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적인 행보(누락)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사람이 아니라면
수행을 위한 삶보다는
삶을 위한 수행이 되어야한다.
파도가 달려오는 곳은
바위와의 한판 승부이지만
뒤로 달려가는 파도의 모습은
삶의 뒤안길과 같다.
수없이 달려와 거품을 만들고
거품이 사라지기 전에
앞으로 달려오는 파도가 있어
파도는
늘 바위 곁으로 다가가
안부를 묻는다.
오늘도 아름다웠냐고
오늘도 행복했었냐고
그 길이 험난한 여정에 노출되어져있더라도
마법처럼 펼쳐지고 있는
파도의 법칙에 매료되어질 수밖에 없다고
언제나처럼
1년이 지나도
10년이 지나도
새로운 길을 달려온 것처럼
생생한 하루로 맞이하고 있어
금방 떠온 생수와도 같은 약수처럼
싱싱하다.
비록 그 끝에는
수행이라는 고통의 깊이가 자리하고 있지만
자리를 박차고
우주를 향해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언제든 파도위에서
바위위에서 춤을 추며
하늘에 서린 기운을 잡아끌 수 있다.
명상을 통해 마음이 비워지고
올가미에 갇혀있는 육신을 태우다보면
그 끝은 하나로 귀결되어지게 되어있다.
우주와 내가 하나이고
지구와 내가 하나이고
너와 내가 하나이면
황금으로 만든 종을 흔들 수가 있고
그 빛이 너무 눈부셔
바닷물로 희석시켜야하지만
이미 내린 폭설의 눈만으로도
그 빛을 감쌀 수 있다.
자신을 버리고
여백의 공간을 만들어놓은 설원이 있기에
황금보다 더 빛나는 깨달음의 세계일지언정
한 움큼 손에 잡히는
삶에 대한 정이 없다면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에 갇혀 살고 있음을 알아야한다.
소유보다는
무소유가 더 아름다운 것은
소유 속에서 무소유를 즐길 줄 알기 때문이다.
생각은 또 다른 생각을 낳게 하지만
명상은 생각을 죽이고
우주적인 행보를 즐겨하기에
그 끝은 항상 광활한 우주의 여백에 갇히게 된다.
무료한 일상의 삶에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찾기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숨겨진 삶을 찾아내야하기에
무에서 유를 탄생시키는
우주적인 창조와도 같다할 수 있다.
우리가 걷기에는 너무나도 먼 길이지만
한번 들여 논 발길은
길 위에서 길을 물으며 살아가는
수행자의 길과도 같다.
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깨달음의 세계이지만
그 길을 밟으며 지나치고 있다는 확신 하나만 있다면
자나 깨나
행복을 꿈꿀 수 있고
어떠한 벌이라도 달게 받으며
무한한 감사와 뜨거운 열정으로 살아 숨 쉴 수가 있다.
보는 것은 눈을 감으면 그만이지만
느끼는 것은 눈을 감은 상태에서도 가능하기에
고요의 극점을 향한 집념만 있다면
우주의 끝이 아니라
태고의 끝이라도 발을 들여놓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누구나 그 길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그 끝을 아는 사람은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닌
내면의 스승인 하늘만이 알 수 있다.
2011년 2월 19일 토요일
수행을 위한 삶보다는 삶을 위한 수행이 되기를 바라면서...
청아당 엄 상 호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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