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깨달음에도 깊이가 다 다르다

청아당 2017. 10. 29. 19:54

깨달음에도 깊이가 다 다르다

 

독서와 경험을 통해 느끼는 깨달음이 있고

원초적인 직감으로 느끼는 깨달음이 있고

언중 경계너머로 느끼는 깨달음이 있고

고행과 수행을 통해 느끼는 깨달음이 있고

명상을 통해 느끼는 깨달음이 있고

묵상을 통해 느끼는 깨달음이 있고

기도를 통해 느끼는 깨달음이 있고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통해 느끼는 깨달음이 있고

온 우주를 비추고도 남는 빛으로 느끼는 깨달음이 있고

그밖에 느끼는 깨달음이 있다.

 

 

깨달음에는 소각과 대각이 있다.

 

작은 깨달음이 있는가하면

큰 깨달음이 있다.

 

깨달음에도 깊이가 다 다르다.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소각이든

대각이든

모두 다 깨달음이라는 범주 안에 들어선다는 점이다.

 

 

깨달음이 깊으면 얼마나 더 깊겠는가?

 

그놈이 그놈이듯이

깨달음도

그 깨달음이 그 깨달음이다.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고요의 극점에 들어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더 이상 다가설 수 없는

우주의 밖에 이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깨달음을 가지고 논다고

행복한 것도 아닌데

슬픔도 기쁨도

모두 다 내려놓고

텅 빈 우주를 때려봐야 꿈쩍이나 하겠는가?

 

깨달음은 이미 온 우주에서 춤을 추고 있는데

뒤늦게 깨달았다고 해서

그 누가 반겨주는 이가 있다던가?

 

가슴만 더 공허하고

집착 아닌 집착으로 인해

평생을 허비해야하는

또 다른 깨달음에

진입해야할지도 모르는 일 아니던가?

 

삶과 깨달음은 하나다.

삶과 종교도 하나다.

 

이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을

그 누가 막는단 말인가?

 

본래부터 있던 자리를 안다 해서

달라질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허송세월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지금 이 순간에 더 충실해지는 것이

깨달음보다 더 나을 때가 있다.

 

 

깨달음에는 목적이 있어야한다.

 

무엇 때문에 깨닫고자 하는지 확고한 의지가 있어야한다.

 

막연하게 깨달음을 동경하면

삶만 허비하게 된다.

 

그 시간에 더 유용한

삶의 가치를 창출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깨달음도

종교도

인간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인간을 위한

깨달음

인간을 위한

종교

이 모든 것은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20171029일 일요일

 

청아당 엄 상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