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하는 선악은 지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위대한 사랑은 용서’라고 말하고 있지만
공존하는 선악은
지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도 존재하고 있다.
성자들이 말하는
자비와 용서를 실천하려고해도
실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공존하는 선악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사람들을 위해 희생했다면
하늘에서도 악한사람들을 위해 배려했어야 했다.
언행일치가 아니라
언행불일치가 일어난 것이다.
천국과 지옥을 만들어놓고
지상에서 행했던 것과 똑같이
형벌을 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지상이나 하늘이나
공존하는 선악은 그 어느 곳에 가든지
변할 수 없는 영원불변한 법칙으로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땅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하늘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리 녹녹치만은 않다.
땅에서나
하늘에서나
공존하는 선악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공생관계와 상생관계를 더 강조하며
살아있는 생물처럼
공존하는 선악의 위상만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가끔씩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악한 사람들을 용서하거나 포용하라고
입으로는 말하고 있지만
지상에서나 하늘에서나
실천되고 있지 않은 것을 보면
어쩌면 공존하는 선악은
대치상태로
영원히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껏
우주적인 관점으로 보나
인간적인 관점으로 보나
공존하는 선악은
그 어느 곳에 가든지
존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불변한 법칙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거대한 우주가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고 있듯이
공존하는 선악도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노아의 방주 때
악을 근본적으로 제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또다시 싹트는 것을 보면
공존하는 선악은
영원히 존재해야할 일용할 양식과도 같다.
생각을 해보아라!
아무리 악을 제거하려해도 제거가 되지 않고
오히려 더 발악에 가까운 몸짓을 하고 있는
현실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살아남기 위한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입문과정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국내정치뿐 아니라 세계정치사에서도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공존하는 선악이 아니던가?
치열한 현실을 극복해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공존하는 선악이다 보니
그 누구도 이에 대해
해결할 방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더 치열한 공방전과 이권을 위해
정당의 목소리가 거칠어지고
세계무역전쟁을 일으킬 만큼 더 첨예지고 있으며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제3차 세계대전을 위해
전략자산인 최첨단무기와 핵무기로 중무장하고 있지 않은가?
공존하는 선악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들 곁을 떠나지 않고
한 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이제 와서 제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자 연목구어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 모든 악이 제거될 것 같은데
실제론 선에 맞서
더 악랄한 방법으로 살아남으려고 하는 것을 보면
공존하는 선악은 치열한 삶처럼 대치해가며
상생관계 속에서 살아남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공존하는 선악의 자태를
근본적으로 살펴본 후
선과 악이 공생하는 관계를
받아들이며 살아가야하는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을 떠나서
이는 운명이자 숙명이기 때문이다.
신도
하나님도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관계이기에
더욱 겸허한 자세로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사는 것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2018년 3월 25일 일요일
청아당 엄 상 호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