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하나님의 속성 - 열한 번째(2)

청아당 2013. 12. 1. 20:41

하나님의 속성 - 열한 번째(2)

 

본 교재인 《일대일 제자양육 성경공부》에 기록된

“하나님의 속성” 일부를 발췌해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한다.

하나님과 그분의 성품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불신하고 의심하며 사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 분의 속성을 좀 더 잘 알아야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품에 관해서 자세히 가르쳐주고 있다.

하나님에 대해 모르면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기가 어렵고

방향 감각 없이

인생을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릇된 행동을 하기가 쉽다고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생각은

하나님에 관한 생각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은 하나님의 진리와 일치해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참 예배를 드릴 수가 있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가 있다고 한다.

 

하나님의 속성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삼위일체이다.

예수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 14:7).

그리고 그 예수님을

우리에게 알리는 분은 성령님이라고 한다(요한복음 16:14).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성부, 성자, 성령 이 세 분을 알아야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 28:19) 라고 하신 명령은

이 세 분이 각각 구별되면서 같은 권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예수님이 마가복음 10:17-18에서는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를 분명히 구분하셨다고 한다.

이 두 말씀이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를 설명해주고 있다고 한다.

사도행전 5:3-4에서는

성령을 속이는 것이 곧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라고 한다.

성령은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하나님과 구별된다고 한다.

성령이 자기 영광보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요 16:14)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구별되어지고 있다.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다른 종교나 철학이 말하는 신들과

우리 하나님을 구별할 수 있어야만 바르게 믿을 수 있다고 한다.

 

지금껏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이 제각기 다르게 표현되어지거나

선입견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비쳐지고 있다는 사실은

객관적인 하나님을 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입맛에 맞게

주관적인 하나님을 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잠시 육적인 아버지의 모습들을 자식의 입장에서 살펴보자.

친구처럼 편한 아버지가 있는가하면

가까이 다가가 말 한번 건네기조차 어려운

엄격한 아버지가 있을 수 있고

아버지라는 존재감마저 없는 아버지도 있을 수 있다.

게다가 술에 중독된 채

가족이나 타인을 폭행하는 아버지가 있을 수 있고

공포에 떨게 하거나 정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질병으로 고통 받는 아버지도 있을 수 있다.

그밖에 분류하기 힘든

아버지의 자화상이 따로 존재할 수도 있다.

 

육적인 아버지

육적인 부모님

아버지에 대한 이해를 하려면

다양한 모습으로 각국에 나타나고 있는 이미지를 알아야한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한국적인 하나님이 있는가하면

미국적인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쉽게 말하면 한국적인 하나님은 보수성이 강한 아버지를 닮아있고

미국적인 하나님은 개방성이 강한 아버지를 닮아있다고 한다.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 하나님이라 부르고 있는 것처럼

친근함과 따뜻함이 녹아드는 선한 하나님으로 존재할 수도 있고

저주나 악담으로 일관한 악한 하나님으로 존재할 수도 있다.

과연 우리들에게 인식된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때로는 어머니처럼 따뜻하고 푸근한 아버지로 다가올 수도 있고

궁극의 세계로 이끄는 아버지 하나님으로 비쳐지기도 하고

시작도 끝도 없는 공간에서 우주를 관장하며

태초 이전이나 이후에 비춰지는 아버지 하나님은

여전히 과거의 악한 하나님으로 비춰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지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이라면

한순간에 인간을 구원해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절차가 까다로운 형식을 차려놓고

순종하라

기도하라

믿어라 말하고 있다.

분명 이 속에는 피치 못할 사연이 있거나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주를 관장하기에는 너무 연로하지는 않은지

뒤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할 때라고 본다.

그리고 우주를 창조할 때

공력을 너무 많이 소비하는 바람에

하나님의 능력이 저하될 수도 있었을 것이고

끊임없이 퍼주어도 충만함을 느끼지 못한 채

기복신앙에 매달리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인간에 대한 애정이 결핍되고 있지는 않은지

심히 우려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들의 눈높이나 신앙심에 의해

같은 아버지 하나님일지언정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때로는 선한 하나님으로

때로는 악한 하나님으로

우리들에게 비춰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구약에서는 성부로

신약에서는 성자로

그리고 구약과 신약에서는 성령으로 존재하고 있는

아버지 하나님은 신학자들에 의해

양태론 까지 들먹이게 하는 수난을 겪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는 하나님의 친자로 태어났기에

호적에서 뽑아내고 싶어도 뽑아낼 수 없다는 장점이 있지만

비록 하나님이 주관하고 있는

생명의 책에 기록된 성도들이지만

양자나 양녀인 우리들을

언제든지 입양에서 파양시킬 수도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거나

각종 우상숭배를 일삼는다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질투심을 피해갈 수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기에

양자나 양녀들이 짊어지고 가야할 최대의 단점이자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자들의 운명이라는 사실이다.

이 얼마나 불합리한 일인가?

이 얼마나 불공평한 일인가?

한번 입양된 자녀들이라면

친자 못지않게

끝까지 책임질 줄 아는 하나님이어야 하는데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더 달려야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얼마나 더 살아야 알 수 있는 일이기에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오늘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가야할 길이 있다면 가면 될 것이요

멈춰야할 길이 있다면 멈추면 될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 우주상에서 유일신이자 절대자이기에

그 누구에게도 지탄받지 말아야할 하나님이지만

현실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탄이나 비난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서 살아계실 때

유전자검사를 받지 못한 채

또는 친자로 판명 받지 못한데서

기인하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있는 접근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본다.

이러한 빌미를 제공한 하나님도 문제이지만

예수 또한 이러한 빌미를 제공한 점에서

결코 자유로워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이런 이유 때문에 여러 가지 부작용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신흥종교의 수장들이 내세우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문제가

가장 심각하게 부각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는 하나님의 둘째 아들이라 하고

어떤 이는 하나님의 셋째 아들이라 하고

심지어는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만천하에 공표까지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유전자 검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주는 부분이라고 본다.

잠시 여기서 삼위일체의 본질을 살펴보자.

하나님을 중심축으로 회전하는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님의 또 다른 모습이자

같은 권위로 한 몸으로 엮어져 있고

한울타리에서 한솥밥을 먹고사는 삼위일체이기에

하나님의 모습이 편안하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삼위일체는 각각 다른 모습으로

제 위치에서 역사(役事)를 행하며

동시다발적으로 능력을 발휘하거나

홀로 한 몸인 것을 잊은 채

분신술까지 써가며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분명 하나님은 한분인데 순식간에

예수로 변했다가

성령으로 변했다가

하나님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멀티플레이에 능한 하나님인가?

그건 그렇고

인간이 추측하고 있는

지구나 우주의 역사조차 무시해버린 하나님이기에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 때문에 실망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필요할 때는 하나님의 숨결이 느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필요한 만큼

조건 없이 모든 것을 다 주는 것이 아니라

목마를 때 마시는 약수처럼

조금씩 모자라게 주고 있기에

하나님의 통 큰 손만 기다리며 정성껏 기도를 하기도 한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당연히 모두에게 공평성을 내세워

부족하게 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생각을 해보아라!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줘버리면

더 이상 하나님을 따르지 않거나

무시해버리는 경향이 있어

조금 모자라게 주는 것은

영악한 인간들을 다스리는 데 이보다 더 현명한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은 난이도 높은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단순하고 따분한 것보다는

때로는 미로를 향해 달려가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때로는 상상할 수 없는 세계를 향해 달려가는 것을 좋아하기도 한다.

우리가 종교를 믿는다하여

고난과 시련을 피해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종교와 상관없이 고난과 영광의 용광로에서

기쁨과 행복을 노래하며

더 큰 성숙함을 경험하기위해 달려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종교를 믿는다하여

고난과 시련을 면제해주지 않듯이

또는 깨달음을 얻었다하여

그 모든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이 겪어야할 고난과 시련까지 면제해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 모두가 겪어야할 일이자

운명처럼 또는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살아가야하기 때문이다.

가끔씩 종교에 의지하다보면

예기치 않게 불미스러운 일이나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불행한 일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경우는 많지만

그 누구도 하나님이 쳐놓은 덫을 피해갈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여러 번 겪어야할 고난과 시련을 감소해주거나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하거나

미리 지름길로 달려가 불행을 피해갈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설치해놓기도 한다.

종교를 믿은 후 받을 수 있는 혜택이라면

바로 이러한 일들이나

게으름에서 탈피하여 부지런해진다는 사실이다.

쉽게 말해 근검절약이 생활 속에서

몸에 배어있다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개신교인 기독교도

유대교 입장에서 보면 이단으로 시작한 일이었고

이단으로 시작한 기독교가 기틀을 견고히 다졌다고 해서

타종교에 대해

이단이라고 비난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 또한 어불성설의 극치를 달리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야할 일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종교를 통해 인간이 피폐해지거나 가족까지 등지며

각종 불이익을 당하는 이단의 종교라면

당연히 피하거나

종교를 선택할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야하지만

그렇지 않고 건전한 사상으로 종교생활을 행하는 이단이라면

개인적으로 포용해야할 일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면

대체적으로 정통성을 따지는 이단일수록

신흥종교인 이단을 더 가혹하게 밀어붙이거나

같은 교파까지 비난을 일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교회의 잘못된 점을 비난하기 전에

우선 자신부터 목욕재계(沐浴齋戒)하듯이 자기정화를 행한 후

반성과 회개를 해야 할 일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이단이라고 해서 다 같은 이단이 아니듯이

이단을 껴안고 함께 달려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그나마 모양새가 좋아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비록 이단으로 시작한 기독교이지만

2000년 이상 버텨온 종교이기에

그 누구도 철옹성 같은 기독교를 무너뜨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동안 숱한 성직자들이

목숨을 내건 순교로 성역을 넓혀왔고

지금껏 각종 지탄이나 비난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버텨온 흔적들이 살아 숨 쉬고 있기에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거나 도태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교회를 운영하고 있는 장로나 목회자께서

성도들을 끌어 모으거나 살아남기 위해

각종 비리를 저지르는 경우는 많지만

그것을 떠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며 변화되어져온 기독교가

무너지도록 방치하지 않는다면

시대에 맞게 목회자도 변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성경의 내용이 영감축자설이나 성서무오설을 내걸고 있지만

성서무오설 만큼은 잘못된 부분이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인정을 하던 부정을 하든

기독교는 여전히 앞으로 달려 나갈 것이고

그로 인해 불이익은 있을 수 있지만

이미 고등종교에 편입된 입장이다 보니

함부로 기독교를 무너뜨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삼위일체로 막아내거나

하나님의 분신술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이기에

하나님을 정 가운데에 두고 회전을 시켜보면

구약시대에는 성부로

신약시대에는 성자로

이 둘을 합한 구약과 신약시대에는

성령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고 보면

끊임없이 선지자들을 내보내

하나님 자신을 믿어달라고 각종 압력을 넣고 있는 것을 보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시대를 달리하면서까지

하나님 자신을 믿어달라고

애원하고 있는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변의 달인이자

변신술의 달인이요

분신술의 달인이기에

과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내일인 미래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숨결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믿고 시작하는 종교생활이야말로

우리들을 위로해주고

막다른 골목길에 이를 때마다

위안과 보상을 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 얼마나 가슴 든든한 일인가?

필요할 때마다 우리들에게 선물을 준다는 것은

하늘의 축복이요 땅의 축복이기에

하나님은 곧 성령이자 예수이자

우리들의 영혼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성경을 읽다보면

유불선과 일맥상통한 점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들은

우주대광명의 가장 안쪽인 고요의 극점이자

색과 공으로 이루어져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아

어둠을 물리치는 빛과 빛을 잡아가두는 어둠과의 경계에서

공존하며

색과 공이 우주를 순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 같은 어둠이라고 해서 어둠만 있는 것이 아니요

다 같은 빛이라고 해서 빛만 있는 것이 아니요

어둠과 빛의 순환 속에서

확인되지 않은 우주의 물체조차 영향을 입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만 어둠속에서도 빛(우주의 별 등)이 존재할 수 있고

빛 속에서도 어둠(그림자 등)이 존재할 수 있듯이

어둠과 빛은 하나요,

빛과 어둠 또한 하나로 연결되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유불선의 독특한 동양사상의 표현방식과 서양사상의 표현방식에

차이점은 있을 수 있지만

그 본질은 하나로 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서양의 종교인 기독교도

동양사상의 영향력을 크게 입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닌 것 같다.

 

예를 들면 《일대일 제자양육 성경공부》에 기록된 내용에 의하면

하나님은 영원하다며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시던 때는 결코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시작도 끝도 없는 분이라고 한다.

그리고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며

하나님은 항상 살아 계셔서

현재처럼 분명하게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본다고 한다.

과거에 역사하신 하나님,

장래에도 영원히 역사하실 하나님이

현재에도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특히 그리스․로마 신화나 전설 같은 내용들을 과대 포장하여

전하고 있는 내용이나

예술과 문학적 감각이 뛰어난 점들을 비교해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성경의 내용이 정교하게 잘 다듬어져 옥석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한발 앞서 동양사상을 뛰어넘기 위한 기교가

곳곳에서 발견되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오랜 세월 속에서 금과옥조와 같이

잘 다듬어진 흔적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분명 서양의 종교인데 동양사상이 깃든

동양의 종교와 그 뜻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은

서양은 동양을

동양은 서양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지역적인 한계를 벗어나려는 몸부림들이 엿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道)의 세계인 깨달음을 이미 설파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논리정연하게 불교와 대조해보아도

단 한 치도 뒤로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을 내세워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다며 기죽이기에 나서고 있다.

그리고 불리할 때마다

지식인의 입을 틀어막은 후 반항하지 못하게 독설을 퍼붓거나

또는 비유적으로 은닉해놓거나

곳곳에 성경의 내용이 삭제되거나 변개되지 않도록

각종 안전장치를 풀어놓았다는 것은

그만큼 성경의 소중함을 깊이 있게 간직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속성을 알기 위해선

보다 더 깊이 있는 명상이 필요하고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가장 안정된 자세가 요구되어지기도 한다.

 

 

참고로 본 교재인 《일대일 제자양육 성경공부》에 기록된

“하나님의 속성” 일부를 발췌해보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만 있는 성품(비공유적 속성)

이러한 성품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므로 피조물이든 영적인 것이든 이 성품을 닮은 존재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성품들은 역대상 29:10-13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주권자이십니다.

이 말은 지배자, 최고의 통치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의 최고 통치자이십니다.

(2)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시던 때는 결코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시작도 끝도 없는 분이라고 한다.

그리고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며

하나님은 항상 살아 계셔서

현재처럼 분명하게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본다고 한다.

과거에 역사하신 하나님,

장래에도 영원히 역사하실 하나님이

현재에도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3) 하나님은 전지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분이 새롭게 발견하시는 사실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도의 구원에 대해서, 이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서 그분이 모르시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4)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모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피해 숨을 수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곳에 계시다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고 그분과 동행하는 복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5)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힘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큰 힘이 있으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의 능력으로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전하시고, 구속하시고, 특별히 우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

(6) 하나님은 변치 않으십니다.

약속하신 일들을 모두 이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다양하게 변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

 

2.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있는 성품(공유적 속성)

이러한 성품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인자 :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은 사랑하는 대상에게 어떤 장단점이 있든지 상관없이 아낌없는 사랑을 베푸십니다. 그분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 대신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게 하심으로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롬 5:8).

(2) 성실 : 하나님은 언제나 진실하십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진리를 추구합니다. 인간이 찾는 거짓 없는 진리는 하나님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거짓이 없습니다(딛 1:2).

(3) 의로움 : 하나님은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그분 안에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도 완전함을 요구하십니다. 이런 실현 불가능한 기준은 구원이 인간적으로 불가능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해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신 32:4).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도 하나님처럼 의로워야 합니다(마 5:48).

(4) 공의 : 하나님은 공정하십니다. 하나님의 공명정대함은 심판에서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아주 공정하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말은 어떤 이에게는 돌이켜 회개할 수 있는 위안의 말씀이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경고가 될 것입니다.

 

3. 삼위일체

사람들은 자연 만물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롬 1:19). 그러나 그렇게 해서 얻은 지식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알아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6:14).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성부, 성자, 성령 이 세 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 28:19)라고 하신 명령은 이 세 분이 각각 구별되면서 같은 권위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1) 요한복음 10:30을 읽으십시오. 예수님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셨습니까?

그런 예수님이 마가복음 10:17-18에서는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를 분명히 구분하셨습니다. 이 두 말씀이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를 설명합니다.

(2) 사도행전 5:3-4에서는 성령을 속이는 것이 곧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성령은 누가 보내십니까?(요 14:16)

성령은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하나님과 구별됩니다.

(3) 성령을 다른 말로 무엇이라 부릅니까?(요 16:7)

성령이 자기 영광보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요 16:14)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구별됩니다.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다른 종교나 철학이 말하는 신들과 우리 하나님을 구별해서 바르게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축으로 삼은 후 구약은 성부의 하나님으로 신약은 성자의 하나님으로 성령은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으로 표현되어지고 있습니다.

 

2013년 12월 1일 일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