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고요의 극점인 깨달음에 관하여

청아당 2012. 7. 14. 19:11

고요의 극점인 깨달음에 관하여

 

그렇다. 매일 화두처럼 머리를 맴도는 단어가

깨달음에 관한 일일 것이다.

깨달음은 일상에서 영혼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형태의 모습을 갖추며 우리들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무엇 때문에 필요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끝에 이르면 또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야한다는 사실만이

귓가에 맴돌 뿐이다.

알고 가는 길도 아름답지만

모르고 가는 길도 아름답다.

우리에게는 촉감이 있고

우리에게는 영성이 있고

우리에게는 영혼이 있기에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한번은 깨달음과 충돌하여 그 속내를 알아내야만

궁금증이 풀리는 일이지만

가끔씩 깨달음을 너무 높이 올려놓거나 너무 낮게 내려놓아

판단을 흐리게 하거나 혼동을 일으키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

어떤 사람은 깨달음만이 최고라고 고집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지금 서있는 현실이 최고라고 고집하는 사람도 있다.

부처가 되기 위해선 부처조차 부정할 줄 알아야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신선이 되기 위해선 반드시 양신을 만들어야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렇다고 그 모든 충족요건을 갖추었다고

손뼉 치며 기뻐해줄 사람들이 있겠는가.

자연조차도 깨달은 사람들을 위하여

따로 자리를 마련해놓지 않는 것을 보면

처음부터 있었던 일을

뒤늦게 안다고 반겨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예부터 언행일치를 주장하며

부처가 되기 위해 평생을

허송세월을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신선이 되기 위해 평생을

양신 만드는 일에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부처나 신선이 되기 위해 행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삶의 일부인 극히 한 조각에 불과하다.

늘 있는 일이지만

뒤돌아서면 연약한 나뭇잎만 바람에 흔들리며

크고 작은 바람에 몸을 내맡기고 있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모든 것을 내팽개치며

오로지 수행에만 매달리며 살아가야한다면

그 삶은 진리를 위한 삶보다는

삶을 통한 진리를 찾기에만 급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진리만이 최고라고 주장하며

이루지 못할 꿈을 꾸며 눈을 감고 한없이 달려갈 것이다.

깨달음을 알아야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깨달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더 많음을 볼 때

깨달음은 어떤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평범한 사람들도

언제든지 깨달음의 품에 안겨

달려갈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디 세상사는 것이 쉬운 법이 있었던가.

부지런하지 않으면 낙오되기 쉽거나

게을러서 큰일을 그르치는 일이 어디 한 두 번인가.

몸으로 나타낼 수 있는 초능력은 한계가 있지만

생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초능력은 한계가 없다.

생각을 해보아라!

몸은 한순간에 사라지는 부평초라면

생각은 우주의 끝을 안고도 모자람을 한탄하고 있음을 볼 때

이 둘은 극과 극을 달리며

신인일치를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주는 그 모든 것을 포용하며

사람이 행하는 잘잘못까지도 용서하며

몸과 마음에 채찍질을 가하기도 한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이 발견해낸 것만이 참된 진리라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이다.

과거에 잘못 전해져온 부분이 있거나 곡해되어 온 부분이 있다면

마땅히 바로잡는 것이 맞는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이 바로잡은 것만이 최고라고 우긴다면

또다시 과거의 잘못을 저지를 수 있기에

남을 평가하기 전에

우선 자신부터 되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아무래도 주관적인 판단보다는 객관적인 판단에서 나온 평가가

공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듯이

함정에 빠져들기 쉬운 자화자찬보다는

객관적인 평가에 맡기는 것이 더 빠른 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주장한 것 외에는

그 나머지는 모두 사이비라 우기거나

입을 틀어막기 위하여

모래알보다 더 작은 크기로 우주를 가리려고 든다면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어리석은 판단이라

아니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종교적인 이론에 막히거나

상대방을 방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 궁지에 몰리게 되면

핵심을 알지 못하고 주변만 맴돈다고 큰소리치기도 한다.

남을 알고 자기를 알아야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한없이 높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고요의 극점인 깨달음은 말보다 침묵을 더 좋아하고

침묵보다 살아있는 명상을 더 좋아하기도 한다.

우리가 알아야할 일들이 우주와 자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요의 극점에서

온 우주를 비치는 단의 빛을 얻어야

어둠에서 빠져나온 빛을 발견할 수 있듯이

진정 우리가 알아야할 진면목들을 대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론보다는 실천이 중요함을 강조하거나

실천보다는 이론이 더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론을 알지 못하면 실천을 행할 수가 없고

실천을 행하지 않으면 이론을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혹자들은

길은 만들면 된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길을 만드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수없이 돌고 돌아 뒤돌아보면

처음에 출발했던 그 길에서 헤매고 있는 것을 보면

길을 만드는 일이야말로

참으로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지 않고 지낼 수만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서있지 않고 달릴 수만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

모든 것은 멈추면 움직이고

움직이면 멈추는 일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다.

깨달음을 알거나 모르더라도

하루를 위해 살아야하고

한 달을 위해 살아야하고

일 년을 위해 살아야하고

평생을 위해 살아야한다.

그 누가 하나만을 고집하며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진리라고 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사이비이자

자신만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우주의 고아이자 외톨이인 것이다.

우주가 자신을 높인 적이 있었던가.

자연이 자신을 높인 적이 있었던가.

성자들이 자신을 높인 적이 있었던가.

그냥 서있는 우주의 뿌리이자 자연의 뿌리이지 않은가.

성자가 살던 그 시대에서도 해결하지 못한 일들을

또 다른 성자가 나온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아서라!

이것이야말로 꿈이자 치유하기 어려운 정신병자일 것이다.

성자들이 살던 시대보다 더 많은 종교가 생겨나고 있고

성자들이 살던 시대보다 더 많은 성직자가 배출되고 있어도

해결하지 못한 채

오히려 더 큰 문제로 혹세무민을 당하고 있지 않은가.

마치 호객꾼의 유혹에 의해 유흥가로 끌려가는 손님처럼

각종 종교에 의탁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종교가 살아남기 위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할 일들은 기도에 대한 효과일 것이다.

모진풍파에 견뎌내지 못하거나 효과 없는 종교는

비판을 가하지 않더라도 자연적으로 도태되어지듯이

종교가 살아남기 위해선 순위를 다투는 일에 신경을 써야하고

얼마나 더 많은 신도들을 확보하느냐에 따라 향방이 정해지듯이

종교에 대한 인지도에 의해

흥망성쇠가 결정되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종교의 힘은 기도라는 말 한마디로 축약시킬 수 있지만

그것이 종교가 되었든 철학이 되었든

신도들은 다양한 종교를 통해

기복신앙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더욱 많아지게 되고

종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사람과 사람이 나누는 정이듯이

정에 의해 더욱 끈끈한 신도들과의 응집력과 조직력을 통해

유지되어져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도와 성직자들에게 천국보다 더 중요한 것이 순교이듯이

순교를 바탕으로

그 어떠한 압력이나 유혹에도 목숨을 내놓을망정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의 힘을 당당하게 내세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깨달음은 모두가 후세사람들이

자신을 높이기 위해 세워 논 이론을 가지고

그것만이 최고라고 고집한다면

영원한 우주의 고아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종교 없이 살아가는 무신론자라해서

종교인보다 못하거나 폄하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종교인들보다

더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거나 무심의 경지에서

하늘의 뜻에 어긋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는 사실을 안다면

무신론자 앞에서 더욱 겸손함을 잃지 말아야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시대에 따라 달리 느끼는 것이 깨달음이자

각자(覺者)에 따라 달리 깨닫는 것이 깨달음인 것을 알지 못하고

마치 동일한 상품처럼 일률적으로 느끼는 각자(覺者)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사이비이자 믿지 못할 일일 것이다.

깨달음은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듯이

보고 느끼는 가운데

소용돌이치는 태풍의 눈으로 침묵을 발견하거든

손으로 잡지 말고

마음으로 잡아야할 것이다.

그리고 그 끝은 둘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였다고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침묵의 종소리에 귀를 기우리며

깨달음도 삶이고

삶도 깨달음이라는 현실을 깨우치며

지금 서있는 그 자리에서

다함께 손을 잡고 호흡하며 살아가야할 것이다.

 

2012년 7월 14일 토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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