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있는 그대로의 모습 - 어떤 모습으로 살 것인가?

청아당 2016. 7. 23. 09:53

있는 그대로의 모습 - 어떤 모습으로 살 것인가?

 

허리를 똑바로 펴지 못한 채

지팡이를 짚고 할머니가 걸어가신다.

 

 

꿈과 희망을 갖고 태어난 우리들이 아니었던가?

자연과 하늘을 벗 삼아 태어난 우리들이 아니었던가?

 

너와 내가 하나가 되고자

앞만 보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비움과 채움에 대한 황금비율을 놓고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거나 격려하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면

비움은 배부른 자의 이름이고

채움은 배고픈 자의 이름이다.

 

비움은 죄를 덜어내는 일이자

채움은 죄를 더하는 일이다.

 

살기위해 죄를 짓는 일이고

죽기위해 죄를 짓는 일이다.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승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다가

저승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 것인가가 더 중요하듯이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이곳에서

죄를 짓거나 죄를 가볍게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삶에 대해

허무와 고독을 느낀다하여 삶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삶에 대해

행복과 기쁨을 느낀다하여 마냥 즐거울 수 있겠는가?

 

눈을 감기 전까지

하늘과 땅을 바라보며 살아가야하기에

우리들의 선택은 늘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죄의 구렁텅이에 빠진다하여도

그것이 악의 구렁텅이에 빠진다하여도

눈을 감고 모른 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다면

악의 축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선의 축으로 살아가야하기에

우리들의 선택은 고민과 갈등 속에서 번민할 수밖에 없다.

 

눈만 뜨면

공존하는 선악이 그림자처럼 따라붙기에 더욱 그렇고

눈만 감으면

생사를 오가는 길목에서

꿈처럼 헤매며 살아가야하기에 더욱 그렇다.

 

그리고

끊임없이 사건에 엮이는 모습보다는

언제든지 홀로 설 수 있는 우주심으로

이 땅위에 서있는 것도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태어날 때부터

죄를 짓고 태어났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살아있는 동안

죄를 짓고 살아가야한다면 이 역시 믿을 수 있겠는가?

죽는 그날까지

죄를 지으며 살아가야한다면 이 역시 믿을 수 있겠는가?

 

우리들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왜 살아야하는지

왜 죽어야하는지

이미 정해져 있지만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우리들이기에

이러한 의문은 끊임없이 회자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비우거나 채우거나

그 어느 선상에 서있든지

죄를 짓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일은

공존하는 선악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요

자연과 하늘이

간섭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보아라!

이 둘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달려라하면 달리고

멈춰라하면 멈추는

제동장치에 걸려있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던가?

 

눈만 뜨면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눈만 감으면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그렇게 잠들지 않았던가?

 

뒤돌아보면

비움과 채움 속에서

헛발을 내디디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가는 길은 하나인데

오는 길도 하나인데

우리들은

서로 다른 안목으로 갈림길에 서있었던 것이다.

 

이제 와서 무엇을 바랄 것인가?

갖고자하여도 가질 것이 없고

놓고자하여도 놓을 것이 없는데

무엇을 놓고

자연과 하나가 되고자하겠는가?

 

이제 더는 바랄 것이 없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앞으로 달리거나

뒤로 달리면 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2016년 7월 23일 토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