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하나님의 말씀-성경 - 열두 번째(1)

청아당 2013. 12. 8. 21:02

하나님의 말씀-성경 - 열두 번째(1)

 

본 교재인 《일대일 제자양육 성경공부》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성경” 일부를 발췌해보면 다음과 같다.

 

성경은 지식을 증가시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위해 주신 것이다. - 드와이트 엘 무디

성경에 대한 무지는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다. - 제롬

나는 대학 교육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한다. 그러나 대학 교육 없는 성경 지식이 성경을 모르는 대학 교육보다 훨씬 더 값지다. 성경 지식이 충분한 사람은 교육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어떤 것에 대한 배움도, 폭넓은 지식도, 성경 지식과는 바꿀 수 없다. - 윌리엄 리용 펠프스

 

성경은 약 1,500년 동안 40여 명이 쓴 책을 한 권으로 묶은 책입니다. 구약은 모세와 선지자들이 하나님께 받은 말씀입니다. 역사를 통해 계속 입에서 입으로, 문서로 전승되어 오다가 주전 5세기경에 모세 오경이, 주전 2세기경에 선지서와 문학서가 각각 정경으로 확정되었습니다. 구약은 39권이며 대부분 히브리어로 쓰였습니다.

신약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사도들의 기록과 서신을 모은 것입니다. 초기에는 그 내용이 구전되었고, 사도들이나 그 계승자들이 살아 있어서 지금처럼 확정되지 않은 채 있다가 주후 4세기경에 지금의 성경이 정경으로 채택되었습니다. 교회의 권위라 채택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성경으로 사용하던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신약은 27권이며 전부 헬라어로 쓰였습니다.

성경은 교양이나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지식과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에 필요한 여러 지침을 주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며

모태 목회자나 모태 성도들의 신앙심을 듣다보면

참으로 신기한 생각이 든다.

보지 않고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한 것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한 것이다.

태아 때부터 어머니를 통해 받아들인 종교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다듬어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기한 것이고

삶의 회의나 종교에 대한 믿음의 깊이가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가 신기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허와 실을 분별하거나

그 깊이를 따질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습관적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종교가 신기할 뿐이다.

어떻게 보면 확인되지 않은 미확인 비행물체인 UFO처럼

존재 자체를 긍정하며

자연스럽게 설교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순종과 거역할 수 없는 신앙심에 대해 참으로 경외감마저 들기도 한다.

그리고 봉사와 신앙심을 굳건하게 다져주고 있는

말씀과 성경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고

40년 이상 지속시켜가며 새벽기도나 정시기도

그밖에 각종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울 뿐이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목회자의 말을 들어보면

불신자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하거나 거부반응을 보이는 성도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기도 한다.

그 모든 것을 떠나

믿기만 하면 간단한데

있는 그대로 믿기만 하면 되는데

믿지 못하는데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에

전도하는 과정이 더욱더 어렵게 느껴진다고 한다.

아마도 무교에서 종교를 선택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여러 가지 제약과 행위가 묶이는 곳이다 보니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미 다 아는 사람은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듯이

처음 가는 초행길인데 재촉한다고

쉽게 결정하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결정은 자동차 면허를 취득한 후

교통법규를 위반하여 처음으로 범칙금 통지서를 받는 경우

마치 처녀가 순결을 잃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듯이

종교를 선택하는 것 또한 순결을 잃는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록 무신론자이지만 그동안 어떻게 지켜왔는지 뒤돌아본다면

선택이란 그만큼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존의 신자라면 상관이 없겠지만

새신자로 등록하여 종교에 입문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은 것은

우선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하는 일이 등장하고

단계적으로 밟아나가야 하는 일이 많다보니

결정을 미루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어떤 이는 2년 이상 등록하지 않은 채 설교를 듣는 경우가 있고

어떤 이는 7년 이상 등록하지 않은 채 설교를 듣는 경우가 있고

어떤 이는 10년 이상 등록하지 않은 채 설교를 듣는 경우가 있음을 볼 때

그만큼 종교에 입문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건 그렇고

성경 말씀을 듣거나 읽다보면

공자가 내세우는 유교와

석가가 내세우는 불교와

황제(黃帝)와 노자(老子) 그리고 장자(莊子)가 내세우는

도교나 선도를 접하다보면

이 모든 것은 자연과 동화되어져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다.

하나라는 뜻은 그 모든 것을 묶어

우주와 하나요

지구와 하나요

사람과 사람이 하나요

일체유심조마저 하나로 귀일되는

깊고도 깊은 뜻으로 풀이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간과하며 지나치고 있는

숫자에 대해 살펴보아도

심오한 뜻이 담긴 ‘하나’의 중심축은

신비에서 평범으로 그것도 모자라

일상적인 언어나 숫자에서 묻어나고 있듯이

가장 흔한 숫자세기에서 시작되어지고 있는 ‘하나’는

우리들이 함부로 범접해서는 안 되는

우주의 힘이요

천하의 힘이요

고요의 극점인 하나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 등을 세다가 틀리면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숫자가 바로 하나이다.

이 얼마나 오묘하고 신비한 숫자인가?

처음부터 다시라는 말이

하나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은

그 모든 존재는

‘하나‘에서 출발한 후 ’하나‘에서 끝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만큼 우리들은 심오한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너무나 평범해서 잊어버리거나

그동안 너무나 일상화되어져서 잊어버리거나

그동안 아무렇게나 다루어온

숫자의 첫마디가 하나라는 것은

신비 속에서 평범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일상화되어버린 신비를 들춰내어

다시 캐내고 있다는 뜻과 같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 민족은 하나를 위해 몸바쳐왔고

복잡하게 엉켜있는 전체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하나로 귀일시켜왔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야말로

신비의 나라이자 평범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하나로 귀일되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들처럼

그 어느 곳을 찾아 헤매든

우리들의 발걸음은

하나에서 시작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렇지만 ‘하나의 비밀’을 캐내다보면

하나로 응축시켜 그 모든 존재를 묶어두려는 뜻도 있지만

혼란과 질서의 부조화를 다루려는 뜻과 함께

시작도 끝도 없는 하나’를 통해

우주의 신비를 들춰내고

지구의 신비를 들춰내고

우리들의 관계 속에서 발생되어지고 있는

무질서까지 밝혀내려는 심오한 뜻이 숨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야말로 그 모든 것을 대표하는 숫자이자 언어이기에

궁극의 세계에서 하나를 발견하고자하는 수행자 또한

하나에 갇혀 하나 속에서

평생을 허비하며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하나의 세계는

절대적인 빛이요

절대적인 공이요

색과 공이 공허에 갇힌 상태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가 존재할 수 있는 그 배경에는

하나님이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로 귀일하지 못한다면

하나에 대한 의미는 퇴색되어지거나 도태될 수도 있기에

하나의 힘은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신성한 영역이자

우리들의 근원을 밝혀주거나

우주의 비밀을 밝혀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얼마나 심오한 일인가?

이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하나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수행자들이 있다는 것도 그렇지만

도대체 하나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이다지도 하나에 대한 관심을 놓지 못하는 것일까?

하나야말로

혼란이자

무질서요

불통이요

침묵이요

묵언이요

명상인 것이다.

하나야말로 그 모든 것을 극명하게 밝혀내는 열쇠요

하나야말로 그 모든 것을 어둠으로 눌러 논 자물쇠이다.

어떻게 보면 하나를 통해 모든 것을 얻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하나를 통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숫자이자 덫인 것이다.

물론 기독교에서도 하나로 회귀하려는 과정을 들어

한곳으로 집중시키려는 노력이 뒤따르고는 있지만

불교나 도교 또는 선도보다는

그 정성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쉽게 말하면

기도 속에서 묻어나는

깊은 울림과 가슴을 꿰뚫는 정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말로 행하는 종교보다는

침묵이나 묵상으로 행하는 종교가 더 존중받고 있듯이

언행일치가 치열해질수록

종교의 깊이는 더 큰 매력을 뿜어낼 것이고

이로 인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친밀감을 유도해내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묵언수행이나 고요의 극점을 이끌어내는 명상을

하나의 철학으로 간주해버리거나

비하하는 듯 한 태도와 더불어 가볍게 다루거나

불리할 때마다 사탄이나 이단으로 몰아가려는 기독교라면

먼저 종교의 우수성을 알리기보다는

수행자마다 묵언수행이나 명상의 깊이가 다르다는 사실을

우선적으로 인식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진정으로 신의 에너지로 통합된

기의 세계를 접해보지 못했거나

호흡을 통한 수련을 해보지 못했다면

함부로 격하시키려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고 본다.

아무리 우주신인 하나님을 기치로 내걸며 탄생한 기독교라고는 하지만

천상천하유아독존처럼

함께 본받으려는 생각을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만약에 이러한 세계를 접해보거나 깊이 있는 수행을 통해

신의 비밀을 알아낸다면

그 자체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성경 속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먼저 사람의 기질이나 속성을 살펴보는 것이 우선 순서일 것이다.

무엇이든지 그렇지만 정성과 열정이 없으면 실패하는 것처럼

하늘을 감동시키는 정성만 가득하다면

무슨 종교이든지 가장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연약한 존재로 태어난 것이 맞다.

우리는 처음부터 원죄보다 더 무서운 죄를 짓고 태어난 것이 맞다.

아니 원죄보다 더 무서운 것이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죽을 때까지 죄를 짓기에

이 보다 더 공포스러운 죄의 사슬이 있겠는가?

이 보다 더 황당한 일이 있겠는가?

아무리 자신은 아니라고 부인하더라도

아무리 자신이 깨달음에 이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죄를 짓기 위해 태어난 이상

죄를 갚기 위해 더 큰 죄를 짓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비록 자신은 완전하고 흠하나 없는 깨끗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날마다 수백 수천의 죄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눈을 뜨거나

눈을 감거나

그 어디에서든지 발걸음이 닿는 그 순간이 죄를 짓는 일이다.

수없이 뒤돌아보며 죄의 그림자를 없애고 싶어도

서있거나

앉아있거나

바라보거나

죄의 근원은 사라지지 않은 채

하늘의 뜻을 어겨가며 살 수밖에 없는 복잡한 구조로 되어있다는 사실이다.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자신은 아니라고 결백을 주장해도

자신도 모르게 죄를 지으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죄의 근원을 없애려면

이 우주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거나

우주대광명의 빛 속에 묻혀 고요의 극점에 도달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존재 자체를 묻어버리거나

다시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존재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는 공허 속에서

존재감 없는 그런 존재로 사라져 가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조차 죄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우리들 또한 죄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이 얼마나 가슴을 쥐어뜯을 일인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조차

우리들의 죄를 감해줄 수 없다는 것은

구원에 앞서 생명체들의 죽음이나

죄의 값을 치른 인간의 죽음까지도

그 의미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하나를 강조하고 있는

그 모든 종교조차 뒤로 물러서며

하나에 대한 위대성이나

하나에 대한 명쾌한 답변하나 남겨놓지 않고 사라져간

수많은 선각자들도 죄의 사슬에서

결코 한 발짝도 벗어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알아야할 일은 하나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전체이다.

이 얼마나 무지한 지식인가?

이 얼마나 덧없는 삶인가?

이 얼마나 허허로운 일인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바로 하나이자 끝인 것이다.

더 이상 나아갈 데도 없고

더 이상 물러설 데도 없는

그런 공간에서 시간을 쪼개가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싫다고 버릴 수도 없고

좋다고 가질 수도 없는

바로 이곳이

하나님이 거처하는 공간이자 우주와 연결된 통로인 것이다.

 

2013년 12월 8일 일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