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영월 선돌-단종과 엄흥도 그리고 김삿갓

청아당 2013. 8. 7. 12:05

영월 선돌-단종과 엄흥도 그리고 김삿갓

 

풍류를 즐긴다는 것은

기쁨을 즐긴다는 것이고

기쁨을 즐긴다는 것은

행복의 깊이가 무엇인지를 안다는 뜻이다.

발아래로 펼쳐진 선돌 즉 입석(立石) 뒤로

서강(西江)의 푸른 물과 층암절벽이 흐르는 곳에

청령포가 자리하고 있어 단종의 애환이 여기까지 들린다.

동쪽에 있는 것은 동강이고

서쪽에 있는 것은 서강이라 불리며

동강과 서강이 만나 남한강이 되어 흐른다고 한다.

선돌을 지난 서강은 동강과 만나

충주를 거쳐 한강으로 흘러간다고 한다.

그리고 우뚝 솟은 선돌의 또 다른 이름은

신선암(神仙岩)으로 통하기도 한다.

높이가 70m이자 두 갈래로 갈라져있는

장엄하면서도 웅대한 선돌은

청령포를 향해

아침저녁으로 안부를 묻기도 한다.

아마도 하늘이 먼저 알고

서있는 돌 선돌을

미리 갈라놓지 않았나하는 의구심이 든다.

마치 어머니와도 같고 아버지와도 같고

형제자매와도 같은 곳이 선돌이고 보면

어린 나이에 유배당한 단종의 애환을

그나마 감싸주었던 곳이 선돌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신선조차 선돌에 내려와 놀다간 곳이라고 하니

그 든든함은 천하를 흔들고도 남는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선돌 아래동네 남애(南涯)마을에 장수가 태어나 적과의 싸움에서 패하자 이곳에서 투신하여 자라바위가 되었다고 하며 선돌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면 한 가지씩 꼭 이루어진다는 설화가 전하여 오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인 1820년(순조)에 영월부사를 지낸 홍이간(1753~1827년)과 뛰어난 문장가로서 풍류생활을 즐기던 오희상(1763~1833년), 홍직필(1776~1852년) 등 세사람이 구름에 쌓인 선돌의 경관에 반하여 시(詩)를 읊으면서 선돌의 암벽에다 「운장벽 雲莊壁」이라는 글자를 새겨놓고 붉은 주색(朱色)을 칠한 것이 지금도 남아있다.

 

그러고 보면

소나기재에 걸터앉아있는 선돌이기에

단종의 왕릉인 장릉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면

이 또한 소나기재를 거쳐야만 편안하게 도착할 수가 있다.

 

소나기재의 유례를 살펴보면

단종이 폐위당한 후 유배를 올 때

이 고개에서 소나기를 만났다고 해서 소나기재라 불리었다고 한다.

 

간다는 것은 떠나는 것이요

온다는 것은 바람이 움직인다는 뜻이기에

거친 황야를 달려가는 천리마처럼

그 뜻이 깊고

그 뜻이 높고

그 뜻이 낮아야만 이룰 수 있기에

우리들의 소원이자

우리들의 기원인 영월 땅을 통하여

하늘을 향해 손짓을 해보기도하고

땅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보기도 하면서

하늘이 내린 땅 영월에

상서로운 기운이 곳곳에 스며들기를 바라고 있다.

언제든 달려갈 수 있는 곳

언제든 서있을 수 있는 곳

언제든 잠들 수 있는 곳이자

언제든 깨어날 수 있는 곳이기에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들며 생명의 깃발을 높이 치켜세운다.

아, 이곳이 충절의 고장이자 영월 엄씨의 식읍이기에

단종과 호장 엄흥도(嚴興道)가 살아 숨 쉬는 곳이자

역사가 살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위선피화(爲善被禍)면 오소감심(吾所甘心)이라

착한 일을 하려다가 화를 입는다 해도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하겠다.

 

이로 인해 살아생전 역모로 몰리면 3대가 화를 입지만

시조 묘를 비롯하여 9대가 화를 입은 것이

단종 왕과 호장 엄흥도와의 기구한 운명이자 인연인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사는 것이기에

산다는 것은 죽는 것이기에

오가는 길목에서

안부를 묻거나 손을 흔들 수 있는 여유만 있다면

언제든 함께 어울려 손을 잡고 달릴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단종과 조선의 충신 엄흥도 그리고 풍자 시인으로 유명한

시선(詩仙) 난고(蘭皐) 김병연(金炳然 1807(순조7)~1863년(철종14))이자

방랑시인 김삿갓이 있어

영월의 명성이 더욱 빛을 발하고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엄흥도(嚴興道) 정여각(旌閭閣)(영월군)

영조 2년에 엄흥도의 충절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유래에 대해 살펴보면

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고 17세의 나이로 관풍헌에서 승하한 단종의 시신을 영월 엄씨들의 선산인 동을지산(冬乙旨山)에 몰래 매장하였다. 영조 34년(1758)에 공조판서로 추봉되었고 순조 33(1877)에 충의공이란 시호를 받았다. 고종 16년 (1879)에 비문의 앞면을 고쳤다.

엄흥도 : 시호 충의(忠毅). 영월(寧越)의 호장(戶長)으로 있을 때, 귀양살이하던 단종(端宗)이 세조에 의하여 죽자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시신을 거두려 하지 않는데도, 관까지 준비하여 장례를 치르고는 몸을 숨겼다. 현종 때 송시열(宋時烈)의 건의로 그의 자손이 등용되고, 영조 때 충의(忠義)를 기리는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뒤에 공조참판이 추증되고, 영월의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되었다.

 

엄흥도기념관

의를 행하기 위함이라면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영월 호장 엄흥도를 기념하는 곳입니다. 단종 임금님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승하하셨을 때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고 시신을 수습한 사람이 바로 엄흥도입니다. 아들들과 함께 단종 임금의 시신을 수습한 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숨어 살았기 때문에 직접 사용한 물건들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위선피화(爲善被禍) 오소감심(吾所甘心)”

“착한 일을 하려다가 화를 입는다 해도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하겠다.”

 

왕방연은 사약을 들고 차마 단종의 처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머뭇대자 나장이 재촉했다.

“ 어명이오.”

단종은 관복을 갖추고 금부도사에게 까닭을 물었다.

“ 금부도사가 또 어인 일인가?”

왕방연은 말도 못하고 뜰에 엎드려 흐느낄 뿐이었다. 

단종 곁을 시중들던 공생(貢生)이 공을 세워볼까 금부도사도 하지 못하는 일을 자청했다.

공생은 활시위로 올가미를 만들어 '문틈 뒤로 올가미를 단종의 목에 걸어 힘껏 잡아 당겼다.

단종은 비명을 질렀다. 

1457년 10월 24일 단종의 나이 17세, 무거웠던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장릉지』에 전하는 단종의 자규시(子規詩=소쩍새 시) 한 수 

一自寃禽出帝宮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일자원금출제궁)   에서 나온 뒤로

孤身隻影碧山中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고신척영벽산중)   푸른 산속을 헤맨다.

 

暇眠夜夜眠無暇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가면야야면무가)   이루고,

窮恨年年恨不窮    해가가고 해가와도 한은 끝(궁한년년한불궁)   이 없구나.

 

聲斷曉岺殘月白    두견새 소리 끊어진 새벽,(성단효령잔월백)   멧부리엔 달빛만 희고,

血流春谷落花紅    피를 뿌린 듯 한 봄 골짜기에(혈류춘곡낙화홍)   지는 꽃만 붉구나.

 

天聾尙未聞哀訴    하늘은 귀머거린가? 애달픈(천롱상미문애소)   이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는지.

何乃愁人耳獨廳    어쩌다 수심 많은 이 사람의(하내수인이독청)   귀만 홀로 밝은고!

 

원통한 새가 되어 제궁을 나오니

외로운 그림자 산중에 홀로 섰네.

밤마다 잠들려 해도 잠을 못 이루고

해가 가고 해가와도 한은 끝없어라

두견새 소리 그치고 조각달은 밝은데

피 눈물은 흐르고 골짜기에 지는 꽃은 붉구나.

하늘도 저 슬픈 하소연을 듣지 못하는데

어찌하여 시름 젖은 내 귀에는 잘 들리는가.

- 단종의 「자규시」

 

2013년 8월 5일 월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