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란 무엇인가? - 깨달음의 구조와 원리
내부적으론 송과체와 인체전자석의 원리를 살펴보아야할 것이고
외부적으론 지구, 달, 태양의 원리를 살펴보아야할 것이다.
깨달음은 내적요인과 외적요인에 의해 발생한다.
눈을 감아도 빛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생리학적인 문제이고
눈을 떠도 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우주천체학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이란?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참으로 복잡 미묘한 원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사전적인 의미부터 살펴보면
1. 제대로 모르고 있던 사물의 본질이나 진리 따위의 숨은 참뜻을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됨.
2. 모르고 있던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림.
우선적으로
선문답이나 명상을 통해 얻어낸 깨달음이 있는가하면
호흡을 통한 극한의 상태에서 얻어낸 깨달음이 있는가하면
한줄기 빛에 의해 얻어낸 깨달음이 있는가하면
무심의 경지에서 얻어낸 깨달음이 있을 수 있다.
깨달음이라고 하면
무릇 자연계와 우주를 아우르는 포용력이 전제되어져야 하고
깊고도 깊은 세계를 체험해야 하고
투시를 통해 과거, 현재, 미래를 투영해보아야 하고
내적잠재의식인 무의식과 의식의 세계에 대해
스펙트럼처럼 잘게 썰어 분석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하고
고체, 액체, 기체의 순서가 바뀌거나 실제로 내적체험을 통해
고체가 액체로 되는 현상을 경험해보아야 하고
액체가 기체로 되는 현상을 경험해보아야 하고
기체가 고체로 되는 현상을 경험해보아야 하고
고체, 액체, 기체로 순환되는 현상을 동시에 경험해보아야 한다.
깨달음의 세계는 단순하지가 않다.
어느 한 순간에 느꼈던 직관이나 영감을 통해 깨우치는 것은 맞지만
어떤 때는 자신이 깨닫고도
그것이 깨달음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있다.
그렇지만
어떤 계기를 통해
그것이 깨달음이란 사실을 뒤늦게 깨우치는 경우도 있다.
깨달음은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마음에 담아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잡았다싶으면
언제든 빠져나가는 것이 마음이자 깨달음이기에
깨달음은 어느 한곳에 고정되어지거나
어느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흔든다고 흔들릴 깨달음도 아니다.
한번 얻은 깨달음은
그 누가 아무리 흔들어대어도 흔들리지 않는 거대한 산처럼
우뚝 서 있는 것이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마치 우주가 회전하며 제자리를 지켜나가고 있듯이
그 안에서는 천변만화의 변화가 작용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론 안정감을 유지한 채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과 같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깨달음은 원에 비유되기도 하고
우주에 비유되기도 하고
땅에 비유되기도 하고
사람에 비유되기도 한다.
천지인이 하나로 모여드는 것이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천지인을 하나로 모으면 끝나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깨달음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
다양한 여러 정보 때문에
그 시작과 끝에 있어 천변만화한 이론이 필요하다.
깨달음은 간단하면서도 복잡하고
복잡하면서도 간단하다.
깨달음은
전체에서 하나로 역순으로 파고들어가기도 하고
하나에서 전체로 정순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이 둘의 조합이 깨달음을 좌우하기에
그 순서를 정해서
전체에서 하나로 파고들어가는 법을 깨우쳐야한다.
비법은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다보면
그 속에서 원리를 발견하게 되고
원리를 발견하다보면
깨달음의 구조에 대해서도 발견하게 된다.
깨달음을 얻었다하여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비로소 시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깨달았다고 해서
자연이 그 사람만을 편애하거나 높이 받들어주지 않기에 그렇고
깨달음은 단지 본연의 모습을 보거나 발견한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을 해보아라!
본래부터 있던 것을 단지 본 것뿐인데
더 이상 무엇을 원할 수 있겠는가?
깨달았다고 호들갑을 떨거나
자신을 내세우려는 순간
하늘이 먼저 나서서 교만을 잠재우기도 한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었다고
더 이상의 깨달음을 얻는데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궁극적인 깨달음과 삶에 대한 깨달음은
분명하게 구분되어져야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깨달음은 그대로 놓아둔 채
삶에 대한 깨달음을 또다시 얻어야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깨달음을 갖고
삶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한테 달려들면
누가 이길 것 같은가?
당연히 삶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한테
초반에 박살난다.
깨달음에도 내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둘의 깨달음을 체득하지 않고서는
그 어느 곳에 가서
함부로 깨달음에 대해 논하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궁극적인 깨달음은
일정한 수련기간 내에 얻은 깨달음이기에
그 내력이 짧지만
삶에 대한 깨달음은 평생을 통해 깨달아야하기 때문에
그 내력이 길 수밖에 없다.
짧은 것으로 긴 것을 이기려고하면
당연히 혼쭐이 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교만을 경계하고
겸손을 가까이하라고 하는 것이다.
교만은 자신을 드러내지만
겸손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에
그 속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깨달음으로 장난을 치면 안 된다는 점이다.
반드시
그에 응당한 하늘의 뜻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8년 3월 19일 월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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