예민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도 신은 인간을 위해
최소한의 배려는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신의 속셈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은 신의 영역을 뛰어넘거나
성자나 도인처럼 초월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인간에게 종교가 필요한 것은
공존하는 선악의 시작이자 끝인 것처럼
인간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신의 세계인 종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인간과 종교와의 관계를 살펴보면
인간은 하늘의 뜻을 살피는 데에 있다면
하늘은 인간의 뜻을 살피는 데에 있다.
이는 하늘과 인간관계가
얼마나 끈끈하게 얽혀져있는지
단적으로 말해줌과 동시에
태초부터 인과관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욕망과 집착을 놓지 못한 채
채움과 비움 사이에서
쳇바퀴 돌듯이 돌고 있자
끝없는 채움을 비우게 하는
비움의 미학을 히든카드로 내놓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평안과 해탈의 경지를 깨닫게 하는 동시에
포용과 화해의 장을 펼쳐놓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비움 속에서
평안과 해탈의 경지를 느끼게 하면서
포용과 화해의 장을
마련해놓는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더구나
시기와 질투,
번뇌와 망상,
칠정과 팔정도를 내세우며
인간의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도
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이 속에서 행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보다는
그래도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희망이 보인다면
그것처럼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줄만한 것도 없을 것이다.
무에서 유로
유에서 무로
그리고
그 어느 곳에서도
이름 불리어지지 않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들을 살아가게 하는 이유가 되고
그것이
우리들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의 삶 때문에 발생한 일이요
우리들의 삶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근원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모든 것을 아우르며
무조건 신의 뜻에 따르기보다는
그래도 자신의 의지를 내세워가며
신과 함께 해낼 수 있다는
그런 자신감을 가지게 하는 것이 불교라고 볼 수 있다.
불교가 신의 뜻에 반하거나
자신의 의지대로 일어서고자 노력해도
기독교와는 달리 방관하며
오히려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굳이 불교의 매력을 찾으라고 한다면
바로 이러한 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현실세계보다는
현묘한 세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는 점이다.
참으로
깊고도 깊은 종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반해
기독교는
기다림의 종교!
순종의 종교!
즉
기다림과 순종을 요구하는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온전히 하나님을 위한 종교!
온전히 인간을 위한 종교!
이 둘을 빼놓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참으로 이해 불가능한 종교가
기독교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간절하게 원하면 이루어질 것이고
신이 간절하게 원하면 선택되어질 것이다.
이는 하늘의 도움 없이는
참으로 힘들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더구나
한 국가를 책임져야할 대통령을 선출하는 일이라면
하늘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함을 암시하기도 한다.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기름부음을 받은
사울왕의 핍박과
사선을 넘나드는 과정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따르고자 노력했다는 점이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끝없이 하나님의 뜻을 살펴가며 순종하는 것!
그리고 자연에 순응하듯
오로지 하나님께
자신의 고민이나 소원을 미리 물어보는 것!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에 대한 소식이 올 때까지
끝없이 기다리거나
하나님의 시간표에 맞춰 움직이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 얼마나 무모하고 맹신적인 모습인가?
하지만
종교의 오묘한 세계는
그 누구도 단정 지을 수 없다는 점이
그동안 경험해온 사람들의 한결같은 목소리이다.
그래도
기독교는
용서와 사랑을 바탕으로
형성된 종교이다 보니
일상에서 생활화되어있는
종교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
단점 없는 것은 없듯이
종교 또한 단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다.
인간이든
신이든
공존하는 선악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복원력에 의해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으려는
선과 악의 균형추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은 선의 역할이 있고
악은 악의 역할이 있듯이
선과 악은 자극하는 역할을 해낼 수도 있고
선과 악은 견제하는 역할을 해낼 수도 있다.
선이 영원히 가는 법도 없고
악이 영원히 가는 법도 없다.
그러고 보면
공존하는 선악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기 위해
중용의 도를 즐겨하고 있으며
선을 도우기도 하고
악을 도우기도 하면서
적당한 때를 기다려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건 그렇고
이로 인해 유추해보면
그 무엇보다도
기도에 대한 대가를 원하거나 치러야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지간에
그에 상응한 희생을 치러야한다는 점이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원죄를 따지지 않고
조건 없이
인간이 원하는 소원대로
모두 다 들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신은 바로
이러한 점을 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절박한 삶을 이용하여
조건을 내걸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실제로
삶만큼 힘든 일이 또 있겠는가?
어떤 때는
죽음보다 더 힘든 것이 삶이지 않은가?
그렇지만
조건을 내건 만큼
기도에 대한 응답을 해주고 있지 않은가?
먼저 알아야할게 하나 있다.
그 모든 것은
지극한 정성으로 하늘을 감동시켜야하듯이
기다림과 정성 없는 기도는
효력이 없음을 알고가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기다림과 순종하는 마음만 살아있다면
그 무엇이든 해주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답답한 것은 인간이지 신이 아니지 않은가?
원한다면 신의 뜻대로 하면 될 일이요
원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뜻대로 하면 되지 않겠는가?
이 모든 것은
인간의 마음에 달려있으니
인간의 뜻대로 하면 되지 않겠는가?
더 이상 신의 뜻을 물어서 무엇 하겠는가?
차라리 팔베개나 하며 드러눕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이제 더는 묻지 말고
마음가는대로 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건 그렇고
잘잘못을 떠나서
주어진 상황에 따라
선하게 행동하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선입견 때문에 그럴 수 있고
악하게 행동하면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선입견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 둘은
늘
기로에 서서 눈치만 보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집처럼 선을 달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자신의 집처럼 악을 달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어쩌면
공존하는 선악은
운명처럼 사람들의 뒤를 쫓아다니며
선을 행하라고 채찍을 가하거나
악을 행하라고 채찍을 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선을 행하면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거나
악을 행하면 잘못했다고 질책을 하기도 한다.
이 얼마나 곤란한 상황인가?
선을 선이라 말해야하는데
악을 악이라 말해야하는데
현실에선
선을 행하다가 악을 행하기도 하고
악을 행하다가 선을 행하기도 한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라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제 고민하지 말자!
선을 행하고 싶으면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고 싶으면 악을 행하며 살자!
다만
그에 합당한 인과응보가 마련되어져 있고
그에 합당한 안전장치가 마련되어져 있기에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죗값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기에
마음 놓고
선을 행하고 싶으면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고 싶으면 악을 행하면 된다.
그러고 보면
공존하는 선악이야말로
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인간의 심장위에서
마음껏 뛰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17년 4월 19일 수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오늘 올린 詩』 > 『오늘 올린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담숲(발췌본) - 구름도 쉬어가는 곳 (0) | 2017.04.29 |
---|---|
화담숲(전문) - 구름도 쉬어가는 곳 (0) | 2017.04.27 |
공존하는 선악이란(전문1)3-2 / 인간의 심장위에서 (0) | 2017.04.25 |
공존하는 선악이란(전문1)3-1 / 인간의 심장위에서 (0) | 2017.04.25 |
라일락 향기가 진동하는 센트럴파크 (0) | 2017.0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