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가장 고귀한 행복

청아당 2011. 6. 22. 18:17

가장 고귀한 행복

 

꽉 채워진 우주의 허공

빈틈으로 달리고 있는 생명들의 잔치는

어디에서 출발하여

어디에서 끝나는지 아무도 모른다.

단지, 존재한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세상을 알아야하고

지구를 알아야하고

자연을 알아야한다.

해가 뜨고

달이 뜨는 세상에서

우리들이 생각해야할 것은

바다와 산이 우리들 곁에 서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든든한 조력자의 역할을 자진해서

하늘이 내린 벌조차 막아주고

지상에서 벌어진 그 모든 선악조차 막아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늘을 향해 아무리 기도를 해도

그 목적하는 바가 정당하지 않거나

그 목적하는 바가 잘못된 노선을 타고 있다면

하늘은 딴청을 피우며 고개를 돌려버린다.

처음부터 보지 못했던 것처럼

하늘이 달리라고 하면 앞만 보며 달렸건만

하늘이 멈추라고 하면 앞뒤 생각 없이 멈췄건만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하늘의 눈치나 살피며 살아가야하는 존재로

낙인찍혀

간절한 소망을 걷어가 버리거나

두 손을 가슴에서 내리게 한다.

언제부터 우리가 하늘을 향해 기도했다고

언제부터 우리가 하늘을 향해 의지했다고

두 손을 모아 겸손한 모습으로

하늘로부터 측은지심을 유발했었는지

기도는 믿음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기도는 정성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정녕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하늘에 대한 원망이나

우주에 대한 원망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꿈꾸는 가장 소박한 꿈이나

희망을 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한없이 하늘만 믿고 사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다.

그것이 성직자일지라도

한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경건함을 걷어가 버리거나

한순간 눈에 보이는 존재까지도

기도 속에서 삭제해버릴 때가 있다.

이 얼마나 경거망동한 행동인지는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바다도 알고 있지만

달려야할 곳에서는 힘껏 달리고

멈춰야할 곳에서는 멈추면서 살아가야한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하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사는지도 모른다.

죽는다는 것은

어쩌면 하늘에 대한 불신 때문에 죽는지도 모른다.

생명으로 존재하고 있는 이상

하루를 버틸 수 있도록 식사를 원하고

하루를 버틸 수 있도록 옷을 원하고

하루를 버틸 수 있도록 집을 원하고 있지만

그 하루가 우주와 통하고

그 하루가 지구와 통하고

그 하루가 하늘을 통치하고 있는

통치권자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은

살아생전 충격으로 다가오기도하고

살아생전 하늘로부터

버림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사실 모든 것을 놓고

우주를 바라보거나

지구를 바라보고 있으면

빈손이야말로 하늘이 내린 선물이다.

손에 들고 다녀본 사람들은 아는 사실이지만

가슴을 비우는 연습이나

정신을 비우는 연습이나

놓는 것을 연습하는 것은

결국 빈손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 앞에서

허무감이나 현실을 초월한 명상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은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산다는 것도

죽는다는 것도

빈손이야말로 가장 축복받은 행복이자 행운인 것이다.

이보다 더 값진 선물은 없는 것이다.

뒤로 갈수록

또는 앞으로 갈수록

우리에게 던져진 화두는 처음으로 돌아가거나

우주의 원에 뛰어들어

드나듦이 없는 절묘한 우주의 소리로 링을 밟고 서있게 된다.

이것처럼 우리들의 가슴을 꽉 채워주거나

이것처럼 우리들의 정신을 꽉 채워주는 것은 없다.

오늘도 치열한 현실 속에서 달리고 있는 입장이지만

우주의 빈곳을 향해 달리거나

우주의 가장 안쪽을 향해 달리고 있다는 사실은

생명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행복으로 각인되어지고 있다.

 

2011년 6월 22일 수요일

 

존재에 대한 반항을 생각하며…….

 

청아당 엄 상 호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