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기도는 보수처럼 신학은 진보처럼 - 첫 번째

청아당 2013. 9. 2. 11:02

기도는 보수처럼 신학은 진보처럼 - 첫 번째

 

1:1 제자양육 성경공부의 시작이다.

9월 1일 ~ 12월 15일까지

16주 과정이자 4개월여의 기간이다.

담당목사는 빈태국 목사님이시다.

첫날이라 오리엔테이션으로 끝냈지만

다음 주부터는

교리와 신학에 대한 깊이를 논하며

포럼형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교재(《일대일 제자양육 성경공부》 : 8,500원)

별도로 마련하여야하고

오늘 참석한 성도들은 남성들만 11명이고

1명을 제외하면 제23기 새로운 삶! 「뉴 라이프」에서

교육 받았던 성도들로 이루어져 있다.

「새가족 성경공부」에서부터 느끼는 일이지만

초보적인 성도들도 있지만

대부분 내공이 상당한 성도들로 형성되어져있음을 알 수 있다.

반장과 총무는 성도들의 관리와 간식을 담당하고

결석하면 벌칙으로 20,000원을 내야하고

지각하면 5,000원을 내야한다.

그리고 2회 이상 결석하면 수료증을 받을 수가 없다.

먼저 성도들부터 자기소개를 한 후

뒤이어 빈태국 목회자께서 직접 자신의 소개를 해주셨다.

 

몸은 무거워도 설교는 가볍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진행한다고 한다.

서구 교구장이자 빈태국 목사님의 부임은 2013년 3월 3일이고

그 이전에는

영락교회와 300명 규모의 용인 수지에 있는 교회에서 사역하고 있었다한다.

그리고 결정적인 계기는

주승중 담임목사님께서 영입하여 오게 되었다고 한다.

가끔씩 하늘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운명적인 만남은

좋은 인연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생겨나기에

상생과 상극의 관계에서 뛰노는 우리들의 삶을

면밀하게 관찰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건 그렇고

목회자로서 보수와 진보 그리고 중도에 관한 말씀을 나누며

자신은 보수에 해당되지만 신학에 대해서만큼은

진보 또는 중도를 지켜나가려 한다며 자신만의 색깔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고 보면

목회자마다 자신만이 지니고 있는

뚜렷한 색깔이 돋보이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다.

이미 23기 새로운 삶! 「뉴 라이프」에서

찬양을 담당한 목회자로써 낯을 익혀 왔기에

서로 간에 어색함은 좁혀들고 있다.

 

빈태국 목회자의 말씀 중에

기도는 보수처럼

신학은 진보처럼

진행해 나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반드시 모든 것을 다 알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높이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비춰볼 때

보수는 전통을 유지하려는 고집스런 면은 있지만

기도와 믿음에 대해서만큼은

흔들리지 않는 확고함이 있어

그 무엇보다 가장 큰 장점으로 부각되어지기도 한다.

이에 반해

신학과 교리는 진보적인 신학자에 의해

다양한 해석으로 의견이 분분하다보니

극단적인 경우 예수를 이단으로 몰아가거나

하나의 신화로 치부해버리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참과 거짓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가

참으로 난감한 경우라 할 것이다.

이러한 오류나 왜곡에 대한 강력한 경고메시지인

성경의 내용에 대해서

더하거나 뺄 경우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란 문구를 삽입함으로써

그나마 성경의 내용이

유지되어져가고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내용에 대해

진리라는 말로 고정 시킨 후

계속해서 신학을 연구해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다시 말하면 과정은 있되 결론 없는 신학을

연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늘 그렇지만

뿌리를 흔들면 우주로 연결되어지기에

너와 나의 구분을 잊은 채

삼위일체와 하나로 합쳐지고 있는 상황으로 미루어보아

비록 오류투성이의 성경이라고는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성경을 대체할만한 이론은 없다고 본다.

결국은 하나로 귀결되어지기도 하지만

그 끝은

영감축자설과 성서무오설로 끝나거나

믿음에 대해서만큼은

확고한 메시지로 전달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을 부정하면

종교는 설 땅을 잃게 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그리고 성경의 내용을 부정하면서

믿음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어불성설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나 자신과 연결되어져 이루어진 세상이기에

나를 통해 누구와 연결되어져있는가가

중요한 요소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참 나를 찾거나

참 신을 찾는 일이야말로

우리들의 행복이자 기쁨으로 연결되어지기에

종교를 통해 우리들의 길 또한

정해지지 않나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의 뜻보다는

신의 뜻으로 살아가는 일이야말로

종교에서 가장 크게 내세우는 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신의 모습을 볼 수 없다하여 신을 부정하게 되면

무신론자가 되거나

의지처인 신의 보금자리까지도 잃어버릴 수 있기에

목숨을 맡겨가면서까지 사수하는 것을 보면

신의 영역이 우주전체를 포용하고도 남는

여유를 보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에 종교에서 신을 배제한다면

그 자체가 모순이자

계속해서 또 다른 신을 불러들일 확률이 높기에

신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종교생활을 해야 하는 이중적인 고민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쉽게 빠져나올 수도 없는 형편이다.

그러고 보면

종교 역사와 함께 달려가는 바람과도 같은 존재이자

(道)의 근원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종교야말로

진리이자

삶이자

인생의 지침서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성경을 왜곡하여 전달하고 있는 이단이나

목회자의 영적능력이나 사역에 따라

다른 해석이 내려질 수도 있겠지만

진실로 진리를 전하고자 노력하는 목회자라면

종교를 위해서라도

자신의 역량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려고 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성경을 모두 다 통달하거나

처음부터 끝까지 일독을 하지 못하더라도

기도와 믿음에 대해서만큼은 진지해질 수 있기에

순수한 내적울림만 강하다면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 채 목회자의 말씀에 의지하며

믿음생활을 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 중의 하나라고 여겨진다.

그렇지 않고

어설프게 접근하려는 성도들이나

오히려 아는 것이 많은 성도일수록

독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신의 에너지인 성령을 통해

내면의 기쁨을 발견하거나

가장 낮은 자세에서

가장 높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신의 지위에 도전하다보면

뜻하지 않게 하늘 문으로 통하는

지름길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의 저서인

《역사의 연구》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일이지만

잊을만하면 튀어나오는 종교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에 상응해서 유추해보면

종교는 역사와 함께 발전되어져 왔음을 부인할 수 없듯이

인류의 역사 속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종교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보면 역사보다도 더 긴 종교가

따로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과거의 역사 속에서 원시종교인 토테미즘이란 이름으로 시작하여

고등종교에 이르기까지 그 활동영역 역시 광범위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믿음에 대해서도

99%의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하고

1%의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하고 비교하여

천국에 들어갈 확률은 제각각 다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기준은 하나님만이 정할 수 있고

인간의 기준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성역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이것이 옳다고 주장하여도

하나님이 정해 놓은 진리에 어긋난다면

그 또한 무용지물이 되어

옳고 그름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그 모든 것을 떠나서

이렇게 살아 숨 쉬며 서있다는 것

그 자체가 행복이고 은혜이고

기쁨으로 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신을 위한 행복보다는

사람을 위한 행복으로 가득하기에

이러한 논리는 종교를 떠나서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2013년 9월 1일 일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