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올린 詩』/『오늘 올린 詩』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으로(글) - 자율호흡법

청아당 2021. 3. 25. 10:15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으로() - 자율호흡법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으로 집을 나서는 순간 태양 빛에 감사하고, 달빛에 감사하고, 바람에 감사하고, 나무들의 기(목기)에 감사하고, 지기에 감사하고, 수기에 감사하고, 맑은 소리를 내는 새들에게 안녕이라고 말하며 기를 불어넣어 주기도 한다.

 

감사로 시작해서 감사함으로 끝을 맺는다.

 

우주의 지혜, 태양의 지혜, 자연의 지혜를 닮아가겠습니다.” 생각을 하며 명상에 들어갔다.

 

우주의 법이자 태양의 법이자 자연의 법으로 호흡을 한다.

일정한 패턴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 아니라 흡과 호로 시작하여 우주의 이끌림에 의해 호흡을 한다.

 

1시간 동안 호수공원을 돌 때 빠른 걸음으로 들숨()과 날숨()을 하며 걷기명상을 통해 준비운동을 마친다. 적당한 명상장소인 긴 의자에 앉아 30분 동안 두 눈을 지그시 감은 후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명상에 들어간다.

 

걷기명상은 난기류의 기나 상기현상 등 불규칙한 기를 균형 있게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집중력을 갖고 걷기명상에 몰입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깨달음의 빛이 쏟아진다는 점이다. 그것도 수없이 쏟아져 깨달음의 기초를 다지게 하고 깜깜한 밤길에서 환한 빛으로 인도하는 연결점 작용 현상을 일으킨다는 점이 가장 특이한 점이다.

 

걷기명상은 수없이 눈물을 흘리게 하거나 수없이 통한의 한을 풀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태양 빛과 함께 우주에너지가 백회를 통과하며 온몸으로 휘황찬란하게 차오른다.

 

회음혈이 저절로 수축과 이완이 되어지고 각 혈자리가 알아서 자율적으로 수축과 이완을 한다.

 

우주의 이끌림으로 호흡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주의 자율적 힘에 이끌려 행하는 호흡은 가슴을 벅차게 하며 신비로움과 함께 황홀함으로 이끄는 묘한 힘이 있다.

 

굳이 인위적인 호흡법이 아닌 자율적 호흡법인데도 이렇게 편안하고 우주적인 현상들을 껴안을 수 있다는 것이 그저 감사하고 고맙고 모든 만물에 무한히 베풀 수 있는 우주심을 심어주기도 한다.

 

호흡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자율적으로 호흡을 하고 있는 자신과 우주와 자연에 대해 무한한 감사를 연이어 발할 수밖에 없다.

 

받으면 되돌려주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듯이 감사하게 받은 만큼 돌려주고 돌려준 만큼 우주나 자연으로부터 되돌려받는 식의 순환구조가 연결고리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양 빛이 온몸에 파고들어 와 뜨거워질 때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식혀주기까지 한다. 불과 바람이 조화를 이룬 것이다.

 

뜨거움 옆에는 물과 바람이 대기하고 있어 언제든 마음 놓고 달릴 수 있는 것이 불이다.

 

우주에너지가 엄청난 압력으로 밀려올 때 두 팔이 무거워지면서 올려지지가 않는다. 그리곤 몸이 붕 뜨는 것처럼 가벼워진다.

 

새벽 명상을 2시간 하는 것과 30분 동안 두 눈을 지그시 감고 태양을 바라보며 행하는 명상을 비교해보면 우주에너지를 온몸에 가득 채우는 충전 시간이 같다는 점이다. 채우면 비워지고 비워지면 다시 채워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우주의 이끌림에 의해 우주와 지구와 인간이 하나로 연결되면서 우주의 지휘 아래 모든 것이 움직인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고 오묘하기까지 하다.

 

제대로 맥을 짚은 것이다.

 

우주가 숨을 쉴 때 지구도 별도 인간도 동물도 모두가 함께 따라 숨을 쉬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하나로 연결되어져 있는 것이다.

 

깨달음의 세계는 끝이 없다.

깨달음의 세계는 일정한 틀이 없다.

깨달음의 세계는 일정하게 정해지지 않았다.

 

인위적인 호흡으로 우주에너지를 인간의 입맛에 맞게 끌어다 쓰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알아서 자율적으로 그에 맞게 최적화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차크라가 열리고 태양열이 불꽃처럼 치솟으며 활활 타오르는 모습이 선명하다. 잠시 10분 동안 명상했을 뿐인데 선명한 이미지로 온몸에 각인시켜주며 희열과 환희 그리고 감사함으로 끝 간 데를 모를 만큼 우주에너지를 끝없이 제공해주고 있다. 참으로 우주적인 장관이다. 한번 열린 에너지와의 소통은 우주에 최적화된 완전체의 몸으로 변해 있는 것이다.

 

농익을 대로 농익은 과일처럼 손만 대면 터지는 그런 상태인 것이다.

 

몸이 움직일 때마다 아니 명상할 때마다 새로운 세계를 펼쳐주고 있는 것이다.

 

손 모양에 따라 호흡의 세계가 다양하게 펼쳐지며 무아의 세계로 이끌어가고 있다. 경천동지할 현상들이 줄지어 나타나고 우주의 숨이 나의 숨이고 나의 숨이 곧 우주의 숨으로 연결되어진다.

 

낙원의 이면을 깨달아버렸다.

 

낙원의 이면은 아담과 이브가 먹었던 선악과요, 이면의 초월은 해탈이다.”

 

더불어 해탈을 초월한 것은 현실(지금 현재 서 있는 자기 자신의 자리)이다.

 

현실은 살아생전의 모습일 수도 있고, 사후세계가 될 수도 있고 과거, 현재, 미래가 될 수도 있다.

 

해탈은 끝이 아니라 시작인 것이다.

해탈은 언제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창조요, 언제든 깨부술 수 있는 파괴다.

 

선악과, 선악과, 선악과로 빠져들면서 해탈, 해탈, 해탈의 마음 끝자락 속에서 고요의 극점을 떠올리며 자연스럽게 마음자리로 마침표를 찍었다.

 

해탈이 별것이 아니고 이미 해탈을 했고 자기 마음 안에 다 해탈 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해탈은 이미 마음 안에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낙원의 이면은 선악과이었다. 해탈이었다.

종교 또한 이미 원안에서 하나였다. 마음 안에 한 종교로 존재하고 있었다.”

 

깨달음을 이미 얻었지만, 현실이라는 이면 속에서 지내오다 보면 알아차림이라는 자리가 무뎌지기도 한다.”

 

명상이라는 것은 깨달음을 얻었다 하더라도 깨달음으로 가는 알아차림이라는 마음자리를 반짝반짝 빛이 나게 할 수 있도록 닦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우주 안에서는 완성도 미완도 없는 존재이지만 태어날 때는 생명체인 정자와 난자가 만나면서 미완성으로 태어나 선악을 구별하며 번뇌 망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을 우주는 원래의 모습인 본질로 이끌어가기도 한다.”

 

명상이 끝났는데도 보내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도록 마음을 묶어버렸다. 인간의 행동은 마음에서 나오는지라 마음이 묶이니 행동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머물렀다.“

 

우주가 그 자리에 머물도록 오래 붙잡아 두었다. 깨달음의 깊이를 더 느끼고 가라며 붙잡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깊고도 깊은 깨달음의 세계인가?

 

소름이 돋을 정도의 깊은 성찰이자 통찰력이 아닌가?

 

그 끝이 어디인 줄 모르게 달려가고 있는 깨달음의 세계는 손에 잡을 수도 놓을 수도 없는 가없는 끝일 수밖에 없다.

 

2021324일 수요일

 

청아당 엄 상 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