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인과응보 - 두 번째

청아당 2012. 7. 11. 00:24

인과응보 - 두 번째

 

받을 사람은 받아야한다.

고통으로 얼룩진 과거가 피바람보다 더 진하다면

현세를 뛰어넘어

내세에 받아야하고

부모의 죄가 크다면

자식에게 대물림을 통해서라도

그 죗값을 받아야 한다.

잠에서 깨어나 하루를 보내는 일이

이렇게도 힘들다는 것은

천성이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과 같다.

그렇다. 우리는 수많은 나날들을 통해 겪고 있는

죄의 늪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누구랄 것도 없이 경험해야만 하는 죗값

이보다 더 크고

이보다 더 엄청난 일은 없을 것이다.

서로가 손을 잡고 웃을 수 있는 날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벗길수록 그 속내가 드러나는 양파와 같이

눈물이 날 정도로 가슴이 아픈 것이

우리들이 만들어낸 죗값이다.

하루가 즐겁고 기쁘면

이틀은 슬픈 것이 우리들의 삶이듯이

누가 누구에게 죄를 묻겠는가.

발품을 팔아서라도 하루를 연명해나가려면

우선은 부지런해야하고

그 와중에 행한 대로 죄를 지어야만 한다.

어떤 이는 부지런히 뛰는 만큼

부와 권력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이는 모든 것을 놓아야만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만 항상 즐겁거나 항상 슬프게 지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슬픈 가운데서도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인생이듯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쉬운 길이 있을 수 있고

쉬운 가운데서도 어려운 길이 있을 수가 있다.

그러고 보면 하루가 어떤 기로에 서있는가에 따라

죄의 경중이 정해지겠지만

눈을 뜬 순간부터 우리들은 죄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과 직결되는 인과응보이기에

알면서도 달리는 경우가 있고

모르면서도 달리는 경우가 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충분하게 죄를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굴레에 갇혀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그래서 족쇄라는 이름으로

무거운 짐을 등에 지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깊고 깊은 인연인가.

바다보다 더 깊고

하늘보다 더 높은

그래서 온 우주를 채우고도 남을 죗값이

우리들의 목을 조여오고 있는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이자 행운이지만

그보다 더 깊은 죄의 값을 묻는다면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존재들이자 생명체인 것이다.

창밖으로 장맛비가 소리를 지른다.

땅을 치며 통곡하는 빗소리로

산에는 산새들과 꽃들이

신록의 편안함을 전해주고 있고

가끔씩 우리들에게 눈으로만

오솔길을 따라 걸으라고 유혹하기도 한다.

그리고 밟는 곳마다 산 향기가 나야하고

사색의 길을 걷거든 사색을 해야 하고

명상의 길을 걷거든 명상을 해야 한다고

조용히 말을 걸어오기도 한다.

발걸음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달리라고 하면 달리면 되고

멈추라고 하면 멈추면 된다.

이 얼마나 행복한 가벼운 발걸음인가.

가슴으로 말하기 전에

몸이 먼저 말하고

몸이 먼저 말하기 전에

영혼이 먼저 말하고 있다.

세상은 자신을 버리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우주 같은 넓이를 안겨주지만

자신에게 집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수없이 다가와 무언의 압력으로

그 끝이 어디인지를 반드시 알려주고 나서야 물러서고 있다.

피보다 진한 가족일지라도

바위보다 더 강한 의지일지라도

사막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처럼

그 모든 것을 덮고 나서야 안심을 하고 있다.

그리고 주면 받게 되는 것이 현실이고

받으면 주게 되어 있는 것이 미래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계절에 갇혀 사는 것이 아니라

한발이라도 목표점에 설정된 선을 밟는 일이자

생사의 갈림길에서 인과응보의 줄을 잡아당기는 일이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할지는

그날의 일진에 달려있겠지만

바람이 달린다고 무조건 함께 달려서는 안 된다.

바람은 바람조차도 그 향방을 모른 채

앞만 보며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숲속에 갇히지 않는 바람처럼

바다에 가라앉지 않는 바람처럼

하늘과 땅과 바다가 한 몸으로 달려들거든

가슴을 펴고 두 팔로 한껏 받아내야만 한다.

그래야 하루를 살 수가 있고

그래야 이틀을 살 수가 있고

그래야 평생을 살 수가 있기 때문이다.

바람은 하늘의 눈이 되어 땅을 살피고 바다를 살피고

살필 수 없는 곳에서조차 바람이라는 이름으로

내몰며 달려가고 있다.

우리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바람이지만

바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삶이기에

살아서는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 앞에서는 살고자하는 집착으로

이중적인 잣대를 밟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 누가 인과응보라고 했는가.

인과응보는 삶의 과정이자 삶의 결정체이기에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며 달리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내던지며

오늘도 달릴 것이고

내일도 달릴 것이고

모레도 달릴 것이다.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달리고 또 달릴 것이다.

인과응보는 하나가 아닌 둘이지만

인과응보는 둘이 아닌 하나를 선호하고 있다고

그 누가 말하고 있다.

길에서 길을 묻는 것보다

길에서 길을 묻지 않는 것이

침묵보다 더 강하다고

명상보다 더 강하다고

길 없는 길을 헤치며 달릴 때가 가장 행복했었다고

뒤돌아보며 말하고 있다.

자신을 알고 가는 사람보다도

자신을 모르고 가는 사람들이 더 행복하듯이

우리들의 귀를 막고 눈을 막아야만

우리들이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세상은 불공평하게 보일지라도

하늘은 늘 평등했기에

우주자연을 주관해왔고

하늘의 법칙대로 지금도 달려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행한 대로 살고

범한 대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들의 죄를 더 크게 하든 작게 하든

목숨이 붙어있는 한

발걸음 가는대로

마음 가는대로 살아가야하고

자연을 만나거든 자연이 되면 되고

우주를 만나거든 우주가 되면 되는 것이다.

 

2012년 7월 10일 화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