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여왕 5월
새싹이 돋아나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자신을 내보이기위한 것도 아니고
자신을 남다르게 표현하기위한 것도 아니다.
바람은 부는 데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바람이 없으면
걸어야할 길도 없는 것이다.
눈을 감았다 떠보면
날마다 새로운 길이 열린다.
속초 척산 온천에서 설악산을 가로지르는 목우재터널(2005년 12월)이 그렇고
백담사를 가로지르는 미시령터널(2006년 6월 중순)이 그렇다.
전에는 걷지 못했던 길이었지만
지금은 걸을 수가 있는 것이다.
대관령 옛길만큼이나 험난한 미시령고개를 넘어야하지만
달빛에 떠있는 울산바위를 좀 더 가까이 대하며
터널로 지나가면 되는 것이다.
과거에는 그토록
꿈을 꾸었지만
이룰 수가 없었다.
꿈을 꾼다는 것은
그래서 좋은 것이다.
꿈은 도전을 하도록 유도하고
도전은 꿈을 현실로 옮겨놓는다.
변화가 사람들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이 변화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수백 아니 수천 년 동안 불편을 감수해온 인내심보다는
단 하루를 살더라도 편리하고 격조 높게 살고 싶은 것이다.
과거에 매달려 사는 사람들은
과거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현재에 매달려 사는 사람들은
현재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미래에 매달려 사는 사람들은
미래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개성대로 살아가야할 의무가 있다.
과거가 좋으면
과거를 향해 살아가면 되고
현재가 좋으면
현재를 향해 살아가면 되고
미래가 좋으면
미래를 향해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과거에 산다고 해서 현재나 미래를 보지 못하는 것도 아니요,
현재에 산다고 해서 과거나 미래를 보지 못하는 것도 아니요,
미래에 산다고 해서 과거나 현재를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닌데
자꾸만 경계를 지으려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자신하나 간수하기 힘든 현실에서
무엇을 위할 수가 있겠는가?
계절의 여왕 5월은
과거, 현재, 미래가 합성된 작품이다.
새싹이 눈을 뜨지 않는다면
봄은 오지 않을 것이고
따뜻한 날씨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새싹은 더 이상 자라나지 않을 것이다.
하늘아래 같은 강원도 땅이라 해도
기온의 차이에 따라
푸름의 정도가 다르듯이
만물은 제각기 개성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속초앞바다가 보고 싶으면
차를 몰고 영동고속도로를 향해 달리면 만날 수 있듯이
관심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행복이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껴안으려고 하면 안 된다.
자신이 감당할 정도만 느끼며 사는 것
이것을 뛰어넘을만한 혜안은 없는 것이다.
전설적인 신화에 매달리거나
없는 것을 만들어 살기 보다는
자신의 믿음대로
도전하며 사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은가?
성자들이 살던 시대에도
혼란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이다.
지금이라고 별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숨겨진 재능을 감추어두지 않고
좋은 스승을 만나
함께 재능을 키워나가는 것
이것만큼 아름다운 일도 없을 것이다.
계절의 여왕 5월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깊이 속에서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움 뒤에는
고통과 수고로움이 함께 하듯이
봄이 없다면
여름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꿈이 아닌
현실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손에 잡히지 않는 너머를 이해시키기보다는
손에 잡히는 현실을 이해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2008년 4월 30일 수요일
계절의 여왕 5월을 생각하며...
청아당 엄 상 호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