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인체전자석과 깨달음으로 가는 길

청아당 2018. 4. 30. 17:05

인체전자석과 깨달음으로 가는 

 그림을 그려야한다

손에 잡히지 않는 깨달음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깨달음에 매달려야한다

말장난에 놀아날 것이 아니라 
본연의 모습을 볼 줄 알아야한다

천편일률적인 깨달음보다는 
보다 신선한 깨달음이 필요할 때이다

학문적인 깨달음이 아니라 
논리적인 깨달음이 아니라 
이론적인 깨달음이 아니라 
허구적인 깨달음이 아니라 
본연의 깨달음을 볼 줄 알아야한다

위의 깨달음은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다들 깨닫는 깨달음이다

하지만 
하나가 부족한 깨달음이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부족한 하나이다

이것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깨달음이다

바로 몸으로 체험해야할 깨달음인 것이다

이것이 선결되지 않는  
항상 부족한 하나 때문에 
내부적으로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참으로 중요하고도  중요하다


깨달음은 인체전자석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체전자석과의 관계를 파헤치지 않고서는 
깨달음의 세계에 근접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안다고  아는 것이 아니듯이 
모른다고  모른 것이 아니듯이 
깨달음 또한 마찬가지다

원리를 알고 접근하는 것하고 
그렇지 않은 것하고는 천지차이다

그만큼 원리를 안다는 것은 중요하다

물론 인체전자석과의 관계를 몰라도 
그동안  깨달아왔음은 부인할  없다

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과거의 답습에만 매달리기에는 
너무나 할일이 많다

온 생을 깨달음에만 매달리기에는 
너무나 소모적이라는 것이다

무엇이 그토록 깨달음의 세계에 
매달리게 했는지는 몰라도 
이제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쉬운 방법이 있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필요성은 없다는 점이다

 

 

가야할 길이 멀기는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알아야하기에

말장난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공존하는 선악이 그렇고

서로 다른 사후세계를 그려내는 것이 그렇고

허공에다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을 그려내는 것 또한 그렇다.

 

말잔치는 말잔치에 그친다.

 

이것이 진리라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생각의 각도를 바꾸면 허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논리는 논리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논리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느낌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분명히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다.

 

존재에 대한 의문을 제거해주는 유일한 해법이기에 그렇고

소우주속에서 경험하는 형언할 수 없는 세계를 체험할 수 있기에 그렇고

손에 잡히는 고요의 극점인 우주의 근원을 알 수 있기에 그렇다.

 

 

보고 배운다는 것은 별개 아니다.

 

홀로 알려면 힘들지만

손을 잡고 함께 머리를 맞대면

쉽게 접근할 수 있기에

다 같이 힘을 합치려고 하는 것은

이보다 더 안정적인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현 도반님

인체전자석을 우주사상을 압축 시켜 놓은 거라 생각이 들어서

특별히 우주사상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는데

말씀대로 우주사상과 경략유통과 인체전자석 같이 시도해 보겠습니다.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거라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인체전자석에서 분리하는 건 아예 생각도 못했습니다.

이것도 염두에 두고 화두처럼 생각해보겠습니다.”

 

 

인체전자석 안에는

우주사상뿐만 아니라 경락유통과 깨달음의 세계까지도 함축되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분리해내는 법도 알아야하기에 말씀 드린 것입니다.

 

인체전자석 안에는

결합과 분리의 묘미가 담겨져 있다고 보면 빠를 것입니다.

 

2018 4 30 월요일 

청아당 엄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