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찾아가는 신과 찾아야하는 신

청아당 2018. 11. 5. 07:05

찾아가는 신과 찾아야하는 신

 

기독교에서는 찾아가는 신이 있다면

불교나 도교에서는 찾아야하는 신이 있다고 한다.

 

기독교에서는

신을 찾지 않아도 찾아가는 서비스처럼

스스로 하나님이 찾아와 자신을 믿어달라고 하거나

인간과 소통하려는 신으로 통한다고 한다.

 

불교나 도교에서는

신을 찾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은 후

궁극에 가서는 신의 존재를 찾아내지만

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는 없다고 한다.

 

 

무신론과 유신론의 차이점은

무신론은 과학으로 종교를 바라본다면

유신론은 종교로 과학을 바라보고 있다고 한다.

 

결국 과학과 종교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한다.

 

과학은 종교를 위해 존재하고

종교는 과학을 위해 존재한다고 한다.

 

신의 존재는

무신론이든

유신론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한다.

 

하지만

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늘 성령으로 그 존재감을 입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우리 주변을 떠나지 않고 서성거리는 거와 같다할 수 있다.

 

 

문제는

기독교는

기독교입장에서 항상 모든 것을 판단하려 든다는 점이다.

 

그리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판단하기보다는

주관적인 입장에서 판단하고 있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분명 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동서양의 신을 막론하고 다 똑같다.

 

더구나 불교나 도교에서조차 신의 모습은 존재한다.

 

다만 기독교가 말하는 우주의 절대 신인 하나님을 지칭하는가의 문제이다.

 

과거에는 지금처럼 과학이 발달하지 못하다보니

우주의 절대 신인 최고신을 지칭하는데 있어

동서양의 사고방식이나 명칭에 있어 조금 다르다고 본다.

 

한국만 하더라도 기독교를 접하기 전부터

하나님을 지칭하는

한울님이나 하느님이라는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더구나 하나님을 표현하는데 있어서도

서양의 하나님보다 더 구체적인

태극부터 태극이전의 세계관까지 적나라하게 문자로 표현하고 있다.

 

삼일신고를 비롯하여 동양서적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에 대한 표현은

명칭만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고 있지 않지

이미 하나님의 존재를 세밀하게 기록해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한국의 기독교 목회자가

이스라엘 하나님보다도

오히려 대한민국 하나님을 비하한다는 점이다.

 

전 우주적인 하나님을 대표하는 신인데도 불구하고

기독교라는 종교를 우대하기 위한 조치인지는 몰라도

이상하게 대한민국 하나님을

자신도 모르게 비하하거나 평가에 있어 인색하다는 점이다.

 

 

신이라고해서 다 똑같은 신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토속신앙에서부터 고급신앙에 이르기까지

신을 섬긴다는 것은

우주의 절대 신인 하나님을 지칭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표현방식이나 명칭에 있어 약간 서투를 뿐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지칭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차피 직진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것은 다 똑같다.

 

간접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손길이나 입김을 느끼고 있듯이

그것이 성령이 되었든 보이지 않는 손길이 되었든

전 우주적 최고신인 하나님을 뜻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렇고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면

전 우주의 모든 것을 다 포용해야한다고 본다.

 

선악과를 빌미로

사탄과 흑암의 세계로 구분하여

각종 입에 담지 못할 행동들을 저지르게 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 모든 것들을 평정하여

우주의 모든 것들을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만들었어야 했다.

 

마치 우아일체로 하나가 되듯이

그런 세상을 만들거나

그런 우주관으로 살아가게 했어야했다.

 

 

인간은 하나님을 닮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하나님처럼 포악하기도 하고

분노할 줄 알고

죄를 지을 줄 알고

타협할 줄 알고

파괴할 줄 알고

각종 적나라한 못된 짓은 다하는 인간으로 낙인이 찍혀있다.

 

만약에 인간이 하나님을 닮지 않았다면

차라리 더 선한 인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못된 짓을 싫어하면서도 배우듯이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못된 습성을 배우는 거와 마찬가지라고 본다.

 

 

인간은 선하게 살려고 하나

세상이 이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다.

 

2018115일 월요일

 

청아당 엄 상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