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홀로 남은 여인! - 보는 것이 아픈 것이고, 듣는 것이 아픈 것이다

청아당 2016. 2. 20. 12:20

홀로 남은 여인! - 보는 것이 아픈 것이고, 듣는 것이 아픈 것이다

 

10대에 보내는 경우도 있고

20대에 보내는 경우도 있고

30대에 보내는 경우도 있고

40대에 보내는 경우도 있고

50대에 보내는 경우도 있고

60대에 보내는 경우도 있고

70대에 보내는 경우도 있고

80대에 보내는 경우도 있고

90대에 보내는 경우도 있고

100대에 보내는 경우도 있다.

 

생각하면 눈물부터 쏟아지는 것은

처음 만나는 기쁨이자 마지막 슬픔이기 때문이다.

 

 

다들 한마디씩 한다.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고,

산 사람은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갈 것이라고…

또는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한다고”

 

 

남들이 하는 말은 왜 이리도 쉽게 들리는지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이 왜 이리도 쉽게 들렸었는지

형제자매가 죽었다는 말이 왜 이리도 쉽게 들렸었는지

그때는 몰랐지만

자신이 당하는 고통은

고스란히 고통으로 전달되기에

좀 더 이해하게 되고

좀 더 고통스럽게 다가오는 것 같다.

 

보지 않으면

듣지 않으면

풍문으로 끝날 일인데

보는 것이 아픈 것이고

듣는 것이 아픈 것이다.

 

 

세대에 따라

아픔의 크기가 서로 다르겠지만

크고 작음을 떠나

근본적으로는 슬프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젊어서 사별하는 아픔의 크기는

그 무엇보다도 크기에

거기에다

딸린 자식이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아픔이 또 있겠는가?

 

그리고

시작과 끝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죽음보다 더 큰 아픔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이 나로 하여금 눈물을 흐르게 하는가?

무엇이 나로 하여금 슬픔을 느끼게 하는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쁨보다는 슬픔이 가슴에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아니,

슬픔보다는 기쁨이 용솟음쳐 오르기 때문이다.

 

자식도 손자도 다 필요 없다는 듯이

죽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다시는 잡을 수 없는 손길이기에

울컥 쏟아져 나오는 것은 눈물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식들이 손자들이

24시간 함께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이 깊은 슬픔은 당신 속으로 삭여나가는 수밖에 없다.

 

생전에 몰랐던

깊고도

넓은 자리가 보이지 않았었다.

 

저 고통을 보기가

너무 힘들어

그냥 빨리 떠났으면 하는

마음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깊은 후회로

하루를 견디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아니,

단 한 시간도 견디기가 어렵다.

 

휴지로 닦아내야할 눈물이 너무 많아

가슴으로 울고 있는

홀로 남은 여인!

그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는 업보로 남게 된다.

 

홀로 남는 기분을 아는가?

홀로 서야하는 기분을 아는가?

 

벼랑 끝에 몰린 사람처럼

지병에다 활동할 수 있는 기력이 떨어져있다면

그 참담함은 그 누가 알리요?

 

그나마 자식이나 후손들이 있다면

조금은 낫겠지만

하늘을 덮을 만큼 슬픔으로 다가온다면

그것처럼 견디기 힘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누구나 한번은 가야하기에

차마 말릴 수도 없었지만

오가는 길에 손 한번 흔들어주지 못해

그저 미안할 뿐이라고

가슴을 치며 후회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단죄하겠는가?

 

그저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기만을 바랬지만

되돌아온 것은

슬픔이라는 기억으로 남기에 더욱 아쉽기만 한 것이다.

 

뒤돌아서면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이 하나만으로도

어쩌면 행복한 눈물을 흐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손에 쥐어진 것 없이

생각하나만으로도

얼마든지 현실을 극복해나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홀로 슬퍼할 여유가 있다는 것은

그래도 행복을 맛볼 수 있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홀로 슬퍼할 여유가 없다는 것은

슬픔이나 기쁨을 느낄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는 말과 같고

오로지

삶을 위한 슬픔을 생각해야하고

죽음을 위한 기쁨은

나중에 누려야한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슴이 아파봐야 치열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에

눈물을 닦으면서도 힘차게 앞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당당하든

스스로 초라하든

홀로 남는다는 것은

색다른 눈으로 쳐다보는 이가 있거나

경시하려는 이가 있거나

또는 측은지심으로 바라보는 이가 있을 수 있다.

 

어쩌면 이보다 더 큰 시련은 없을 정도로

서럽고

가슴 아픈 사연들로

채워나가야 할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아픈 하루라도

살아있으니까

앞을 향해 달려 나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누가 사별한 사람을 대신해주겠는가?

 

그 어떤 대가로도

채울 수 없는 것이 사별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멈추는 그 순간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갈등을 일으켜야하기에

그저 앞만 보며 달려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역사는 과거의 기록이자 미래의 희망이지만

현실은 앞으로 써질 기록이자 삶의 체험 장이기에

역사 앞에서 그 누가 숙연해지지 않겠는가?

 

홀로 남은 여인들의 역사가

오늘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아파도 참아야

앞으로 달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2016년 2월 20일 토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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