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예수께서 존재하지 않았다면 종교로 전락했을 것이다

청아당 2014. 3. 11. 10:52

예수께서 존재하지 않았다면 종교로 전락했을 것이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우리가 마음 놓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 중에서도 하나님일 것이다.

한 몸으로 되었다가도 분신술처럼

셋이 되기도 하는 삼위일체!

 

세례․입교․유아세례 문답 지침서에 의하면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

이 세분은 동등하신 하나님으로서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이라고 한다.

즉, 삼위가 있으나 본체는 하나이신 한 하나님이며

권능과 영광이 동등하다고 한다.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진리는 사람의 이성으로 풀 수 없는

기독교의 신비로운 진리중의 하나라고 한다.

 

이 얼마나 변화무쌍한 변신인가?

태초부터 우리들을 위해 존재하는 우주의 절대신 이기에

생명에서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어루만져주고 있는

불기둥 같은 성령이자

신비의 에너지이자

기적의 에너지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분명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의 절대신 이기에

우리들의 눈을 정화시키거나

영적능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이 땅에

선하고도 선한 예수라는 이름으로 태어나

각종 기적과 구원 그리고

영생을 꿈꾸도록 생명의 말씀을 전한 후

우주본원으로 회귀하였다는 사실은

우리들의 마음을 위로하기위한 하나의 구제책이요

직접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아야만 진실을 믿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기야

그 끝이 어디든

그 시작이 어디든

존재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견물생심이라고 했던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존재하기보다는

한번쯤은

인간의 모습을 닮은 예수로 변신하여

하나님의 발걸음으로 보폭을 맞춘 후

우리들의 곁에 다가와 호흡을 불어넣어주었다는 사실은

가히 혁명적인 아이디어요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편한 노릇인가?

그것도 그것이지만

하나님 자신만 믿어준다면

그 모든 것을 해결해주겠다고 하는데

이보다 더 간단한 조건이 또 있을 수 있겠는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우리들을 위해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자

수호령 같은 역할까지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감동을 넘어

서로가 서로를 위해 주고받는

한편의 아름다운 정경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구약시대부터 시작하여 신약시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부각시키거나

자신을 각인시키고 있기에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조용한 곳에서 두 손을 모은 후 심기일전하여

하나님과 만나기만하면 되는 것이다.

이보다 더 간편한 방법이 또 있겠는가?

 

그러고 보면

김명우 목회자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결국 삼위일체와 함께함으로써 팔자가 바뀌게 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세워 논 팔자를 옆으로 눕혀놓으면

무한대가 되어져 그 시작과 그 끝을 알 수 없게 만든다고 한다.

만약에 예수께서 존재하지 않았다면 종교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성경의 중심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구약성경의 주제가 ‘오실 메시야’ 라면

신약성경의 주제는 ‘오신 메시야’ 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메시야의 뜻은

① 유대 민족의 구세주(=구원자) ② 예수 그리스도(=메시야) ③ 메시아(=메시야)로 통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란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자 복음을 지닌 사람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잠시 세례를 담당하고 있는

김명우 목사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성경이야말로 ‘인생 사용설명서’ 라고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종교를 만들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종교를 끝내기위해 오신 것이라고 한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일방적인 통로가 아닌 쌍방이 서로 아는 사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항상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나거나 하나가 되어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죄인을 위해 죽은 예수이기에 비로소 인격체가 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타종교의 교주와 차별화되어져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교주보다는

인류애를 위한 배려와 희생을 통해 값진 사명을 추구하고 있다고 한다.

 

종교가 이기주의에 무게중심을 두다보니

극단적으로 내몰릴 수도 있지만

종교가 아닌 기독교는 오로지 하나님을 대변하고 있기에

종교이면서도 종교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로 불리어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더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해놓은 성경이 존재하기에

신․구약을 통틀어

마음 놓고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다시 말하면

항상

가슴에

머리에

심장에 심어놓고 살아라하는 소리와 같다.

잊을만하면 또다시 머리를 흔들게 하는 바람처럼

종교를 떠나

세뇌교육의 선도적인 역할을 다하고 있는 개신교인 기독교는

우리들의 우상이자

우리들의 모습이자

우리들 내면의 세계로 통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리고 가도 가도 그 끝이 보이지 않거나

잡았다가 놓거나

놓았다가 잡으며 살아가고 있기에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원죄보다 더 무서운 지금 현재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원죄에 대해선 태어나기 이전에 발생한 일이기에

우리들에게 위압감으로 다가오거나

그리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고나면 죄를 짓게 되는 악의 축 중심에 서있다는 사실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회개하며

죄를 짓고

회개하며

죄를 짓고

회개한 후

죄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이 더 암담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그 끝이 어디에서 끝나는지도 모른 채

거대한 우주의 수레바퀴에 몸을 맡기며 회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끔찍한 일로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기독교를 대변하는 예수가 구원과 영생을 약속하며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만 믿는다면

그 모든 복잡한 절차를 면죄해주거나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채워주기에

이제는 우리들 마음대로 살아가기보다는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는 일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을 상대로 대항하거나 반항해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자신의 뜻보다는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이

오히려 더 현명한 선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빙빙 돌아봐야 제자리로 되돌아올 것이라면

처음부터 순종하거나 순응하며 사는 것이

서로에게 더 좋은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하나를 포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훨씬 더 많다면

이보다 더 큰 매력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뜻대로 살거나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해서

의무처럼 짐 지어진 고난과 시련까지 피해갈 수는 없는 일이다.

만약에 고난과 시련마저 면죄해준다면

사람으로서 살아가야할 이유를 상실할지도 모르기에

이것만큼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도록 안전장치를 설치해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죽음과 죽음보다 더한

삶의 경계에서 헤매고 다닐 때 또는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마음 놓고 우주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의지처가 있다면

그것처럼 마음 든든한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똑같은 고난과 시련일지라도

자신을 지탱하게해줄 수 있는 지팡이만 있다면

더 이상 그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2014년 3월 9일 일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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