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하는 선악』/11. 공존하는 선악은 허물을 감싸

공존하는 선악은 허물을 감싸준다 – 하늘의 섭리

청아당 2019. 9. 7. 17:25

공존하는 선악은 허물을 감싸준다 하늘의 섭리

 

선과 악의 틈바구니에서 살다보면

선을 행하기도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악한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일반인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넘어갈 일도

유독 예민한 사람들은

크게 확대하거나 자신의 허물을 너무 나무라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면

은둔하는 경우가 생긴다.

 

전면에 나서서 행동하기보다는

선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선한 행동만을 찾아 가려고 한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선과 악은 공존하고 있기에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공간은

우주 그 어느 곳에도 없다.

 

인간시스템의 중대한 결함이다.

 

 

악한 사람도

방법을 몰라서 그렇지 얼마든지 선해질 수가 있다.

 

실제로 상담심리를 통해

악한 사람도 선한 사람으로 탈바꿈하는 경우가 있다.

 

 

교만은 자동조절장치에 의해 제어 당하고 있다.

겸손도 자동조절장치에 의해 제어 당하고 있다.

 

 

우연과 섭리라는 것이 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하늘의 섭리인 것처럼

우연을 가장한 인연도 하늘의 섭리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건 있다.

 

하늘이 쳐놓은 울타리나 함정에 빠지면

쉽게 헤쳐 나올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어찌나 정교한지

그리고

공간에 얽매이지 않다보니

무한정 시간을 늘려가면서까지 미래를 내다보고

옭아매는 경우가 있다.

 

 

하늘은 장차 큰 인물을 만들려고 하면

고난과 시련을 통해 시험하는 버릇이 있다.

 

요셉을 그렇게 했고

다윗 왕을 그렇게 했다.

 

대부분

하늘의 섭리에 걸려들면

함정에 빠지지 않은 사람들이 없다.

 

 

그건 그렇고

수련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욱 겸손해지고

악보다는 선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사서오경에 등장하는 예기(禮記)

불경에 나오는 팔정도(八正道)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해보며

행동으로 옮기려고 예의를 다 갖추지만

실전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것이

공존하는 선악이다.

 

 

10년 넘게 활동을 중지한 결과

필자도 모르게 많은 죄를 지었음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함께 공유하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방치하고 말았다.

 

뒤돌아보면

그래도 움직이지 않는 것보다는

움직이는 것이 그나마 낫다는 것이다.

 

 

사람이 살다보면 죄를 짓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죄의 경중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들이 결정할 문제다.

 

자신이 스스로 결정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결론은 그렇다.

 

공존하는 선악은 그 어느 곳에 있든 지간에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선과 악은 경계에 서 있다.

 

선의 기준은 착하다는 의미다.

악의 기준은 악하다는 의미다.

 

아무리 착해도 악해질 수가 있고

아무리 악해도 착해질 수가 있다.

 

이 둘의 조합 때문에 사람들은 헛갈려하기도 한다.

 

선하려면 계속해서 선해야하고

악하려면 계속해서 악해야하는데

그렇지가 못한 것이다.

 

이럴 때는 도대체 어떤 경계에 서야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고민 아닌 고민에 빠져들게 된다.

 

 

선이 > 악보다 크다면 선한 것이고

악이 > 선보다 크다면 악한 것이다.

 

반대로

선이 < 악보다 작다면 악한 것이고

악이 < 선보다 작다면 선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공식이자 통용이다.

 

 

공존하는 선악은 이 둘의 조합에서

벽을 깨뜨리는 역할을 해주고 있다.

 

같은 사람인데

어떤 때는 선한 행동을 하다가도

악한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고

어떤 때는 악한 행동을 하다가도

선한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

 

선이 악을 덮을 수 있으면 선한 것이고

악이 선을 덮을 수 있으면 악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은 분명 선한 행동을 했는데

결과론적으로는 악한 행동을 하게 된 경우다.

 

자신은 분명 악한 행동을 했는데

결과론적으로는 선한 행동을 하게 된 경우다.

 

반드시 선한 행동을 했다고 해서

선한 결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드시 악한 행동을 했다고 해서

악한 결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환장하게 만드는 일이다.

 

 

분명 착한정책을 폈는데 양면성이 발생한 것이다.

 

그 어느 정부에서도

이러한 양면성은 존재한다.

 

이를 나쁘다고 해야 할지

좋다고 해야 할지 고민을 안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있다.

 

교만이 주는 파급효과이다.

겸손이 주는 파급효과이다.

 

교만이 동적이라면

겸손은 정적이다.

 

동적인 행동과

정적인 은둔이 주는 결과는 무엇이겠는가?

 

움직이면서 행동하는 것하고

은둔하면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결과론적으로는

오히려 겸손이 악한 경우로 판정이 난다.

 

교만에서 벗어나

겸손의 미덕을 발휘하려고 했는데

그 반대의 결과가 발생한 것이다.

 

 

교만은 늘 있는 일이다.

 

일상에서 부딪히며 싸우고

치열한 삶의 현장이자

경쟁에서 서로 지지 않기 위해

더욱 비열한 짓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선한 사람에게

오히려 자극을 주어

예상치 못하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에는

이 둘의 경계에 서 있을 때

공존하는 선악으로 피해갈 수가 있다.

 

 

허물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다.

 

크고 작은 허물이 없는 사람은 없다.

 

교만도 적당하면 겸손한 것이고

겸손도 지나치면 교만한 것이다.

 

활동은 안 하는 것보다는

활동은 하는 것이 좋다.

 

움직인다는 것은

서로에게 배우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허물은

공존하는 선악이 대신 맡고 있기에

허물 때문에 크게 자책하는 일은 삼가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역사는 후세에 평가받듯이

죄의 경중에 대해서는

하늘의 섭리에 맡겨두면 되기 때문이다.

 

그냥

홀가분한 마음으로 살면 되는 것이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것이

하늘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201885일 일요일

 

청아당 엄 상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