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죽헌(烏竹軒)
“줄기의 빛깔이 까마귀처럼 검다하여 오죽(烏竹)이라 불리고 있다.
죽순은 5~6월에 나오는데 첫해는 초록색이었다가 다음해에 검게 된다고 한다.
60년을 살고 꽃이 피면 죽는다고 한다.”
경포대에 있던 신사임당(申師任堂) 동상이
강릉시청 건너편에 조성된 《신사임당 공원》으로 이전되었다.
대관령 줄기에 서있는 강릉휴게소를 지난 후
강릉 I/C로 빠져나와 속초 방향으로 달리다보면
우측에 《신사임당 공원》이 조성되어져있다.
하지만 차량의 흐름상 공원을 살필 겨를도 없이
지나치게 되어있는 구조로 되어있다.
지나친다는 것은 단 한순간이다.
머물 수 있는 것도 단 한순간이다.
그래도 볼 수 없는 것보다는 낫기에
그마저 고맙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여름이 오기 전에
봄이 와야 여름을 볼 수 있듯이
봄은 겨울이 지나야 봄을 맞이할 수가 있고
여름은 봄이 지나야 여름을 맞이할 수가 있고
가을은 여름이 지나야 가을을 맞이할 수가 있고
겨울은 가을이 지나야 겨울을 맞이할 수가 있다.
이렇게 서로의 자리를 양보해줌으로써
계절이 순환하고 있듯이
자연의 이름으로 우주의 질서를 불러들이고 있다.
1558년 23세 때인 율곡 이이가 2박 3일 동안 머물면서
58세인 퇴계 이황과 성리학을 논할 만큼
학문적 깊이가 성숙되어져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대학자다운 면모가 돋보이고
퇴계 이황 또한 나이를 초월하여
학문을 논하고 있는 것 또한 대학자다운 면모가 돋보이고 있다.
율곡 이이의 동상 옆에는 견득사의(見得思義)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이득을 보거든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라”
율곡 선생의 격몽요결에서 발췌해온 문구를 살펴보자.
사람을 상대하는 데는 마땅히 화평(和平)하고
공경(恭敬)하기를 힘써야하며 친구를 사귀는 데는
반드시 학문(學問)을 좋아하고 착한 일을 좋아하는 사람을 골라서 사귀어야 한다.
그밖에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곳인 몽룡실(夢(龍室)이 있고
실물 화단을 조성한 《신사임당초충도(申師任堂草蟲圖) 화단》이 눈길을 끌고 있다.
1536년 신사임당이 용이 문머리에 서려있는 꿈을 꾸고 율곡을 낳은 곳이다.
몽룡실(夢(龍室)이라 부르고 있는 이 방에는 신사임당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오죽헌엔 수령 600년이 넘는
사임당 배롱나무(목백일홍(木百日紅))의 기운이 넘쳐나고 있다.
강릉시의 시화(市花)로 꽃피는 기간이
100일이나 된다고 하여 백일홍(百日紅)이라고도 한다.
가끔씩
600년의 기운을 받기위해 배롱나무를 껴안으며
자연의 에너지를 넘치도록 받아가기도 한다.
성리학자인 율곡 이이는 학자로, 정치가로, 교육자로 성공한 대학자이다.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를 더 알고자한다면
경기도 파주에 있는 자운서원(紫雲書院)과 화석정(花石亭)
그리고 기념관 및 가족묘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마음속으로는 요순시대를 그리워하고 몸으로는 유학의 실행에 힘쓰며 항상 바른 말”을 하는 사림이 되었던 율곡이다. 대학자가 되기까지 율곡이 자신을 일깨웠던 자경문(自警文)을 한번쯤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제1조: 뜻을 크게 가져 성인이 되도록 끝까지 노력한다.
제2조: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말을 적게 한다.
제3조: 마음을 놓지 않고, 안으로 거두어 잘 정리한다.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은 주인 없는 집과 같다.
제4조: 혼자 있을 때 행동을 더욱 조심한다. 남이 보지 않을 때 행실을 삼가지 않으면 악한 일이 저절로 생기는 법이다.
제5조: 항상 해야 할 일을 정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깊이 생각한다. 행동에 옮기지 않는 독서는 필요가 없다.
제6조: 재산이나 명예에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된다.
제7조: 꼭 해야 할 일은 싫어하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정성껏 한다.
제8조: 온 세상을 전부 준다고 해도, 죄 없는 사람을 한명이라도 괴롭히거나 의롭지 않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제9조: 나를 해치는 사람이 있을 때는 스스로를 뉘우치고, 참된 마음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돌린다.
제10조: 함부로 눕지 않고, 기대지도 않으며, 필요 없는 잠을 자지 않는다.
제11조: 서두르지 말고, 쉬지도 말며, 꾸준히 몸과 학문을 닦는다.
자신을 세워나가면서
남편을 비롯하여 7남매의 자식을 제대로 키워나간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려서부터 천재적인 미적 감각과 학문의 바탕이 깔리지 않고서는
함부로 따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얼마나 달려야 이룰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멈춰야 이룰 수 있는가가 아니라
그 자체로 우뚝 설 수 있는 계기가 있어야하고
삶의 원리와 부단한 노력이 없다면 이룰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한사람(율곡 이이)은 오천 원 권 지폐에 새겨져있고
한사람(신사임당)은 오만 원 권 지폐에 새겨져있다.
이 또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오천 원 권에 새겨진 배경대로 사진을 촬영하고 싶으면
촬영할 수 있도록 배려해 놓은 장소에 서서 포즈를 취하면 된다.
제도와 신분의 제약을 받고 있는 조선의 땅에서
거대한 벽을 허물고
밖으로 나설 수 있는 것은
그 뜻이 크고 아름다워야만 가능하기에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존재하는
그런 존재감으로 살아야만 가능하다.
그리고 상식을 뛰어넘거나
우주적인 시야를 지녀야만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현모양처(賢母良妻)와 효부(孝婦)의 뜻은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사전적 의미인 현모양처(賢母良妻)의 뜻은
인자하고 어진 어머니이자 착하고 좋은 아내이다.
사전적 의미인 효부(孝婦)의 뜻은
시부모를 섬기는 정성이 지극한 며느리이다.
신사임당은 48세의 짧은 나이로 단명한 면도 있지만
시부모를 정성껏 섬길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오히려 시댁보다는 친정에 더 많은 애정을 쏟았음을 알 수 있다.
역사라는 것이 그렇지만 하늘의 뜻대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
만약에 이러한 조건들이 갖추어져있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신사임당이라는 인물과
율곡 이이라는 인물은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선 효부라고 하기보다는
현모양처에 가까운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현모양처 또한 쉽지 않은 길이기에
언뜻 보면 현모양처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살펴볼 수 있는 틈새가 벌어져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역사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그것이 승자 쪽의 과장된 역사이든 패자 쪽의 왜곡된 역사이든
평가는 후세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다.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는 조선 여류 서화가(1504년~1551년. 48세 별세)이자
율곡 이이(李珥 : 음력 1536년 12월 26일~1584년 1월 16일. 49세 별세)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여기서 잠시 신사임당의 시를 살펴보자.
대관령(大關嶺) 옛길 반정(半程)에 새겨진 신사임당 시비에 기록된 내용이기도 하다.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란 제목의 시(詩)다.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강릉)에 두고/
외로이 한양으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해 저문 산에 흰 구름만 날아 내리네.’
신사임당의 지극한 효심을 잘 표현한 시다.
유대관령 망친정 - 칠언절구
늙으신 어머니를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로 가는 이 마음
이따금 머리 들어 북촌을 바라보니
흰 구름 떠 있는 곳 저녁산만 푸르네.
신사임당이 38세(1541)에 지은 시이다.
여촌(餘村) 남은 골 블로그에 의하면
( http://blog.daum.net/39kkkiok/16155771 )
泣別慈母(읍별자모) - 어머님을 눈물로 이별하고
- 師任堂 申氏 -
鶴髮慈親在臨瀛(학발자친재임영)
늙으신 어머님은 임영(강릉)에 계시는데
身向獨去長安情(신향독거장안정)
이 몸 혼자서 서울로 떠나는 마음 아프네.
回首北坪時一望(회수북평시일망)
북쪽으로 머리 돌려 때때로 바라도 보고
白雲飛下暮山靑(백운비하모산청)
흰 구름 떠가는 아래 저녁 산만 푸르구나!
이 詩는 申師任堂이 客地에서 故鄕에 계신 어버이를 生覺하는 마음의 望雲之情을
聯想케 하는 詩로서 思親의 詩와 더불어 어머니를 向한 師任堂의 愛情이 얼마나
깊고 哀絶한가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李栗谷의 어머니이신 申師任堂이 늙으신
親庭 어머니를 홀로 두고 서울 媤宅으로 떠나는 그 슬픔을 잘 表現하고 있다.
실제로 오죽헌(烏竹軒)에 가보면
오죽헌 뒤편에 삼족오(三足烏)를 연상케 하는 까마귀가
논밭에서 뛰놀며 날갯짓을 하고
대나무줄기 역시 검은빛을 띠고 있다.
어쩌면 까마귀 오자와 검을 오자의 합성된 모습이 아닌가할 정도로
기이함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것이 까마귀이든 검은빛의 대나무이든
상징성이 주는 오묘한 느낌은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명성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경풍수지리학회장이자 서경대 김정인 교수에 의하면
조선의 3대 석학을 꼽으라면 퇴계 이황(1501~1570), 율곡 이이(1536~1584),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생각난다. 안동에 가면 퇴계 유적지가 있고, 강릉과 파주에 가면 율곡의 유적지, 전라도 강진과 경기도 남양주에 다산 유적지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유적지에 모여들어 성현들의 인생과 사상을 더듬어 본다.
도산서원은 퇴계선생이 공직생활을 마치고 은둔하기에 좋은 장소로 잡은 곳이다. 퇴계는 자신이 서당자리를 잡게 된 경위를 “도산잡영병기”에 기술하고 있는데 이곳은 산이 그다지 높고 크지는 않지만, 터가 넓고 형세가 빼어나며 방위를 보아도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고 주변의 산봉우리와 계곡이 모두 이곳을 향하여 읍(揖)하며 감싸 도는 모습이라고 하였다. 낙동강물이 좌에서 우로 횡류 하는데 백호가 겹겹으로 역관해주는 용수의 배합이 뛰어나고, 양택이 기본요건인 배산임수, 전저후고, 전착후관 3대 조건을 만족한다.
퇴계선생 유적지, 율곡선생 유적지, 다산 선생유적지 모두 풍수적 명당에 위치한다.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선조들의 발자취와 사상을 돌아보고 풍수지리의 흔적을 되짚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율곡송(栗谷松)
소나무는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는 군자(君子) 식물이다.
곧은 덕과 굳센 절개에 대하여 옛사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소나무의 기이한 형상을 보니 천공(天工)의 오묘한 조화를 빼앗았다.
한참을 바라보노라면 청아한 운치를 느낄 것이다.
소나무가 사람을 즐겁게 하는데 어찌 사람이 즐겨할 줄 몰라서야 되겠는가.
- 율곡 이이의 소나무 예찬에서 -
율곡매(栗谷梅)
이 나무는 1400년경 이조참판을 지낸 최치운이 오죽헌을 건립하고 별당 후원에 심었다고 하며, 신사임당과 율곡선생이 직접 가꾸었다고 전한다.
사임당은 고매도, 묵매도 등 여러 매화그림을 그렸고 맏딸의 이름을 매창(梅窓)이라고 지을 만큼 매화를 사랑했다. 사임당 당시 율곡매는 상당히 굵었을 것으로 보이며, 본줄기는 고사하고 곁가지가 자란 아들나무로 짐작된다.
비주 유장하의 딴지세상 블로그에 의하면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u2u3u&logNo=60211258402 )
파주에 있는 율곡선생 유적지는 율곡 이이 관련 유적을 대표하는 곳으로 율곡 이이를 배향하고 있는 자운서원(紫雲書院)을 비롯하여 이이와 신사임당의 묘소를 포함한 가족묘역이 한 공간에 모여 있는데 한 인물에서 근원한 문화유산이 모여 있는 장소로서의 가치가 큰 곳이다.
자운서원(紫雲書院)은 조선시대의 대학자인 문성공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 선생을 배향한 유림의 향기가 가득한 곳이다.
광해군(光海君) 7년(1615)에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유생(儒生)들이 율곡 선생의 선영(先瑩)이며 선생의 묘(墓)가 있는
천현면(泉峴面) 동문리(東文里)에 서원(書院)을 세우고 사당(祠堂)을 지어 제향을 받드니 효종(孝宗) 원년(1650)에 자운서원(紫雲書院)으로 사액(賜額)되었다.
숙종(肅宗) 39년(1713) 선생의 후학(後學)인 사계(四溪) 김장생(金長生)과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 두 분을 추가로 함께 배향하고
선현의 가르침을 공경하고 지방교육을 장려하면서 후진양성에 이바지 하는 역할을 다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인 고종(高宗) 5년(1868)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 의해 훼철되어 빈터에 묘정비만 남아 있다가
1970년 전국 유림들의 기금과 국가지원을 받아 복원하고 서원 주변을 정화하였다.
비주 유장하의 딴지세상 블로그에 소개된
화석정(花石亭)에 관련된 파주문화원 자료에 의하면
한양과 송도를 거쳐 신의주로 통하는 임진나루터 옆 기암절벽 위에 자리 잡고 있는
화석정(花石亭)에 얽힌 역사와 유래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고려 말 목은 이색(牧隱 李穡)과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와 함께 삼은(三隱)이라 불리던
야은 길재(冶隱 吉再)선생의 유지(遺址)가 남아 있는 곳이다.
그 후 율곡의 증손 이후지와 이후방이 정자를 다시 재건하였으나 한국전쟁 중에 소실되었고
1966년에 정부보조와 각지 유림들의 정성으로 새로 복원하고 대통령 친필로 화석정(花石亭)이란 현판을 걸게 되었다.
그 후로 주위 환경을 정화하고 나서 1974년 9월 26일 지방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되었다.
화석정에는 많은 시액(詩額)이 있었으나 그중 유명한 것은 율곡 이이가 8세 때 지었다고 전해지는 '팔세부시(八歲賦詩)' 가 남아있다.
이 밖에도 서거정, 이숙함, 이의석, 이의무, 권람, 정철, 오억령, 송시열, 박세채 등이 화석정에서 시조를 읊었다 한다.
팔세부시(八歲賦詩)
林亭秋已晩 (임정추이만) 숲속 정자에 가을 이미 늦으니,
騷客意無窮 (소객의무궁) 시인의 시상은 끝이 없구나.
遠水連天碧 (원수연천벽) 먼 물줄기는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霜楓向日紅 (상풍향일홍) 서리 맞은 단풍은 해를 향해 붉도다.
山吐孤輪月 (산토고륜월) 산은 외로운 둥근 달을 토해 내고,
江含萬里風 (강함만리풍) 강은 만리의 바람을 머금었도다.
塞鴻何處去 (새홍하처거)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고?
聲斷暮雲中 (성단모운중) 소리가 저녁 구름 속에 끊어지도다.
암하노블의 잡기장 블로그에 의하면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geugsoon&logNo=220024770595 )
율곡 이이 신도비에는 율곡의 일대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 비는 이항복이 글을 짓고, 신익성을 글을 새겼다. 이이는 1536년(중종 31) 강릉 외가에서 태어났다. 오늘날 강릉의 명소로 꼽히는 오죽헌의 몽룡실이 바로 그곳이다.
신사임당은 이이의 부친인 이원수와 혼인하고서도 37살 되던 해 집안 살림을 맡아 하기 전까지는 서울의 시가보다는 친정에서 주로 살았다. 이런 풍습은 16세기까지 우리나라의 보편적 결혼 풍속과 관련된 것으로, 당시까지는 남자가 여자 집에 가서 혼인하여 자식을 낳고 이내 계속 생활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를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이라고도 한다. 이이가 6살 때까지 강릉 오죽헌에서 생활하게 된 것은 이런 까닭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자경문[自警文] (Basic 고교생을 위한 윤리 용어사전, 2001.12.20, (주)신원문화사)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율곡이 어머니를 여읜 채 상심하여 19세에 불교를 연구해 보려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가 20세 되던 해 봄에 강릉의 외조모가 계신 곳으로 돌아 나와, 자기 수양의 조문을 삼고자 지은 글의 본문을 살펴보면,
1. 먼저 그 뜻을 크게 가져 '성인'으로서 표준을 삼아 털끝만큼이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한 동안은 내 할 일이 끝난 것이 아니니라.
2. 마음이 안정된 사람은 말이 적다. 그러므로 마음을 안정하는 것은 말이 적은 데서부터 비롯하느니라. 말할 만한 때가 된 다음에 말을 한다면 그 말이 간략하지 않을 수 없느니라.
3. 오래도록 놓아 버렸던 마음을 하루아침에 거두어서 힘을 얻는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느냐. 마음이란 산 것이라. 안정된 힘이 이뤄지지 못하면 흔들려서 편안키 어려우니라. 만일 생각이 어지러울 적에 그게 귀찮아 마음먹고 끊어 버리려고 한다면 점점 그 어지러운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며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 같음을 알리라. 설혹 그것을 끊어 버린다 하더라도 다만 그 끊어 버렸다는 생각이 가슴 속에 가로놓여 있다면 그 또한, 허망한 생각이니라. 그러므로 마땅히 생각이 어지러울 때에 있어서는 정신을 가다듬어 가만가만 다룰 것이요, 그 생각에 이같이 애쓰기를 오랫동안 하노라면 반드시 차분히 안정되는 때가 있을 것이니, 무슨 일을 하든지 전심전력해 한다면 그 또한, 마음 안정시키는 공부가 되느니라.
4. 언제나 조심스레 경계하고 혼자 있을 때에 삼가는 뜻을 가슴 속에 품은 채 시시각각 게으르지 아니하면, 모든 삿된 생각이 저절로 일어나지 못하리라. 만 가지 악이 모두 다 혼자 있을 때에 삼가지 않는 거기서 생겨나느니라. 혼자 있을 때 삼갈 줄 안 다음에야 참으로 저 자연을 사랑하며 즐길 수 있는 고상한 뜻을 알 수 있느니라.
5. 새벽에 일어나서는 아침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밥 먹은 뒤에는 낮에 할 일을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어서는 내일 해야 할 일을 생각할지니, 만일 일이 없으면 그만두려니와 일이 있으면 반드시 적절하게 처리할 방법을 생각해 낸 다음에 글을 읽을지니라. 글을 읽는다는 것은 옳고 그름을 분간해서 실천에 옮기려 하는 것이니 만일 사물을 살피지 않고 똑바로 앉아 글만 읽는다면 쓸데없는 학문이 되느니라.
6. 재물, 영예, 그건 설사 그 생각을 쓸어버릴 수 있다 하더라도 만일 일을 처리할 적에 털끝만큼이라도 편의한 것을 택할 생각을 가진다면 그 또한, 이익 탐하는 마음이니 더욱 살펴야 할지니라. 무릇 일을 만났을 적에 만일해야 할 일이거든 정성껏 하되 싫증내고 게을리 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며, 또 안 해야 될 일이라면 딱 끊어 버려 가슴 속에서 옳고 그른 것이 서로 싸우게 하지는 말지니라.
7. 언제나 저 <맹자>에서 이른바 '한 가지 옳지 못한 일을 행하고 한 사람의 죄 없는 이를 죽이고서 천하를 얻는대도 하지 않는다.'는 그 생각을 가슴 속에 간직할지니라.
8. 횡액과 역경이 닥쳐올 적에 스스로를 돌이켜 보아 깊이 반성함으로써 저쪽을 감화하도록 할지니라.
9. 제 집안사람들이 감화되지 못한다는 것은 다만 성의가 모자라기 때문이니라.
10. 밤에 잘 때나 아픈 때가 아니면 눕지 않아야 하고 비스듬히 기대지도 말 것이며 또 밤중일지라도 졸리는 생각이 없으면 눕지 말되, 다만 억지로 할 것은 아니니라. 그리고 낮에 졸음이 오면 마땅히 정신을 차려 바짝 깨우칠 것이요, 그래도 눈까풀이 무겁거든 일어나서 두루 거닐어 깨도록 할지니라.
11. 공부에 힘쓰되 늦추지도 말고 보채지도 말며, 죽은 뒤에야 그만둘 것이니, 만일 그 효과가 빨리 나기를 구한다면 그 또한, 이익 탐하는 마음이니라. 만일, 이같이 아니 하면 어버이에게서 물려받은 몸뚱이를 욕되게 함이라. 그게 바로 사람의 아들 된 도리가 아니니라.
월우당(http://blog.daum.net/kysroa/8870668) 블로그에 의하면
신사임당(申師任堂)의 당호가 사임당(師任堂)이고 본명은 인선이라고 한다.
당호란 본채나 별채의 이름을 말한다. 그리고 당(堂)은 안주인이 기거하는 집안의 한 건물을 말한다.
신사임당이 강릉 오죽헌에서 자신이 거처하는 곳의 당호(堂號)를 지었는데, 후세의 사람들은 그를 신사임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즉, 사임당은 그의 호(號)가 아니라 그가 거처하던 건물의 이름이다.
2014년 6월 14일 토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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