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전자석과 깨달음으로 가는 길
큰 그림을 그려야한다.
손에 잡히지 않는 깨달음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깨달음에 매달려야한다.
말장난에 놀아날 것이 아니라
본연의 모습을 볼 줄 알아야한다.
천편일률적인 깨달음보다는
보다 신선한 깨달음이 필요할 때이다.
학문적인 깨달음이 아니라
논리적인 깨달음이 아니라
이론적인 깨달음이 아니라
허구적인 깨달음이 아니라
본연의 깨달음을 볼 줄 알아야한다.
위의 깨달음은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다들 깨닫는 깨달음이다.
하지만
하나가 부족한 깨달음이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부족한 하나이다.
이것은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깨달음이다.
바로 몸으로 체험해야할 깨달음인 것이다.
이것이 선결되지 않는 한
항상 부족한 하나 때문에
내부적으로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참으로 중요하고도 또 중요하다.
깨달음은 인체전자석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체전자석과의 관계를 파헤치지 않고서는
깨달음의 세계에 근접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안다고 다 아는 것이 아니듯이
모른다고 다 모른 것이 아니듯이
깨달음 또한 마찬가지다.
원리를 알고 접근하는 것하고
그렇지 않은 것하고는 천지차이다.
그만큼 원리를 안다는 것은 중요하다.
물론 인체전자석과의 관계를 몰라도
그동안 잘 깨달아왔음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과거의 답습에만 매달리기에는
너무나 할일이 많다.
온 생을 깨달음에만 매달리기에는
너무나 소모적이라는 것이다.
무엇이 그토록 깨달음의 세계에
매달리게 했는지는 몰라도
이제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쉬운 방법이 있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성은 없다는 점이다.
가야할 길이 멀기는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알아야하기에
말장난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공존하는 선악이 그렇고
서로 다른 사후세계를 그려내는 것이 그렇고
허공에다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을 그려내는 것 또한 그렇다.
말잔치는 말잔치에 그친다.
이것이 진리라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생각의 각도를 바꾸면 허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논리는 논리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논리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느낌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분명히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다.
존재에 대한 의문을 제거해주는 유일한 해법이기에 그렇고
소우주속에서 경험하는 형언할 수 없는 세계를 체험할 수 있기에 그렇고
손에 잡히는 고요의 극점인 우주의 근원을 알 수 있기에 그렇다.
보고 배운다는 것은 별개 아니다.
홀로 알려면 힘들지만
손을 잡고 함께 머리를 맞대면
쉽게 접근할 수 있기에
다 같이 힘을 합치려고 하는 것은
이보다 더 안정적인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박○현 도반님
“인체전자석을 우주사상을 압축 시켜 놓은 거라 생각이 들어서
특별히 우주사상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는데
말씀대로 우주사상과 경략유통과 인체전자석 같이 시도해 보겠습니다.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거라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인체전자석에서 분리하는 건 아예 생각도 못했습니다.
이것도 염두에 두고 화두처럼 생각해보겠습니다.”
인체전자석 안에는
우주사상뿐만 아니라 경락유통과 깨달음의 세계까지도 함축되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분리해내는 법도 알아야하기에 말씀 드린 것입니다.
인체전자석 안에는
결합과 분리의 묘미가 담겨져 있다고 보면 빠를 것입니다.
2018년 4월 30일 월요일
청아당 엄상호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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