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선설과 성악설
본성(本性)에 대한 꾸준한 질문에는
정답이 없다고 본다.
한쪽으로 기울지 말라고
중심을 잡아 주고 있는 하늘의 뜻이 있는 것을 보면
맹자의 성선설(性善說)도
순자의 성악설(性惡說)도
표리관계로 유지하고 있는 동전의 양면처럼
모두 옳은 판단이라고 본다.
본래는 공자((孔子, 기원전 551년~기원전 479년)는 유가철학의 비조,
유교의 시조(始祖)로 떠받들어지는 고대 중국의 정치가, 사상가이다.)의
핵심사상인 仁에서 파생된
心에서 출발한 것이고
둘 다 공자의 적통이라고 서로 나서서
한 획을 긋는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은 제자들이기에
우리들은 하나의 본체로 보면 그만인 것이다.
하지만 둘 중 하나가
한쪽으로 쏠림현상이 강하게 나타나면
성선설도((孟子, 기원전 372년?~기원전 289년?)는 공자의 사상을 이어 발전시킨 유학자이다.)
성악설도((荀子, 기원전 298년?~기원전 238년?)는 중국 춘추전국 시대, 유가 성악설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우리들이 펼쳐 논 그물에 걸려 넘어지거나
숲 속에 갇혀
본성에 대한 꿈마저 무너져 내릴 수 있기에
꿈보다 더 무서운 것이
성선설과 성악설의 양보 없는 치열한 다툼이라고 볼 수 있다.
본래부터 하나였던 것이
인간의 잣대로 갈라놓은 본성이기에
허공을 자른다고
허공이 무너지는 경우가 없듯이
현실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성선설과 성악설은
본성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허공처럼
우주를 흔들지 않는 이상
그 뿌리는 하나에서 나와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끔씩 현실도 부정되어지고 있는 사실을 접하다보면
꿈에서 깨어나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듯이
성선설과 성악설은
아무리 흔들어도 본래의 성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본래의 성에 얽매어 있을 뿐이다.
그것도 꿈을 버리고
모든 것을 정지해놓은 상태에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한낱 장자 몽의 꿈처럼
설득력을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성선설과 성악설이다.
성선설은 착하다는 의미로 통하기도 하지만
그 근본은 내적관계와 외적관계의 결합에서 나타나고 있는
관계된 성의 의미가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악설 또한 나쁘다는 의미로 통하기도 하지만
그 근본은 내적관계와 외적관계의 결합에서 나타나고 있는
관계된 성의 의미가 더 강하게 작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주의 품에서 빠져나올 때
홀로 설 수 있는 본성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갈림길에서 서로를 그리워하며
한곳은 성선설의 길로 나아가고
한곳은 성악설의 길로 나아가
먼저 태어난 성선설을 정면으로 부인하며
성악설에 무게를 실어
역사 속으로 내보냈지만
결국엔 성선설도 성악설도
사람의 근본인 마음을 중심으로 해석되어져
기준 없는 삶은 무의미하다며
절대적인 우주의 삶에다
하늘로 통하는 길까지 열어놓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하늘의 깊은 뜻이 내재되어져 있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사람 사는 세상에서 발현되어질 수 있는
이상향을 심어놓기도 했다.
그리고
그 끝은 끝없는 道의 세계를 말하기도 하고
그 처음은 마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화두처럼 허공에 올려놓고
모두의 눈높이보다 높게 하거나 낮게 하여
낮은 자세로 서있는 모습을 그려 넣기도 했다.
우리가 우리를 바라볼 때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승패에 따라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승리자와 패배자
이 두 가지는 시합을 하지 않았더라면
본성에서 한걸음도 빠져나갈 수 없는
고정된 자연으로 통하고 있었을 것이다.
성선설과 성악설이 둘로 갈라지는 이유는
치열한 삶속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승리욕과 성공욕의 발로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을 보면
비록 우주심으로 통하고 있는
성선설과 성악설이라 할지라도
현실에 바탕을 두고 출산된 아이들로 비유되기도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꿈을 꾸지말거나
나중에라도 꿈을 꾸지 말았어야했다.
하지만 꿈꾸지 않는 자는
희망마저 없다며
꿈속에서조차 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이 둘의 경계는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또다시 하나로 합치기에는
이미 늦었지만 살아있는 한
이 둘의 관계는 우주의 끝이라도 좋으니
달릴 수 있을 때까지는
힘껏 달릴 수 있도록 놓아달라는
희망어린 요구에
진심으로 응원을 해주거나
못 본 척 눈을 감아주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처음부터 둘의 관계는 하나로 뭉쳐
성선설도 성악설도 아닌
존재할 수 없는 곳에서
영원한 잠속으로 빠져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꿈은 꿈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성선설과 성악설의 다툼을 멈추게 할 수 있는
하늘의 뜻이 계속해서 전달되고 있는 한
더 이상
성선설과 성악설의 분리된 견해는
우리들 본성 깊은 곳으로 되돌아가
고요의 집에서
영원히 잠들도록 자장가를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숨 가쁘게 달려온
오욕의 세월을 잠재울 수가 있다.
그러나
자연이 쓸고 간 모든 꽃들이
해마다 봄이 되면 찾아와
안부를 묻고 있는 것처럼
서 있는 것만으로도 중심을 잡을 수 있다며
또 다른 세상을 펼칠 준비를 하고 있다.
처음도 끝도 아닌
우주의 중심에서 인간을 위해 본성을 파헤쳐가며
하나로는 부족하다며
거부할 수 없는 오누이처럼
서로의 손을 잡고 힘껏 달려가고 있다.
2011년 4월 30일 토요일
성선설과 성악설을 생각하며…….
청아당 엄 상 호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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