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정기신(精氣神) - 기(氣. 중단전)란?
논리적인 정(精)이 변하여 기(氣)가 형성되는 곳이 중단전이다.
기는 마음이 자리하는 곳이며 우주와 연결력을 갖고 언제든지 안과 밖을 드나들 수 있는 위치에 있기도 하다. 또한 느낌조차도 마음을 통하지 않는 곳은 없으며 마음이 통하는 곳에 느낌이 통하기도 한다.
중단전은 물리적인 정과 논리적인 기의 중간에서 중심을 잡고 중용의 위치에 서있지만 우주와 통한다는 점에서 신이 위치한 상단전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꽃을 피우기위해서는 줄기와 뿌리가 필요하듯이 중단전은 줄기에 해당되고 뿌리는 하단전 꽃은 상단전에 해당된다.
줄기는 뿌리와 꽃을 연결해주는 강력한 매체이며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연결시켜주는 운영체제에 해당되는 의념(넓은 의미에서 마음에 포함)과 같은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고 있다. 또한 컴퓨터에 있어서 운영체제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연결해주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의 건전한 만남을 위해 보다 많은 노력을 통해 속도감과 활용성면에서 항상 최첨단을 향해 달리고 있기도 하다.
만약에 마음(의념 포함)이 없었다면 이 둘의 만남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며 설령 만났다하더라도 건전한 만남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이웃에 살면서도 벽을 두고 사는 관계로 전락하고 말았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음은 서로의 인연을 찾아 적절한 관계가 되도록 중매역할(연결고리 역할)을 해주고 자신은 앞에 나서기보다는 뒤에서 음덕을 쌓는 것으로 만족하며 이 둘의 만남을 적극적으로 나서서 성사되도록 심혈을 기울이기도 한다.
중도를 지키는 일은 어떻게 보면 힘든 일이지만 마음은 이 둘의 만남을 위해 모든 정성과 성실을 통해 인과의 인연을 맺도록 발 벗고 나서기도 한다.
마음에 대한 속성을 분석하다보면 알다가도 모를 묘한 존재로 비치기도 한다.
마음은 잡으려고 하면 더욱 멀리 달아나고 놓으면 다가와 안부를 묻는 그 태생이 궁금할 정도로 갈피를 종잡을 수 없는 기상천외한 모습으로 다가서기도 한다.
옳은 일이더라도 마음이 옳지 않다고 하면 옳지 않고 옳지 않은 일이더라도 마음이 옳다고 판정을 내리면 옳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는 마음이 결정을 내리면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우선은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고 마음이 움직일 때마다 공존하는 선악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마음 가는 곳마다 자리를 함께하기도 한다.
마음이 존재하는 세상은 마음 따라 복잡다단해져가고 그 형상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모든 형상이 마음 먹은 대로 이루어지거나 흩어지게 된다. 이는 마음이 마음을 따라잡지 못하는데서 연유하기도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방랑끼를 갖고 태어난 마음이기에 한곳에 오래도록 머무르지 못하는 습성 때문이기도 하다.
많은 선각자들은 마음을 잡아두려고 하기 보다는 마음을 다스리는 쪽으로 의견을 모아 허공에 띄워놓고 원격조정장치인 리모컨으로 조정해가며 잡아두기보다는 마음이 지나다니는 길목(통로)에 앉아 통제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기도 하다. 마음을 잡겠다고 평생 방랑자처럼 떠돌아다녀보아야 손에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일찌감치 잡기보다는 조정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히는 것이 허송세월을 보내지 않고 현명하게 대처해나가는 일이기도 하다.
중단전은 구미 혈이라는 자리에 위치하면서 인사성 밝은 아이처럼 우주와 아침저녁으로 인사를 주고받기도 한다.
우주와 인사를 주고받는다는 것은 내면으로 통하는 데가 있다는 것을 말함과 동시에 음양의 이치가 기로 변하여 그 자체로 통하고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하기도 한다. 우주에는 기가 충만하고 전기성과 자기성을 지닌 기로 인해 깊이 잠든 고요를 깨우기도 하고 또 야생마처럼 날뛰는 형상들을 잠재우기도 한다. 고요한 듯 하지만 충동적이고 충동적인 듯 하지만 고요한 성질을 지닌 기이기에 그 향방은 예측할 수가 없다. 또한 나아가고 물러서는 법도 잊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기야말로 모든 만물의 근간에 서서 밑에서부터 위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다할 수밖에 없다.
중단전은 깨달음의 방이라고도 불리며 뿌리에서 줄기를 거쳐 상단전에서 꽃을 피우지만 그 본원적 깨달음은 의식이전의 세계인 마음에서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다.
가끔씩 중단전과 상단전의 위치를 바꿔야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위치상의 변화보다는 그 자리에서 내포하고 있는 뜻만 확실하게 알고 움직이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을 것 같다.
중단전은 위아래를 연결해야하는 중요한 임무를 띠고 있기 때문에 남모르는 고민에 빠져들기도 한다.
위아래를 오가며 연결력을 갖도록 주선하다보면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성 심인성 질환에 시달리기 딱 좋은 위치에 있기도 하다. 한두 번 잘못된 것을 짚어줄 때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계속해서 똑같은 실수를 자주하여 간섭해야할 일이 자주 발생한다면 아무리 우주 같은 마음을 지닌 중단전이라 할지라도 속으로는 응체되고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는 심인성 질환에 시달려야하는 고충이 생겨나기도 한다.
수련이 깊어질수록 중단전에 적체된 심인성 질환은 천년동안 쌓인 체증이 확 뚫리는 것처럼 말끔하게 가시고 기혈이 막혀 꼼짝달싹 못하던 환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처럼 우주를 박차고 뛰어나가기도 한다.
중단전은 마음이 자리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침묵을 주관하며 고요의 극점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우주처럼 넓은 포용력을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곳이기도 하다.
간략하게 기에 대해 구분해놓은 것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기(중단전=구미=줄기)
1. 마음에 해당(의념 포함)
2. 중용의 도(우주적인 포용력)
3. 중단전 적체현상 해소(내적치유)
4. 내적 자아
5. 깨달음
6. 물리적인 精과 논리적인 氣가 만나는 곳(신의 에너지=기+소립자 등)
7. 하드웨어(정) + 소프트웨어(신) = 운영체제(OS. 상하 연결고리 역할)
8. 상·중·하단전 관통
9. 신인합일(우아일체)
10. 평화의 방
기본적으로 생명에너지는 소립자와 더불어 우주를 관통하고 있다.
이 얼마나 가슴 뜨거운 일인가?
우리들은 전지전능한 하나님(또는 하느님)을 연상하거나 사모하고 있는 입장이지만 이 우주에는 그러한 능력들이 자생력을 갖고 우주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전자기장을 띠고 있는 기는 전기성과 자기성을 내포하면서 그 배경에는 소립자라는 우주 궁극의 기본입자들이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호흡의 절정에 다다를 때 기를 움직이는 또 다른 존재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분명 전자기장의 폭풍 속에서도 알 수 없는 또 다른 존재가 기를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주본원지라고 말할 수 있으며 보이지 않는 힘, 보이지 않는 손 또는 강한 손, 하나님, 신인합일, 깨달음, 우아일체 등 갖가지 수식어를 갖다 붙일 수가 있다.
분명 우주에서 벌어지는 일들인데 이렇게 갖가지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것은 의식체인 수련자의 감응능력과 언어능력에 따라 발생하는 일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적 자아를 통해 보다 단단한 기의 퇴적층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고요의 극점까지 도달하여 우주의 안팎을 투명하게 내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내적치유에 해당되는 중단전 적체현상 해소라는 과정을 거친 후 느끼는 과정이기에 그 깊고도 깊은 우주여행은 또 다른 내적 자아를 일깨우는 일이자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기에 그 과정은 참으로 험난하고 아름다운 여정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 보면 하늘은 모두에게 평등하다는 사실을 일깨우게 해주는 일면이자 하늘이 내린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우주궁극의 세계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신은 분명 존재한다.
신이 우주를 만든 것이 아니라 우주가 신을 만들었듯이 신은 어떠한 형태로든 인간의 마음에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의 영향력은 인과율과 곧바로 직결되어져 있어 공존하는 선악과 함께 죄의 경중에 따라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련자의 경지가 높을수록 가슴에 와 닿는 양심의 가책은 매우 예민해진다. 조그마한 잘못에도 송곳으로 심장을 찌르는 것 같은 가책을 받기에 어쩌면 경지가 높을수록 신의 존재를 진솔하게 인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신과 직접 소통하고 있다는 점이고 그 신을 통해 양심의 가책이라는 단어로 심장을 후벼대기에 함부로 나쁜 짓을 하기가 매우 꺼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단광기기이다.
좋은 기가 몸에 쌓이게 되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고 스스로 자제하거나 각종 위험한 요소로부터 피해갈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신은 우리들을 그림자처럼 쫓아다닌다. 그리고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간섭하기를 좋아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신들이 CCTV처럼 작동되어지기를 매우 꺼린다. 사생활 보호차원에서도 그렇지만 신과 인간 사이에 지켜야할 법도가 존재하기에 어느 정도는 거리감을 둘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우주에는 우주 안에 존재하고 있는 인과율과 주기율이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공존하는 선악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다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인과율은 원인과 결과에 따라 그 죗값을 받게 되어 있고 주기율은 이러한 과정들이 일련의 주기성을 띄며 발생한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주기율이 순차적으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무작위로 발생하는 경우도 많기에 어떻게 보면 주기율의 변곡점은 서로 다르게 작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는 인과율이라는 작용과 함께 맞물려 움직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자 공존하는 선악과 함께 움직이고 있기에 발생하는 일이기도 하다.
예언을 미리 하다보면 맞는 경우도 많지만 많지 않은 경우도 많다.
이것은 일기예보와 같이 내일 비가 올 것이라고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내일 비가 오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을 하게 되면 이상하게 비가 안 오는 경우와 같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천기누설이 되어 예언을 빗나가게 하는 경우와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원리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예언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예언을 한 순간 방해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져 그 예언이 빗나가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지금껏 성경이나 불경을 비롯하여 각종 경전들 또는 예언서들이 맞는 경우도 많지만 틀린 경우도 많은 것은 바로 이러한 원리에 의해 방해받거나 천기누설이 되어 맞지 않은 경우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예언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100경분의 1의 극미한 소립자의 원리에 의해 과거, 현재, 미래를 미리 내다볼 수 있다하여도 수많은 의념이 간섭하게 되면 예언이 빗나가는 경우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예수가 재림(또는 하나님이 직접 내려옴)할 때가 넘었는데도 예수가 내려오지 않고 있거나, 미륵불이 현현할 때가 넘었는데도 아직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예언이 빗나가는 경우는 수없이 많다. 더구나 예언을 짜 맞추기 식으로 갖다 붙이고 있는 해석에는 손을 들 수밖에 없다.
지구가 멸망하거나 인류가 멸망한다는 소리는 수천 년 전부터 있었다. 그런데도 환경문제와는 별개로 멀쩡하게 잘 유지되고 있는 것을 보면 순전히 수다스러운 사람들의 전유물로밖에 생각할 수 없다. 휴거라든지 각종 이상한 말들을 갖다 붙여 혹세무민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에 그에 혹하거나 하늘의 뜻에 반하는 행동은 삼가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설령 지구가 내일 멸망한다고 해도 함부로 입으로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내적 자아를 통해 보다 차분한 생각을 해나가는 것이 정신 건강상으로도 좋을 것이다.
과학의 힘을 빌리면 얼마든지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도 과학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춰 갖다 쓰다보면 이상한 논리로 변질되기도 한다.
현실과 이상은 구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좋다. 지성과 경험 그리고 명상을 통해 나타나는 보다 건전한 사상위에서 완성의 길을 향해 한걸음씩 내딛는 것이 균형 잡힌 생각이자 현실적으로 접근하는 일이기도 하다.
꿈은 아름답지만 현실은 언제나 냉혹하듯이 등에 진 바람이 가벼워도 걸어야하는 수고까지 내려놓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편의 詩를 감상해보자.
중용의 도 - 허를 찌르다 - 청아당 엄 상 호 詩(2015.04.30.)
연약한 나뭇잎도 바람 잘 날 없는데
거목이라고 피해갈 수 있겠는가
묵묵히 한길을 걷다보면
바람이 멈추거나
침묵이 멈추는 날이 올 것이다
가진다고 다 가진 것이 아니듯이
버린다고 다 버린 것이 아니듯이
사는 동안 소유하며 살거나
죽는 순간 무소유로 살거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끝없는 도전이다
홀가분하게 홀로 산다면
그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홀로 있어야만 반드시 아름다운 것이 아니듯이
함께 있어야만 반드시 아름다운 것이 아니듯이
둘 다
혹은
흔들리는 가운데
중용의 도(道)를 지키고자 서 있는 저 나무를 보라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은
당당한 모습이기에
죽음을 넘어선 사랑을 보거나
삶을 초월한 사랑을 보게 되는 것이다
모두 다 놓았다고 생각한 순간
모두 다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허를 찌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기에
우리들은
단 한시도
방심할 수가 없다
비록 그것이 사소한 것일지언정
비록 그것이 귀중한 것일지언정
우리들의 목숨이 살아있는 한
단 한시도
방심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보라 저 연약한 나뭇잎조차 바람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보라 저 강인한 강철조차 바람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비바람에 노출되어져
구름과 해와 달이
벗 삼아 흘러가고 있는
나그네 같은 삶이기에
우리들의 허전한 가슴을 채우거나
비울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는 뒤돌아보거나
앞을 향해 달리지 않겠다고 맹세하여도
지나고 보면
반대로 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을 보면
결국은
흔들리는 가운데
중심을 잡으려는 나무가 되고자 노력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2019년 7월 12일 금요일
청아당 엄 상 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