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을 방해하는 존재 및 장애물 – 슈퍼바이저(감독자, 관리자, 감시자)
○○님
“예전부터 미묘하게 느껴왔지만 무언가 수련을 방해하는 존재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이 실재하는 영이든 나만의 망상이든지간에 또는 방해이든 시험이든 간에, 실제로 그러한 현상이 존재한다면 현재 최고치의 시련이 닥친 것 같다. 내 멱살을 부여잡고 사정없이 흔들어대듯이 사방에서 장애물들이 날아온다.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계속 휘몰아친다. 그냥 알아서 포기하라는 것 같다.
그래도 수없는 좌절 속에서도 매번 느꼈던 건 정공법으로 맞서 돌파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똑같은 영화 매번 봤자 똑같은 결말이듯이,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주학과 성명학, 관상학 등
동양철학에 대해 공부할 때
잘만하면 나만의 사주학을 만들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든 적이 있다.
20~30대에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누구나 삶의 길목에서 헤맬 때가 있다.
진리를 알고
깨달음을 얻고
그 모든 것을 다 안다 해도
삶에 있어서만큼은
유독 나약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고난과 시련이라는 달갑지 않은 짐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저절로 그러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즉 슈퍼바이저(supervisor)인 감시자(감독자, 관리자)에 의해
낱낱이 우리들의 행동거지와 생각을 읽어내고 있다.
심지어는 감시자의 역할이
하늘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하늘에서는 신이나 방해령이 감시하고 있고
땅에서는 가족이나 아내가 감시자 역할을 하고 있다.
분명 자신은 자유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올가미에 얽혀
하늘과 땅에서 촘촘하게 엮인
바람도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에 걸린 채
발버둥치고 있다.
이 무슨 일인가?
하늘과 땅에서 감시자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신이 아니면
가족이나 아내
심지어는 직장이나 학교에서조차도 자유롭지가 못하다.
자신이 있는 곳에
감시자가 따라붙는다고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지만 어쩔 수가 없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공존하는 선악의 그물에 걸려있는 것이고
또 다른 표현으로는
배려 없는 교만에 빠져있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함정이다.
삶은 쉬운 것 같아도 어렵고
어려운 것 같아도 쉽다.
행복은 잠시 바람처럼 왔다가 가지만
불행은 강력한 접착제처럼 들러붙어
쉽게 떨어지지 않는 속성이 있다.
행복은 한두 가지만 와도 행복해하지만
불행은 적진에 집중적으로 포탄을 투하하듯이
견뎌내기 힘들 정도로 쏟아져 들어온다.
그리고 마치 양면작전에 돌입이나 한 것처럼
하늘과 땅에서 사방에 벽을 쳐놓고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버릇이 있다.
미처 손쓸 겨를도 없이
허무하게 당하게 되는 것이 고난과 시련이다.
그런데 이것 하나는 알아야한다.
자신의 업보는 자신이 만들어나간다는 점이다.
특히 가족이나 부부 간의 관계에서 보면
말을 너무 아낀다는 점이다.
말이 없다고 느낌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일거수일투족을
머리나 가슴에 입력하고 있다는 점을 잊고 있는 것이다.
배려나 격려는 말 한마디로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쑥스럽거나 부끄러워서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게 되면
‘수고했다’는 말을 아끼게 되면
‘고생했지’라는 말을 아끼게 되면
관계와 관계에서는 중요한 포인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가까이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학교이든
관계와 관계에서 오는 불협화음은
한국인의 특징에서 오는 경우도 많다.
교육학에 역할론 이라는 것이 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고
남이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분담을 철저하게 잘하면
문제를 사전에 차단할 수가 있지만
그것이 쌓이고 쌓이다보면
언젠가는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게 되어있다.
이럴 때는
사전에 역할론에 대한 분담을 잘 해결해나가면서
보이지 않는 손도 역으로 잘 감시하면 된다.
꼭 무슨 일을 하려고만하면
방해꾼이나 신의 질투를 사는 경우가 있다.
무슨 일인가?
살면서 수없이 당해왔던 일인데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만 하더라도
아브라함이 그러했고
요셉이 그러했고
다윗 왕이 그러했고
예수가 그러했고
사도바울이 그러했다.
하늘은 장차 큰 인물을 만들려면
그만한 고난과 시련을 내린다는 말이 있듯이
다들 그만한 역경을 견뎌내었기에
역사에 기록되어져 전해져 내려오듯이
자기 주도적 삶이 중요함을 깨우치게 해주는 부분이다.
어차피 이렇게 살아도 같고
저렇게 살아도 똑같다면
정면 돌파 하는 수밖에는 없다.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었다고
그 다음부터는 평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평생을 통해
고난과 시련을 달고 사는 것이
우리네 삶의 근본적인 문제점이다.
그래서
인간적인 시스템 자체에 중대한 결함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 시스템을 뜯어 고치지 않은 이상
순환시스템에 의해 돌고 도는 수밖에는 없다.
왼쪽으로 이동하든
오른쪽으로 이동하든
선택 선에 의해 결과물이 달라지기에
내부시스템이든 외부시스템이든
아니면 두개의 시스템이 조화롭게 맞물려 돌아가든
근본적인 문제는
삶은 문제의 연속이라는 점이다.
그냥 다가오면
조용히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명상에 들면서
해결점을 찾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뼈아픈 슬픔이 가슴에서 떠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극복의 힘이 존재하는 한
언제든 즐거운 마음으로
통쾌하게 뚫고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을 즐겁게 생각하면 행복한 것이고
삶을 슬프게 생각하면 불행한 것이다.
이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2018년 9월 4일 화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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