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공존하는 선악이란(전문1)3-2 / 인간의 심장위에서

청아당 2017. 4. 25. 16:59

공존하는 선악이란(전문1)3-2 / 인간의 심장위에서

 

물론

종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공존하는 선악을

선택하거나 무시할 수 있겠지만

결국에는

공존하는 선악의 테두리 안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이는 절대자조차

공존하는 선악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이 죄를 짓도록 방관하거나

방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다.

성자든

현자든

절대자이든

더구나

우주와 자연조차 죄를 짓는다.

 

 

누구나 잘못을 할 수 있다.

잘못을 했으면 용서를 빌면 될 일이고

잘못을 안했으면 칭찬을 들으면 될 일이다.

 

그런데

잘못을 인정하면 간단한데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것처럼 복잡하고 추한 것도 없다.

 

문제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데에 있는 것처럼

용서와 화해 등

이 모든 것은

잘못을 인정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선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반드시 선이 좋다고만 볼 수는 없다.

반드시 악이 나쁘다고만 볼 수는 없다.

 

이 둘은 공존하는 선악처럼

동시에 존재하거나

어느 한쪽으로 기울 때

그 진가를 발휘하기에

어떤 때는 동적인 측면에서 좋은 것이고

어떤 때는 정적인 측면에서 좋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파면되거나 구속되어도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끝까지 부정하거나 부인하며

무죄를 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자신이 지은 죄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똑같은 상황인데도

기준에 따라

죄가 되기도 하고

죄가 안 되기도 한다.

 

이는 상대에 따라

또는

정치적인 의도에 따라

음해성 논란으로

접근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신이 관장하는 공존하는 선악은

장난 끼가 많다고 볼 수 있다.

 

단 한시도

기뻐하는 꼴을 못 보고 있는 것이다.

행복해하는 꼴을 못 보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질투의 신인 것이다.

 

인간을 일희일비(一喜一悲)하게 만드는

야비한 신이기도 하다.

 

어떻게 하면

이해와 화해를 시키려드는 것이 아니라

이간질과 대치상태를 만들어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함정에 빠뜨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우주대폭발을 일으키는 빅뱅처럼 천지를 요동치게 하거나

잠시의 평화를 뜻하는 태풍의 눈처럼 편안함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허리 좀 펴고 다리를 펴려는 순간

빈틈을 주지 않고 곧바로 공격이 들어오기도 한다.

 

그리고

서로 피터지게 싸우게 하거나 대립하게 만들기도 하고

언제 그랬느냐싶게

고요를 통해 안정을 도모하게 하거나 친목을 다지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공존하는 선악은

분노를 일으키게 하거나

잠시도 한눈팔 시간 없이 긴장시키는

못된 심성도 지니고 있다.

 

그러고 보면

신의 장난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교묘하기도 하고

인간이 살아있는 한

긴장감을 늦출 수 없도록

감시하고 관리하는데 그 목적과 의무가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