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주천(丹의 불꽃이 두정을 뚫고 나오는 모습)이란?
<그림2-1 단의 불꽃이 두정을 뚫고 나오는 모습-대주천>
<그림2-2 단의 불꽃이 두정을 뚫고 나오는 모습-대주천>
대주천(丹의 불꽃이 두정을 뚫고 나오는 모습)이란?
대주천(大周天)이란 내부에 축적된 단의 불꽃이 두정을 뚫고 화산처럼 분출하는 과정을 말한다. 대주천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경락유통을 철저하게 행해야한다. 경락을 유통시킬 때는 의무적으로 소주천과 적주천 그리고 전신주천을 유통시켜 준다. 수련이 깊어질수록 에너지덩어리는 점차 밀도 있게 형성되어지고 내부에선 뜨거운 열기로 넘쳐난다. 그렇다고 뜨거워서 죽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수련을 하는 과정에서 내성이 길러지기 때문에 그런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소주천 경로를 따라 에너지덩어리를 이동시킬 때 주요혈을 통과할 때마다 뭉클거리는 느낌이 강하게 들것이다. 다시 말하면 몸 안에 강한 생명력을 가진 투명한 물체가 경혈을 뚫고 거세게 꿈틀거리며 각 주요혈를 무섭게 돌진하는 형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특히 회음혈과 장강 그리고 상단전 인당(니환궁)과 중단전 구미부분에서 가장 크게 에너지의 힘을 느낄 것이다. 에너지의 힘이 크면 클수록 집적능력은 커지고 영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길이 그만큼 빨리 열리게 된다. 그리고 정력을 아껴 기화(氣化 ; 액체가 기체로 바뀌는 현상. 기체화.)상태로 만들다보면 영적으로 승화되는 길도 그만큼 빨라진다. 실제로 정력과 인체전자석의 원리에 의해 우주의 기와 혼융되어 경락을 유통시키고 있다. 다시 말하면 <경락유통을 통한 인체전자석 원리>에 의해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요가에서는 챠크라라는 말로 통용되기도 하는 에너지덩어리가 절정에 다다르면 단의 불꽃이 불기둥을 일으키며 두정을 뚫고 몸밖으로 치솟는다. 마치 거대한 에너지덩어리가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이해가 안가면 화산이 폭발하는 모습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실제로 활화산처럼 내부의 에너지가 불기둥을 일으키며 폭발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얼마나 장쾌하고 우주적인 느낌을 받는지는 직접 체험해보면 알 것이다. 그만큼 내부에서 감당하기 힘든 전율과 통쾌한 리듬을 타고 지상 최대의 황홀한 경지에 드는 것이다.
인체전자석을 중심으로 시단법, 단음법, 음양합일법(나선형 바람개비)을 꾸준히 시행하다보면 丹사상이 확립되고 확고한 바탕 위에서 에너지덩어리를 집적시켜 기화시키는 과정을 겪게 된다. 에너지는 단순히 모양만 갖춰서는 안 된다. 어떻게 하면 에너지덩어리를 기화시켜 영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한다. 어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남이 만들어 논 것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나름대로 창의적인 생각을 일으켜야한다. 우리가 학문을 닦는 것도 단순히 과거의 지식만을 습득하기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학문을 바탕으로 새로운 학문을 창출해내기 위한 전주곡이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항상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해내는 일은 중요하다. 그만큼 열정적이어야 하며 남이 갖지 못하는 혜안이 겸비되어야한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저절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끊임없이 탐구하고 노력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단전호흡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이론들을 강조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혼란스럽도록 이론을 강조하고자하는 원래의 목적은 기덩어리를 단의 형태로 만들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부터 기의 존재를 느끼고 순탄하게 기를 집적시킨 후 단의 형태를 만들어 내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마다 기의 존재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 형태나 느낌은 어떠한지를 모른다. 그러다 보면 부수적인 설명이 따라붙게 되어있다. 어떻게 하면 보다 더 친밀하게 접근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기의 모양이나 형태에 대해서 명확하게 설명은 할 수 없다. 하지만 체험학습을 통해 기의 존재나 느낌들을 전해줄 수는 있다.
기는 한마디로 전기성(+, -)과 자기성(+, -)을 띠고 있다. 두 개의 성질이 조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초월적 현상들을 경험해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경험해 보려면 단순히 이론적 설명보다는 직접 몸으로 체험해봄으로써 보다 더 확실하게 피부로 느껴볼 수가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뜻으로, 무엇이든지 실제로 경험해야 확실히 안다는 말.)이라는 말은 이를 잘 증명해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무조건 단전호흡을 한다고 해서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은 아니다. 수련방법이나 마음가짐에 따라 천차만별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벼운 명상이나 건강만을 위해서라면 일반적인 단전호흡만으로도 많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 특별한 목적을 갖고 지고한 높은 세계를 경험해보고자 하는 수련자가 있다면 좀 더 깊게 고민을 해보아야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깨달음도 절정에 다다른 높은 온도를 유지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220V로는 전동차를 움직일 수 없듯이 전동차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33000V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요구되는 전력을 충분하게 뒷받침해주어야만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생각만으로는 꿈을 이룰 수 없다는 정중한 경고메시지이기도 하다.
대주천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높은 온도의 생명에너지를 얻어야한다. 온도를 높여 가는 방법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2차 지식상태가 있다. 2차 지식상태는 획기적이라고 평할 수 있는 아주 귀중한 호흡법이다. 2차 지식을 통해 초유의 강력한 내부의 온도를 높여 가는 것이다. 온몸이 불구덩이 속에 갇혀 용광로가 되어 활활 타오르는 모습을 연상해보아라. 얼마나 높은 온도에 갇혀 있는지를 실감할 것이다. 실제로 하단전을 단로(丹爐)라고 표현한 바가 있을 것이다. 그냥 단순히 용어가 생각나서 쓴 말은 아니다. 나름대로 체험을 통한 확고한 의지가 굳었기 때문에 쓰는 말이다. 그만큼 기의 기화현상을 강렬하게 느꼈고 단의 형상을 목격했기 때문에 쓰는 말인 것이다. 선도(仙道)에서는 단을 만들어 내는 일을 가장 어렵게 생각한다. 수많은 세월을 흘려보내야 완성될 수 있는 것이기에 가장 높이 떠받드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바꿔서 생각해보면 단을 만들어내는 열량이 약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세월을 보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볼 수가 있다. 즉 호흡량(대부분 1분 이내)이 작아 높은 열량을 만들어 낼 수가 없기 때문에 평생의 숙원사업으로 생각하며 방치해두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호흡량과 단은 비례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호흡량이 많아져야 단을 생성시킬 수 있는 높은 온도를 만들어 낼 수가 있다는 점이다.
단을 생성시키는 데에 있어서 호흡량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적어도 3분대 이상은 되어야 짧은 시간 안에 고밀도로 응축된 기덩어리인 단(丹)을 생성시킬 수가 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눈앞에 다가선 벽을 허물어야 할 때가 있다. 벽을 허물기 위해서는 기존의 방법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놀랄만한 획기적인 방법이 아니고서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고의 전환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집중적으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쏟는 기간은 그리 길지가 않다.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이 대부분이다.
단순히 기간만 길다고 모든 일이 완벽하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자신을 던져 혼신의 힘을 불어넣는 집중적인 열의가 없다면 불후의 명작은 탄생되지 않는다. 그만큼 혼신의 힘을 다하여 영혼을 불사를 수 있는 기간은 생각보다 짧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 행하고 있는 높은 호흡량(3분대 이상)은 단을 생성시키는 원동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만큼 단을 생성시키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높은 온도를 만들어 내는 호흡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높은 호흡량을 보유하고 있다면 분명 많은 면에서 진척이 빠를 것이다. 호흡량이 높으면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혹시 죽거나 잘못되지는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걱정을 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무작정 진행시키지는 않는다는 점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나름대로 안전장치를 취하면서 진행시켜나가기 때문에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위험하지는 않다. 그만한 호흡량에 견뎌내도록 세심한 배려를 해놓기 때문에 크게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또한 호흡량이 늘어날수록 내성이 길러지기 때문에 안심해도 된다. 만약에 제시한 호흡량에 접근할 수 없다면 스스로 포기하면 된다. 그리고 그만한 혜택만 받으면 된다. 자신의 신체에 적응이 되지 않는다면 굳이 무리할 필요까지는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이러한 경지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남다른 초극의 인내심을 지니고 있는 수련자에게만 주어지는 혜택이다. 하늘은 그래서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것이다. 하늘이 내려준 극기의 과정을 극복해 내지 못하면 그것으로 문을 닫는다. 어떤 면에서 보면 하늘은 참으로 냉정하다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하늘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 모두에게 내리는 공평성을 하늘은 스스로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것뿐이다. 이점에 대해선 사람들이 하늘의 깊은 뜻을 이해하는 수밖에 없다.
청아당 엄 상 호 글