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하는 선악』/13. 인내심을 요구한다

공존하는 선악은 인내심을 요구한다

청아당 2019. 9. 7. 17:25

공존하는 선악은 인내심을 요구한다

 

선과 악은 끊임없이 인내심을 요구한다

선으로 기울 때는 악이 활동하고 
악으로 기울 때는 선이 활동한다

어떤 때는 
선과 악이 친구처럼 친근하게 지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선과 악이 불협화음을 내며 원수지간으로 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선과 악은 한쪽만 고집하지 않는다

이익에 따라 
악이 선으로 선회하기도 하고 
선이 악으로 선회하기도 한다

이 둘의 접점이 하나로 입맞춤할  
비로소 손을 맞잡고 행복어린 웃음을 내비친다

 

악이 선으로 변하기도 하고

선이 악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이것을 나쁘다고 생각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악한 사람이다.

 

이것을 좋다고 생각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선한 사람이다.

 

 

공동의 행복(=수익=수입=이익)을 위해

아니

공동의 선을 위해 손을 맞잡은 것이다.

 

공동의 불행(=비용=지출=손해)을 위해

아니

공동의 악을 위해 손을 맞잡은 것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공동의 선이 선하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반드시

공동의 악이 악하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관점이나 보는 시각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악보다는 선이 우리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을 보면

악보다는 선이 우리들의 곁에 머무는 것이 더 좋다.

 

그리고

악이 선을 이겨내는 것보다는

선이 악을 이겨내는 모습에

모두들 감탄과 탄성이 절로 나오는 것은

악보다는 선이 우리들 마음에 더 친근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지금 공존하는 선악이

시험대에 오른 가장 좋은 호기를 맞고 있다.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다.

 

극과 극의 성질을 지닌 세기의 대결이기에 그렇고

종잡을 수없는 변덕으로 인해

중재하기가 둘 다 쉽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과거사를 되돌아보아도 그렇고

현대사를 되돌아보아도 그렇다.

 

선과 악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를

관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성악설도

성선설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어질 수 있기에 더욱 그렇다.

 

중용의 도를 견지하며 지켜보는 것은

제대로 지켜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지

즐기기 위해 관찰하는 것은 아니다.

 

 

공존하는 선악은 
치열한 기싸움을 좋아한다

서로가 우위를 점하려고 
물밑작업을 한다

극과 극을 달릴 때도 있고 
유화적인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

 

치열한 탐색전 끝에

극적인 타결점을 찾아내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무슨 일이든지 힘들지 않은 것은 없다

특히 
공존하는 선악은 
변덕이 심해서 
공이 어느 쪽으로 튈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기에 
 애로사항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결국은 중심을 잡고 
한쪽 편과 손을 맞잡게 되어있다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듯이 
공존하는 선악은 그런 모양새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별도로 컨트롤하지 않아도

스스로 머물러야할 자리를 

정확하게 찾아들어가는 
공존하는 선악이기 때문이다

2018 5 25 금요일 

청아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