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은 정하되 자율적 삶을 선호한다 – 공존하는 선악
수련을 하든
수련을 안 하든
자신의 삶은 자신이 선택하며 살아가게 되어있다.
이미 수많은 기준들이 정해져 있지만
그에 충실하게 따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고
그에 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기준은 정하되 자율적 삶을 선호하는 것은
자신의 개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자아를 수없이 쥐어짜고 억눌려도
끄떡없이 견디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자신의 개성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살아가는 기준은 정해져있다.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고 고뇌하며
삶에 대한 문제를 치열하게 생각하기에
따로 기준을 정해놓지 않아도
자율적으로 극복하며 해결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수행자라면 그 누구보다도 스스로 깨우침을 얻고 있기에
자율적 삶을 살아간다고 볼 수 있다.
회개와 반성을 요구하는 경우도 많지만
자신이 스스로 회개하거나 반성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스스로 깨우쳐서
스스로 회개하고 반성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환경을 개선해 놓는 쪽이
어쩌면 더 바람직한 일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조금은 난해하고 어려운 일 같지만
스스로 깨우치는 일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성자들의 좋은 말씀을 듣고 깨우치는 경우도 있고
현자들의 좋은 행동을 보고 깨우치는 경우도 있고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깨우치는 경우도 있고
수행을 통해 스스로 깨우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선택하든 상관은 없지만
기준은 정하되 자율적 삶을 살아가는 것을 선호하고 있는 편이다.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이지만
자신의 권리만 주장하고 의무는 이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어차피 삶의 시스템은 얽히고 설켜 쉽게 풀 수 없는 문제들로 가득하다.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주장한들
그 사람한테 맞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수행자가 자신에게 맞는 수련법을 선택하기 위해 수많은 곳을 두드리지만
자신에게 맞는 수련법이 따로 있듯이
신도들이 자신에게 맞는 종교를 선택하기 위해 수많은 곳을 두드리지만
자신에게 맞는 안식처가 따로 있듯이
자신과 딱 맞는 곳이 있다면 그것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이 맞다고 본다.
다만 선택에 대한 책임은 순전히 그 개인이 감당해야할 몫이라고 본다.
필자도 진정한 종교는 없다.
지인들의 권고로
『공존하는 선악』이라는 책을 쓰기위해
교회를 선택했을 뿐이다.
겉에서 바라보는 것하고
안에서 직접 보는 것하고는 많은 차이가 있기에
지금도 계속해서 바라보며 지켜보고 있는 처지이다.
하지만
기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매우 꺼리는 편이다.
하나님 이외에는 모두 우상이라는 이름으로 낙인찍혀
다른 종교들을 벌레 보듯이 하거나
매우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같은 기독교 교파끼리도 서로 충돌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다.
다들 하나님의 자식이라 말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은 오직 예수 하나라고 못을 박아놓은 것이나
번역되는 순간 성서무오설은 이치에 맞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성서의 내용은 영감축자설과 성서무오설이라는 말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고
만약에 여기서 더하거나 뺀다면
천벌이 내릴 것이라고 경고 아닌 경고를 날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영향 때문에 그런지는 몰라도
세계 곳곳에서 천벌이 내려지고 있는 것을 보면
맞는 말 같기도 하다.
그건 그렇고
불경이나 성경이나 경전을 보면
경고성 메시지가 유독 많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그에 따르자니 거부반응이 일어나고
그에 따르지 않자니 죄를 짓는 것 같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선악에 대한 기준도
하나님이 생각하는 것과
인간이 생각하는 것에 큰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기준에서 볼 때
악인데도 선으로 포용할 때가 있고
선인데도 악으로 배척할 때가 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
선인데도 악으로 배척하는 경우가 있고
악인데도 선으로 포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가다 보면
자비를 내세우고 있는 불교는
자비라고 내세울 수 없게 된다.
그 자체가 우상이다 보니
그 무엇을 내세울 수 있는 입장이 못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사랑과 자비는 오직 기독교만이 내릴 수 있는
특권 아닌 특권이 되어버린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우상이라는 잣대로 가늠하게 되면
예수이외의 성자들은 성자라는 명칭에서 다 사라져야만 한다.
사당에 모시고 있는 공자도 우상이 되어버리기에 그렇고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기에
예수 이전에 알았던 성자들은 다 사라져야할 위기에 놓이게 된다.
둘 다 문제가 있는 것인지
하나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엄밀하게 구분할 수 없어
이를 『공존하는 선악』이라고 부른다.
영특한 인간들은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을 미리 파악하고
다 빠져나가며 호위호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인간의 손으로 완성된
불경과 성경과 경전이다 보니
허점투성이라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아마 그대로 답습하면서 살아간다면
숨 막혀 그 자리에서 더 이상 움직일 여력조차 없어질 것이다.
더구나 모든 경전에 다 맞추려고 한다면
정신이 오락가락할 정도로 매우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각기 다른 국제법과 관습법까지 갖다 대면
가만히 앉아서 죄를 짓는 일까지 벌어지게 된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할지 매우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경전 안에는 금과옥조와도 같은 좋은 말로 가득 차 있기에
뼈에 사무칠 정도로 좋은 말씀인데
왜 이러한 부작용이 발생하는가이다.
과거의 기준에 맞춰
동·서양의 사상이 분리되어져 있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다.
씨족사회라든지
부족국가라든지
조금씩 국가형태를 유지해나가면서
그 지역이나 그 국가에 맞는 기준을 정하다보니
통일장 이론처럼 통일되지 못한 채
각기 흩어져 생활하다보니 그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지금은 하나로 합치고 싶어도 쉽게 합칠 수가 없다.
개인에게 개성이 있듯이
그 나라마다 다 독특한 개성이 있기 때문이다.
본질을 꿰뚫어야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왜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가이다.
2019년 2월 13일 수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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